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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5-1) - "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고? " / 최병학 목사 (맥추감사주일)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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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강림후(5-1) - "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고? " / 최병학 목사 (맥추감사주일)

관리자 2020-07-03 (금) 11:22 3년전 1430  

본문) 욥 28:12-28 행 17:16-34 요 8:31-38


1. 선교, 우상숭배 타파와 토착화로!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2020년 상반기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비록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힘들고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의 제사로 모인 여러분들께 2020년 하반기에는 감사의 조건들이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성령의 생명의 역사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만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이방인들까지 구원하시는 역사를, 바울의 마게도냐 전도 여행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유럽과 미국까지 포함되겠죠? 그리고 요나를 통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그들에게 성령의 생명의 역사를 전하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증거 하기 위해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참 지혜와 명철을 깨닫고 선교지의 수준 높은 철학과 문화를 이해하고 겸손히 복음을 전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은 단순합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복음이 2,000년 역사를 통해 풍성해졌습니다. 기초적인 신앙에서는 단순한 복음, 곧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말씀만 믿고, 예수님의 삶을 따라 실천하면 됩니다. 그러나 2,000년 동안 이 복음이 여러 나라의 문화와 상황 속에서 어떻게 토착화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복음의 놀라운 소식이 로마와 유럽, 미국과 우리나라 등 시대상황과 지역문화에 따라 어떻게 그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켰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기독교 신앙이 미신으로, 혹은 광신으로 빠지지 않고, 상식에 기초한 신앙, 건전한 신학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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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형성사: 한국 종교와 개신교의 만남』 (새물결플러스, 2020)에서 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옥성득 교수는 한국 개신교의 지층을 세 가지로 살펴봅니다. 



“한국 기독교의 지층에는 태평양을 건너 전파된 ‘영미 기독교’와 황해와 만주를 통해 전래된 ‘중국 기독교’, 그리고 한국의 여러 종교들과 유기적으로 만나 형성된 ‘한국적 기독교’가 여러 층으로 쌓여 있으며, 이들을 융합시키는 촉매제가 된 혁명과 전쟁과 역병과 기근 등 시대 상황이 그 광맥을 관통하고 있다.”


19세기 서양의 개신교는 동아시아 문화와 종교에 대해 한편으로는 ‘우상숭배 타파’와 또 다른 한편으로는 ‘토착화’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조상의 정령과 우상의 ‘미신적인’ 숭배 그리고 아편, 전족, 일부다처제 등의 동아시아 문화의 악습에 공격을 가한 것이 우상파괴의 측면이라면, 토착화의 측면에서는 기독교와 전통 종교 사이에 있는 유사한 접촉점을 강조하고, 전통 종교를 ‘복음의 준비’로 받아들였습니다. 옥성득 교수의 말입니다.


“적응과 토착화라는 방법론을 채택한 결과, 한문 개신교 소책자는 한국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역사적으로 이와 유사한 사례는 한 세기 전, 유교에 적응한 마테오 리치의 한문 천주교 문서를 한국 유학자가 받아들일 때 발생했다. 천주교의 경우에는 박해와 핍박으로 꽃피지 못했으나, 개신교는 시행착오를 줄이면서 상대적으로 많은 종교의 자유 속에서 급성장하면서 토착화의 열매를 거둘 수 있었다. 중국 기독교의 신학과 문서가 서구 미 기독교와 한국 종교 문화 사이에 가교 역할을 했다.”


따라서 1880년대부터 1910년대에 활동한 초기 북미 선교사들은 미국 주류 개신교의 온건하고 총체적인 복음주의를 유산으로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사실 교계의 일반 상식으로는, 북미 선교사들은 근본주의자, 청교도 도덕주의자, 백인우월 인종주의자, 기독교 문명주의자, 문화제국주의자, 현실도피 전천년론 세대주의자, 영육 이원론 분리주의자, 타종교 극단적 배타주의자였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보수주의 신학에서는 이것을 정통이라고 보았고, 진보주의 신학과 민족주의 진영은 이러한 북미 선교사를 비판함으로 우리나라 민족, 민중, 교회, 신학의 독립성과 주체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옥성득 교수의 연구는 1910년 이전에 활동한 선교사들이 1920년대에 세대주의적 이원론을 통해 전투성을 띠게 되는 근본주의자들(오늘날 한국 장로교의 주류가 되는)과는 달랐다는 사실을 밝혀준 것입니다. 


2. 알지 못하는 신에게


이러한 초창기 개신교 전래와도 같은 복음의 토착화 내용이 오늘 사도행전에도 나옵니다. 말씀을 볼까요? 지난주 사도행전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마게도냐로 2차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의 아테네(성경에는 아덴)로 가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하려 하자, 사람들이 바울을 아덴으로 내보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실라와 디모데)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행 17: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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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아덴에서 설교하는 바울>



복음 전파에 있어서 기존 문화와 종교에 대한 우상 숭배 타파의 측면입니다. 아무튼 이때 사람들과 변론하는데, 당대 그리스-로마의 위대한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행 17:18)

 

아테네에서 발생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는 모두 유물론 철학입니다. 특히 에피쿠로스 학파에 의하면, 세상 만물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는 원자들의 우연한 집합에 의해 생겨났다고 합니다. 또한 스토아 학파는 로고스를 말합니다. 우주적 이성인 로고스가 우주의 자연법칙이며, 그러한 이법(理法)이 인간 정신에도 있다고 말합니다. 조선 시대의 퇴계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또한 이 두 학파는 그 이전 그리스 철학자들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나타나는 객관적 세계에 대한 탐구(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보다는, 알렉산더로부터 로마 제국이 벌이는 끊임없는 전쟁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고요한 마음의 평화를 얻을 것인가를 탐구했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절대적인 지배 아래, 세상을 바꾸기 보다는 전반적으로 로마의 지배에 동조하며 체제에 순응하는 염세적인 철학이었습니다. 


따라서 에피쿠로스 학파는 아타락시아(Ataraxia, 외적 고통에서 평온함)와 쾌락을, 스토아 학파는 아파테이아(apatheia, 내적 정념에 초연함)를 이야기 합니다. 아무튼 두 학파 모두 유물론 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에, 부활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중에 몇 사람이 바울에게 묻습니다.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행 17:19-20) 


물론 당시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행 17:21)”았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자유인이었던 그리스 사람들과 외국인들이 철학하는 일로, 곧 지혜를 사랑하는 것(philosophy)으로 시간을 보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그들에게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레오바고는 아크로폴리스 아래 언덕입니다. 아크로폴리스는 그리스 아테네의 바위산 높은 지대에 있는 성채입니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있으며, 주요관공서와 종교건물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 밑 광장에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 17:22-23)


앞서 말씀드린 토착화 전략이죠?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 17:24-27)


여기서 바울은 에피쿠로스 학파의 유물론, 곧 우주 만물을 원자로 설명하며 신의 섭리를 부정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리고 스토아 학파의 로고스, 곧 이성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계속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28-31)


심판과 회개, 그리스도의 부활과 믿음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이들 철학자들은 부활신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행 17:32)” 따라서 바울은 그들 가운데서 떠납니다(행 17:33). 그러나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행 17:34).”고 합니다. 이들은 바울의 아덴 전도의 첫 열매입니다. 우상파괴와 토착화 전략으로 100%는 아니지만, 전도의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3. 지혜는 어디서 오며


왜냐하면 참 지혜와 명철을 깨닫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구약 본문의 주인공 욥도 사람이 지혜를 얻는 일이 힘들고 어려운 것임을 고백합니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을 강조하죠?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욥 28:12-14)

 

지혜는 값을 매길 수가 없습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순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리니, 오빌의 금이나 귀한 청옥수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겠고, 황금이나 수정이라도 비교할 수 없고 정금 장식품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진주와 벽옥으로도 비길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산호보다 귀하구나. 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헤아리지 못하리라.” (욥 28:15-19)

 

철학자들이 말하는 지혜, 그것은 귀한 것이지만,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 스토아 학파 사람들이나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도 정확히 알지 못한 것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원자의 우연적인 집합(좀 더 정확히는 편위운동clinamen, 곧 원자들의 이탈운동을 뜻합니다만)으로 우주 만물을 설명하니, 지혜와 명철은 그 유물론적 질서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토아 학파는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로고스의 분별력이 참 지혜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고?(욥 28:20)”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 답합니다.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려졌으며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살피시며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 (욥 28:21-26)


창조주 하나님이야말로 지혜의 근본임을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욥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 때에 그가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탐구하셨고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 28:27-28).” 참 지혜는 원자를 통한 우주의 법칙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또한 전쟁을 일삼는 제국의 폭력과 악을 떠나는 것이 명철이라는 말입니다. 


4. 종이 된 적이 없거늘


놀라운 것은 이방인들은 바울의 우상숭배 타파와 토착화 전략으로 인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데,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복음서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과 대화를 나누십니다. 이들을 우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들과 조금 차원이 깊은 말씀을 나누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요 8:33)”고 반문합니다. 


자유라는 것은 구속을 당하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롭지 못한 종과 자유인은 반대 개념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예수님을 믿지만, 자신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생각하고,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 8:34-36)

 

그리고 말씀을 덧붙입니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요 8:37-38).” 


비록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선민으로 택하심을 받은 민족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없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유럽과 미국의 형식적인 기독교 국가의 모습을 질책했었죠? 복음의 진정한 내용이 없이 백색신화를 퍼트린 거짓 복음에 관해 제 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는데, 바로 오늘 복음서의 말씀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참 지혜와 명철은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철학과 지혜에도 있지 않습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에 지혜와 명철이 있는 것입니다. 


5. 물고기자리에서 물병자리로 


서양에는 점성술(astrology)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스트로’가 별이니, 별의 빛깔이나 위치로 길흉을 점치는 술법을 말합니다. 고대 바벨론에서 시작되었는데, 동양에도 중국이나 조선 시대에 천문현상으로 운명(과 계절, 시간, 일기의 변화)을 미리 알고자 하였습니다. 왕이 가장 신경 쓰는 것 중에 하나였습니다. 


2세기 경 천동설로 유명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127-145)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문학은 제1의 과학이고, 점성술은 그 응용으로서 제2의 과학이다.” 케플러는 점성술로 생활비를 벌어 쓰며 천문학을 연구했었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점성술은 천문학의 어리석은 딸이지만, 그 딸이 화류계에 나서서 벌어 온 돈으로 어버이가 되는 천문학을 먹여 살린다.”


물론 천문법칙이 자세히 알려질수록 점성술사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정치고문으로, 왕의 비서로, 재상들도 두려워했던 점성술사가 이제 천문학의 발달로 제왕의 옆을 떠나, 길가의 점쟁이로 전락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성술 가운데 의미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령 점성술에 따르면, 12개의 별자리 중 하나의 별자리에서 그 다음 별자리로 넘어가는 시간은 2,000년입니다. 기원후 1년 부터 2,000년까지는 물고기 자리였죠? (물론, 더 정확히는 지구 세차 운동의 주기인 25,800년을 황도 12궁으로 나누게 되면, 2,150년이 한 시대의 주기가 됩니다만, 편의상) 익투스(ΙΧΘΥΣ, ιχθυs), 곧 물고기는 “Ιησoυs Χχριστοs Θεοs Υιοs Σωτηριαs(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구세주)”라는 헬라어 앞글자만 가져온 것입니다. 


물고기자리의 상징적인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세주라는 것이며, 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고기는 1세기 로마의 카타콤(Catacombs)의 프레스코 벽화에서 발견된 후 고대 그리스도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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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투스(물고기)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뜻 



그렇다면 이제 2,001년부터 4,000년까지 새로운 2,000년의 별자리는 무엇일까요? 물병자리입니다. 사실 서양 점성술에서 2,000년을 단위로 시대를 구분 짓는 것은 우주가 그 이전과는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고기자리의 기독교 정신이 이제 물병자리의 어떤 정신으로 바뀐다는 말일까요?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이렇게 분석합니다. 


“물병은 모든 것을 그 안에 담는 것으로 통합의 상징이다. 남성 원리와 여성 원리, 노인 원형과 소년 원형, 동양 정신과 서양 정신 등 그간 존재하던 전혀 다른 대극적 원리들을 통합하여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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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병자리



물고기자리보다 앞선 염소자리가 ‘이분법적인 세계의 형상’이었다면, 물고기자리를 지나온 물병자리는 이제 이분법이 온전히 해체된 대통합의 시대가 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점성술의 관점에서 이제 21세기는,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은 남북이 평화로 하나가 되는 세상, 그리고 동과 서가 차별 없이 만나는 세상, 서양과 동양이 협력하는 세상, 남성과 여성이, 어르신들과 아이들이 소통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이 상반기 감사절인 맥추감사절입니다. 감사는 나눔과 분리, 싸움과 갈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품고 안아주고, 감싸주고 용서하며 용서받는데서 나옵니다. 이것은 이제 우상파괴의 배타성만이 아니라, 토착화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대화로 복음의 선교 전략이 변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 복음의 소통의 물병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를 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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