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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2-3) - " 하나님의 최종적인 사랑 " / 김진수 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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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성령강림후(2-3) - " 하나님의 최종적인 사랑 " / 김진수 목사

관리자 2018-06-02 (토) 09:24 5년전 4845  

본문) 갈 6:1-10 / 요 7:53~8:11 / 미 7:18~20

    

죄는 어디든지 언제든지 있습니다. 불신의 사람뿐 아니라 예수 믿고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여전히 죄의 본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 가운데도 있었고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죄를 어떻게 처리하고 극복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죄가 드러나고 추악한 환부가 드러나는데 그 죄악을 처리할 힘도 방법도 없습니다. 다만 그 죄를 비난하고 헐뜯고 들춰내고 공격하면서 자신들도 여전히 그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이 가장 미워하는 죄에게 사로잡혀 모두가 죄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 안에는 다른 사람의 죄를 대하는 놀랍고 전혀 새로운 길이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죄를 덮고 그 죄를 용서하며 그 죄인을 서로 사랑하며 무거운 짐을 서로 지는 것입니다. 죄를 벗어나는 길, 죄를 씻어버리고 죄인을 거룩하게 하는 전혀 새로운 길을 걷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7:18-20)

 

하나님은 애굽의 중노동과 고역의 노예생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애굽에서 벗어날 아무 힘도, 공로도 없었으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다만 힘들고 어려운 고통에서 해방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폭력으로 힘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아 중노동과 고역의 멍에를 매게 했던 애굽 사람들의 불의와 죄악으로부터 벗어나게 한 것입니다. 다만 가나안 땅에 사는 가나안 칠족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해서 새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우상 숭배와 탐욕과 향락과 폭력가운데 살았던 가나안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평화를 이루며 사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셔서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땅히 살아가야 할 새로운 계명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 타락한 가나안 문화에 물들지 않고 살아갈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건져내 주실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참 사랑입니다.

 

그런데 시내산 율법을 받은 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와 불순종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마치 하나님이 미워하셨던 애굽 사람들처럼 살았고 가나안 땅의 타락한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았습니다. 광야 40년간의 삶이 그랬고 가나안 땅에서 살았던 사사시대, 왕조시대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같은 이스라엘, 가나안족속 같은 이스라엘을 다시 옛날 애굽의 노예처럼 포로생활로 돌이키셨습니다. 앗수르와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전히 그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죄악으로 인해 바벨론포로가 되었으나 하나님은 70년 후에 다시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제 다시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넘어졌을지라도 용서하심으로 다시 새로운 기회를 베풀어 주십니다. 오직 끝없는 사랑과 용서, 은혜와 구원을 입혀주십니다. 다시 한 번 그의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기회를 주시며 끝없이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깊은 바다에 던지십니다.(19) 우리가 바로 세워질 때까지 끝없이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사랑(8:1-11)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이 세상은 무질서와 혼돈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고 불의를 징계할 뿐, 죄인을 구원할 힘과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용서로는 온전히 죄를 끝장낼 수가 없습니다. 또 다시 죄를 범하는 기회를 줄 뿐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유예하고 연장시켜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죄를 끝장낼 소위 요즘 자주 말하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최종적인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예수께서 말씀하신 한 비유를 보면 포도원을 세로주고 타국에 간 포도원 주인이 세를 받으러 보낸 종들을 때리고 돌로 치고 죽이는 악한 농부들에게 마지막으로, 최종적으로 그의 아들을 보냅니다.(21:33-41) 그동안 오랫동안 참았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참아서 될 일이 아닙니다. 이 상황을 끝장내야 합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이 최종적으로 행한 일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아들을 보낸 일입니다. 아들까지 거부하면 더 이상 자비는 없는 것이지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 가운데 사는 그의 백성들을 오래 참고 기다리시다가 최종적으로 그의 아들을 보내십니다. 심판하러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이제 마지막으로 죄를 끝장내시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심판은 그 후의 일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보면 율법에 정통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을 예수께 데려와 말합니다. 율법에는 돌로 쳐 죽이라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3-4)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 법입니다.(22:24) 이 법대로 한다면 이 현행범은 죽음을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죄 있는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했으면 당장 그 여인에게 돌이 날아갔을 것입니다. 아울러 공적인 재판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공격과 비난의 돌이 주님께로 날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몸을 굽혀 땅에 글씨를 쓰셨습니다. 생각나십니까? 하나님도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그의 손으로 친히 십계명을 써주신 적이 있습니다.(31:18) 그런데 하나님이 처음으로 그의 손으로 돌 판에 써주신 그의 계명은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숭배하는 이스라엘의 죄를 향해 모세가 던짐으로 깨졌습니다. 지금 그 율법을 모세에게 써주신 그분이 다시 땅에 글을 쓰시며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 마치 모세가 하나님이 써주신 돌 판을 내던지듯 여인을 돌로 치려하는 이들의 숨겨진 죄를 향하여 심판과 정죄의 돌 판을 던진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두 번째 몸을 굽혀 땅에 글을 쓰십니다. 글을 쓰시는 동안 모두가 돌을 버리고 하나 둘씩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오직 그 앞에 홀로 남은(9) 죄인을 향해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 기억하십니까? 첫 십계명 돌 판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던져 깨지고 두 번째 쓰신 증거판(돌 판)을 궤에 넣고 속죄소를 그 위에 둔 것!(40:20) 율법은 명확합니다. 범죄한 자들이 받을 것은 심판과 죽음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공의로운 법을 담은 궤 위에 속죄 염소의 피를 쏟는 속죄소를 두셨습니다. 속죄소 아래에 하나님의 법을 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의 죄를 끝장내시기 위해 행하신 첫 번째 일입니다.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그의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그 속죄의 피를 통해 우리의 죄를 속량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을 궤 안에 넣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 백성들의 죄를 끝장내시기 위해 행하신 두 번째 일입니다.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진리의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시고 우리를 의의 길로 걷게 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완전하고 불가역적으로 죄로부터 구원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마지막 최종적인 사랑과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큰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큰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제 최종적으로 그의 독생자를 보내사 우리 위해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완벽하게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성령공동체(6:1-10)

 

교회는 더러운 죄인의 집단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조금 선해지지만 결국 다시 더러워지는 모임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한 백성들의 모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룩함을 받은 교회는 교회의 거룩함을 항상 유지해가야 합니다. 교회는 쓰레기장같이 이미 어질러지고 계속 더러워지는 집을 계속 청소하느라 지치고 포기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이미 완벽하게 청소되고 정리된 집에 들어가 다시 더럽혀지지 않도록, 쓰레기가 쌓이지 않도록 그 청결함을 잘 유지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의 최대의 과제는 거룩입니다. 거룩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더 더렵혀지기 전에 바로”, 쌓이기 전에 즉시더러움을 몰아내는 일입니다. 저는 교회 안에 있는 목양실의 청결을 유지하는 비법(?)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즉시바로잡는 것입니다. 하루를 보내고 나면 책상위에 책들과 서류들과 찻잔으로 어질러져 있습니다. 그것을 그냥두면 큰일입니다. 열흘쯤 지나면 금방 치우기 어려울 만큼 큰 산이 됩니다. 몇 시간 걸릴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바로 치우고 방을 나옵니다. 바로 치우면 쉽습니다. 2,3 분이면 정리가 됩니다. 습관이 되니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다음 날 들어오면 기분이 좋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실수로 넘어져 범죄한 사람이 생기면 방관하지도, 비판만 하지도, 모른 채 덮지도 말고 바로 잡아야(그물을 깁듯)합니다. 결코 범죄 한 사람이 그 죄악가운데 있지 않고 주의 진리가운데 살도록 바로 찾아가 그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헤어진 그물을 그냥 두면 영영 못쓰게 됩니다. 그러나 한두 군데 헤어진 곳을 바로 수리하면 새것처럼 다시 쓸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마치 서로 짐을 지듯 서로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필요합니다.(1-2) 더 나아가 남의 허물로 내가 의로운 줄 착각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살펴 내 안에도 형제 자매들을 아프게 하는 허물이 없는지를 살펴(1, 3)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 남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랑할 일이 생기게 되지 않겠습니까?(4) 무엇보다 교회는 서로의 허물을 캐는데서 돌이켜 오히려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함께 좋은 것을 나누는데 힘써야 합니다.(6)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전하는 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 전하는 자와의 관계가 어그러지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막힙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게 되지요. 또한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함께 좋은 것을 함께 나눔으로 그 말씀 전하는 자가 다른 고통 없이 말씀에 전무하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전하는 자를 선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만홀)이요 그들에게 심는 데로 거두게 될 것이요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주께 한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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