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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2-1) - "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 " / 총회선교주일 / 이순태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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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강림후(2-1) - "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 " / 총회선교주일 / 이순태목사

관리자 2020-06-10 (수) 20:46 3년전 1213  

본문) 렘 1:4-10, 행 9:1-19, 마 9:35-10:1

 

1. ① 신구약 성경의 핵심 주제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통치인데,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나라이다. 억지로 강압에 밀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나라이다. 이것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홀로 일하지 않으셨다. 반드시 사람을 세워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펼치셨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불러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실까? 

 

  ②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또한 병을 치유하실 때에도 사람들을 세우셨다. 12 제자들이 그들인데, 그들의 신분을 보면 극히 평범한 인물들이었다. 어부, 세리, 열심당원, 그리고 출신에 대해 잘 알 수 없는 자들도 있었다. 직업도 다르고, 연령이나 성격 모든 것이 그만그만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택함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선택은 당시 유대교의 주류와는 매우 달랐다. 어떤 점에서 다르냐 하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세우신 인물들은 거의 바닥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귀족이나 학자, 유력인사들이 그중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왜 그런 자들을 제자로 삼으셨을까? 그것은 어떤 인맥도, 사회적 배경도, 개인적인 능력도 예수님의 제자 조건이 되지 않음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이다. 

 

2. ①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부르는 하나님의 모습은 구약성경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를 살펴 보겠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에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절 남유다는 국내적, 국제적으로 엄청난 혼돈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약관의 나이 20세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예언자가 되었다. 그냥 아나돗이라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언자가 아니라, 여러 나라의 예언자라는 대임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서 1:10절에서 예레미야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유다 한 나라뿐 아니라, 여러 나라의 흥망까지도 예언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 20대 젊은이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그런 직임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이로도 경험으로도 그런 직임을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력하였다. 

 

  ②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예레미야는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 1:6).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려 주는 인물이다. 예언자는 사람들을 일깨워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무대 위로 떠밀어 적절한 배역을 담당케 한다. 예언자는 때로는 화가 날 정도로 우리의 가면을 찢어버림으로써 각자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이런 직임을 이행한다는 것, 결코 쉽지 않다. 더욱이 나이가 어린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할 때 누가 그 말을 신뢰할 수 있을까? 예레미야는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이런 거절은 문화적 배경을 깔고 있다. 성경 전반에 걸쳐 나이 듦은 연륜과 지혜를 의미하였다. 우리 사회에서는 나이보다 젊게 보이는 것이 자랑이요 칭찬으로 들릴 수 있지만, 중동 문화에서는 그렇지 않다. 지금도 중동에서는 누군가를 본래의 나이보다 어리게 보는 것은 큰 결례로 간주된다. 구약성경 시대에서도 젊음은 불리한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거절을 하였던 이유는 자신이 너무 어리기에 아무도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즉 자신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는 부적격자라는 말이다. 

 

  ③ 이런 거절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라”(렘 1:7)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주저하는 것이 당연함을 잘 아셨다.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과,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시키시는 일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 내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원대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단순히 어떤 직임을 맡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보다 더 큰 뜻이 있는데, 그것은 그 일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인격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개입하신다.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1:7-8).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가지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서 그것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그를 구원하신다는 약속을 주셨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과 강권에 예레미야는 결국 예언자 직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3. 그런데 사도행전 본문에는 단순히 사명에 소극적인 것을 넘어 광적 박해자인 사울을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시는 것을 볼 수 있다. 

  ① 사도행전 9:1절에 의하면, 사울은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고 한다. ‘여전히’란 단어는 앞의 사건을 전제하는 것이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는 지켜보기만 했던 그가, 그 이후 주의 제자들을 잔멸하는 과정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는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을 넘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자 하였는데, 그의 눈에 들어온 곳이 다메섹이었다. 다메섹은 현재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의 히브리식 발음으로서, 예루살렘에서 약 213km 떨어져 있는 도시이다. 2천 년 전 로마 제국에 속한 다메섹에는 약 4만명의 유대인들과 30개의 회당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대교의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다메섹으로 피신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전도로 다메섹의 유대인들 중 주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울은 대제사장의 위임장을 받아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마저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다. 

 

  ② 이제 다메섹이 가까워지고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을 일망타진할 각오를 새롭게 할 즈음에 놀라운 일이 사울에게 일어났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쏟아지더니, 그 빛이 사울을 휘감았다. 그 기운이 얼마나 강했던지 사울은 그만 땅바닥에 엎드릴 수 밖에 없었다.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울에게 빛으로 찾아오신 것이다. 이에 대해 사울은 사도행전 26:13절에서 아그립바 왕에게 좀더 구체적 진술을 하였다.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정오의 태양 빛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는 것이다. 

 

  사울은 그 빛 속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소리를 듣고 물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순간 사울의 시간은 멈추었을 것이다. 사울은 당황하였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는데, 자신이 예수님을 박해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사실도 충격적인데, 만난 적도 없는 예수님을 자신이 박해해 왔다는 예수님 말씀은 매우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당신을 만난 적도 없는 사울이 당신을 박해하였다고 말씀하셨을까?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울이 예수님이 구원자 되심을 부인한 것이다. 둘째는 사울이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박해한 것을 주님 자신을 박해한 것으로 간주하신 것이다. 

 

  ③ 보무도 당당하게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은 다메섹을 지척에 두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서 쓰러졌다. 그 만남은 사울의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 일이 있은 직후,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지만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결국 사울은 사람들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면 다메섹에서 사울은 어떻게 지냈는가? 사도행전 9:9절은 말씀한다.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울에게는 모든 것이 참담하기만 하였다. 이제까지 자신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긴다고 자부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 사울은 시력을 상실한 채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금식기도를 드렸다. 그의 기도는 주님의 다음 응답이 있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사울에게서 기도란 낯설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기도는 그의 삶의 일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드리는 기도는 그 내용이나 질에 있어서 기존과는 전혀 달랐다.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후, 사울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신념이나 생각이 전혀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원점에서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사울이 기도하는 동안, 주님은 이미 예비하신 일을 이루어가셨다. 주님은 사도행전 9:6절에서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10절은 그가 ‘아나니아’임을 보여 주고 있다. 아나니아는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주님께서 환상 중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ㅛ사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내신 것이다. 

 

  그런데 아나니아가 주님께 이의를 제기하였다. “주님, 사울이라는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대제사장의 위임장까지 받아서 다메섹에서 성도들을 결박해 잡아가려 합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의 악명, 그가 다메섹을 방문한 목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나니아의 말 이면에는 그런 자에게 왜 제가 가야합니까? 라는 항변이 들어있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도행전 9:15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아나니아의 눈에서 보면 사울은 가까이할 수 없는 악인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주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친히 택하신 ‘나의 그릇’ 곧 주님의 그릇이었다. 주님의 그릇이란 문자 그대로 주님을 담는 그릇이다. 이것은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경이로움이다. 

 

 

4. 아이와 같은 예레미야를 열국의 예언자로 부르시고, 갈릴리의 어부들을 사도로 부르시고, 끔찍한 박해자인 사울을 주님의 그릇으로 불러주신 것 모두 주님의 일방적인 은총이었다. 이제 우리를 불러 주님의 그릇으로 삼아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자리가 어디이든지 주님의 증인으로서, 항상 주님을 담고 살아가는 그릇으로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도 숨을 쉬고 있다면, 아직도 멀쩡한 정신이 있다면 주님께서 여전히 기회를 주신 것이다. 주신 기회에 감사하면서, 여러분의 지나온 길보다 남은 길이 더 복되고 아름답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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