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성령강림후(2-1) - "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 / 서재경 목사 > 성령강림절

본문 바로가기

성령강림절 HOME > 설교올리기 > 성령강림절

[셋째해] 성령강림후(2-1) - "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18-05-30 (수) 18:18 5년전 3075  

본문) 갈 6:1~10, 요 7:53~8:11, 미 7:18~20 

 

음행하다가 잡혀온 여인

귀향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개봉한 지 닷새 만에 백만 관객을 돌파했던 영화이지요. 이 영화는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열네 살 정민이라는 소녀가 어디로 가는지 영문도 모르는 채 끌려가서 겪어야 했던 참담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귀향이라는 영화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요한복음에 기록된 한 여인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이른바 음행하다가 잡혀온 여인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지요? 그런데 어쩌다가 이 이야기가 여기에 기록되었을까요? 우선 간략하게 분문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이 이야기는 기록하여 전승하기에는 좀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야기 중에서도 아주 인상 깊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보다 먼저 기록된 공관복음서들에는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가장 늦은 복음서인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중에서도 오래된 초기 사본들에는 이 이야기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사본 중에서도 비교적 뒤에 이 이야기가 첨부하듯 기록되었다는 말입니다. 성서를 보면 요한복음 753절부터 811절까지 괄호로 묶어 놓았지요. 괄호로 유보해 놓은 본문입니다. 이렇게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도 후기에 들어왔으며, 사본에 따라서 그 위치도 달라집니다. 요약해 보자면, 이 이야기는 처음 그리스도인들이게 잘 알려진 이야기였지만, 정작 기록되게 된 것은 뒤늦은 시기였으며, 기록으로 남기면서도 꽤나 망설여야 했던 본문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이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걸림돌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는 것은, 박해의 위험 속에서 복음을 전해야 했고, 여러 가지 윤리적인 면에서 오해를 받아야 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상당히 껄끄러운 문제였을 것입니다. 결혼을 하나님의 섭리로 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충돌되지요.(10:6-9)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윤리적인 생활을 강조한 것을 보아도, 이 이야기는 상당한 걸림돌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 이야기는 복음서에 기록되지 못하고 기억에서 지워질 뻔했습니다. 그렇게 복음서 기록의 거의 마지막 단계에서 정확한 제 위치도 차지하지 못한 채 기록되어서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지요. 하마터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을 수도 없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이야기가 요한복음에 이렇게 기록되어서 우리가 이 여인을 기억하게 된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일단 이러한 기록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본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에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이 한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말했지요. “이 여자는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율법을 부정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는 분 아닙니까. 그런데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이 물음을 듣고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답답하지요. 그들이 다그쳐 묻자,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다시 땅바닥에 뭔가 쓰셨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이, 나이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갔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지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런데 이 이야기가 뭘 말하려는 것일까요?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어떤 간음한 한 여자를 정죄하지 않고 보내준 에피소드를 전해주고 마는 것일까요? 이 이야기는 어떤 한 여자가 입은 은총을 말하는 데 그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보다 이 이야기를 전하고 기록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쟁과 여인들

복음서를 기록하던 시기는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대전쟁을 치른 이후였습니다. 유대전쟁은 강력한 무력을 갖춘 로마의 군대에게 결사항전으로 맞섰다가 참담하게 패한 전쟁이지요.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변변한 무기도 없이 나섰던 유대인 남자들은 처참하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으로 죽은 자가 육십 만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과장되어 보이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옛 시대에 패전이란 남자 병사들의 몰락을 의미합니다. 웬만한 유대 남자들은 의병으로 나섰다가 패전으로 처형당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외지로 떠돌며 고난의 행군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런 전쟁의 와중에 더욱 고통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힘없는 약자들이지요. 무엇보다 여인들입니다. 전쟁의 아비규환 속에서 힘없는 여인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전쟁이 끝나고 나면 또 남자 없이 수많은 여인들이 모든 생계를 감당하며 힘겹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전쟁이 끝나고 난 후에 여인들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 말에 화냥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방질하는 여자, 이른바 간음하는 여자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말은 본래 환향녀’(還鄕女)라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옛날 고려에서 중국으로 잡혀갔거나 공녀로 보냈던 여자들이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오면, 그것이 고향으로 돌아온 환향녀’(귀향녀)인데, 이게 몸을 더럽힌 여자라고 해서 화냥년이 됐다는 것이지요. 예수님 시대에도 이방인 군대가 거주하는 지역에 있거나 포로로 잡혔거나 하면, 부정한 여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유대 전쟁에서는 로마의 군대가 점령하지 않은 지역이 별로 없으니 남아 있던 여인들은 부정한 혐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런 고통스러운 역사 속에서 여인들이 짊어져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들을 죄인이라 정죄하는 것일까요?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진다는 말입니까?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무지랭이요 죄인이라고 천대하고, 역사의 질곡을 짊어지고 신음하는 여인들을 부정한 여자요 창녀라고 정죄했습니다. 전쟁의 지독한 상처로 고통당하는 여인들에게 음행하는 여자라고 돌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여인들, 힘없이 역사의 고통을 짊어진 여인들을 정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로하고 싸매주고, 친구가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진짜 음행하는 죄인이 있다면, 그게 누구일가요? 가장 드러내놓고 간음하는 자가 있지 않습니까? 헤롯이지요.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정략결혼을 하고, 수많은 여인들을 농락하고, 자기 아내를 죽이고도 모자라 장모까지 살해한 패륜아입니다. 헤롯 가문의 음행은 대를 이어 계속되었지요. 자기 동생의 처를 빼앗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님 앞에 힘없는 한 여자를 끌고 와서 씩씩거리는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 이들이 저 헤롯 가문의 희대의 패륜에 대해서 작은 돌멩이 한 개라도 들어본 적이 있을까요? 예수께서 저 헤롯을 여우라고, 비열하게 썩은 고기나 찾아다니는 짐승이라고 질타하실 때에, 그들은 어디에 있었다는 말입니까.

 

모세의 율법에서는

그런데 사실, 예수께서 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은 것은,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킨 것입니다. 본래 십계명에서 제7계명으로 간음하지 말라했지요. 그런데 이 계명을 비롯하여 모든 계명은 먼저 히브리 사람들의 노예 경험을 바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히브리 노예들, 특히 여인들은 저 지배자들의 탐욕에 얼마나 억울하게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해야 했습니까. 계명의 근간, 출발점은 약자를 유린하지 말라는 데 있습니다. 계명의 핵심은 약자 보호입니다.

예수님께 찾아왔던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을 들먹이면서 돌로 치라 했지요. 그런데 그것은 신명기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22:22이하)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음행 죄를 처벌하는 두 가지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먼저 성 안에서 음행한 경우입니다.(23) 이때는 남자와 여자를 모두 끌어내어 돌로 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 밖에서, 즉 들판에서 일이 벌어진 경우에는 판결이 다릅니다.(25) 그때는 남자만 끌어내어 돌로 치라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음행의 죄를 범하면 남자와 여자 모두 돌로 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이 들에서 벌어졌을 때에는 여자에게 돌을 던지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들에서는 여자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도와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약자요 피해자라는 말이지요. 여기서 율법의 근간이 약자를 보호하는 데 있다는 것이 분명이 강조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은 예수님 앞에 남자와 여자를 모두 끌고 왔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여자가 약자로서 피해자였다면 마땅히 남자만 끌고 왔어야 합니다. 그것이 모세의 율법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힘없는 여자만 끌고 왔습니다. 거기 남자는 없었습니다. 분명 현장에서 잡았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세의 율법의 정신을 실현하셨습니다. 여기서 율법을 해석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수님의 관점이 확연하게 갈라지고 있지요.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을 강자의 자리에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약자의 자리에서 보았습니다.

 

살아 있는 기록

우여곡절 끝에 한 여인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요한복음에 기록되었고,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기록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 고통스러운 시대를 살아갔던 힘없는 여인들을 기억할 수 있고, 그 여인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주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죄인이라 정죄하고 징벌하는 법이 아니라, 역사의 고통을 짊어지고 진통하는 약자들을 위로하고 그 고통과 한을 풀어 주는 법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한 것은 비난이 아니라 정확한 평가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며,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지요. 아니, 예수님은 그들을 정죄하지 않으셨으니 그들은 애초부터 죄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될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지요.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21:31)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