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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1-2) - " 너무 아름다운 복음의 발 " / 이훈삼 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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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성령강림후(1-2) - " 너무 아름다운 복음의 발 " / 이훈삼 목사

관리자 2018-05-26 (토) 10:37 5년전 4929  

본문) 사52:7-10, 고전9:13-18, 눅10:1-16

1. 우연과 무의미? 

 

1) 인생은 우연이다? 

일반적인 현대인의 생각을 형성하는 두 가지 중요한 사상은 진화론과 실존주의다. 19세기 다윈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된 진화론은 실제 우리들의 사고방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 중에 우리가 관심하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아주 우연히 단순한 단백질에서부터 세포가 발생하고 단세포가 다시 다세포 생물로 진화한 것이며 모든 생물은 자연에 의한 우연의 산물이다. 그러니 인간의 삶에 목적이 있느니 인간의 본성은 이런 것이니 인간은 본래 이렇게 살아야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인간은 우연히 생겨난 존재니 그냥 저냥 살아가는 것이 맞다는 쪽으로 논리가 전개된다. 여기에 20세기에 깊은 영향을 끼친 실존주의도 인간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규정한다. 그러기에 인생에 본래적인 의미나 목적은 없다. 진화론과 실존주의가 서로 연관되어 있지는 않지만 둘 다 기독교 신앙과는 반대편에 서 있다. 기독교는 우리가 그냥 우연하게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한 생명 한 생명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래서 하찮은 것까지도 모든 생명에는 삶의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생과 역사에 우연은 없으며 모든 생명과 모든 사건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목적이 있다. 심지어 고난과 슬픔까지도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우리는 고백한다. 이 신앙이 대단히 중요하다. 진화론과 실존주의가 이미 현대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지만, 기독교 복음은 우연성과 무의미성에 대해서 단호하게 투쟁해야 한다. 

 

2) 영화 ‘버닝(Burning)’

지난주에 개봉한 영화 ‘버닝(Burning)’을 보았다. 세계 3대 영화제 중의 하나인 제71회 칸 영화제에서 역사상 최고 점수를 받은 작품이다.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2개의 상을 수상했고 세계 영화계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문학가이면서 영화감독이고 문화부장관도 지낸 이창동 감독의 여섯 번째 영화다. 그의 전작 ‘밀양’은 기독교인이 꼭 봐야 할 영화다. 대개 영화 전문가들이 좋다는 영화는 대중에게 사랑받지는 못한다. 해외에서는 호평 받고 국내에서는 흥행에 실패하고 있다. 이유는 우리가 너무 선과 악이 분명하고 내용을 이해하기 쉽고 영화를 하나의 오락거리로 여기는 할리우드 영화에 길들여져 있고, 반면 예술 영화는 무척 철학적이어서 이해하기가 어렵고 도대체 누가 선이고 악인지 명확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버닝도 쉽지 않다. 한번 봐서는 모르는데 여러 번 볼 여건은 안 되고, 시간 내고 돈 내서 보긴 봤는데 도대체 뭘 말하려는 것인지 쉽게 이해할 수 없으니까 영화를 보고나서도 시원하지 않고 답답한 면이 있다. 돈 내고 시간 들여 봤는데 답답하니 많이들 안 본다.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비싸고 시간 들였는데 명확하지 않아 답답해도 할리우드 영화보다 훨씬 의미 있는 것이 예술 영화다.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이창동감독이 자기 식의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지난 3월에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주최한 세계선교대회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열렸다. 우리 시대에 기독교는 무엇을 어떻게 선교해야하는지 세계 각국 1000명 정도가 모여서 한 주간 동안 다양한 논의를 했다. 주제 강사 중의 한 명인 아프리카 여성 신학자는 ‘아프리카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 이것저것을 많이 탐구한다’는 취지의 강연을 했다. 우리는 보통 아프리카는 아직 발전하지 못하여 미개하고 그래서 수준 높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밀림의 동물과 비슷한 삶을 살지 않을까, 아니면 별로 철학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기 쉬운데, 아프리카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인간이 사는 의미와 죽음의 의미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별로 놀랄 일도 아닌데 그 기사를 읽고 좀 놀랐다. 

영화 버닝에서 20대 초반의 여주인공 해미(전종서 분)는 알바를 해서 모든 돈으로 아프리카 여행을 한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남자주인공 종수(유아인 분)에게 이런 말을 한다. 아프리카에서는 배고픔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그냥 육체적인 허기를 채우기 위해 먹을 것을 찾는 이들(리틀 헝거)이고 또 하나는 인생과 역사의 근본적인 의미에 굶주려하는 이들(그레이트 헝거)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허기에 대해서 이렇게 둘로 나누고 있다는 것 자체가 탄자니아 세계선교대회에서 주제 강사가 말한 ‘아프리카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설명과 연결되어 있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기독교 복음은 적어도 내가 사는 인생과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고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만 진정한 복음이 될 수 있다. 나라는 존재는 우연의 산물이며 아무 의미 없이 던져진 존재이며, 인생과 역사에 무슨 목적이나 의미 같은 것은 없다는 사고방식에는 기독교 복음이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 수 없다. 이것이 오늘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가 복음을 전파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원인 중의 하나다. 

 

 

2. 교회의 목적 

 

1) 예수님의 제자 파송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고 동고동락하며 가르치신 것은 그냥 하신 것이 아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누가 10:1~3) 

 

주님께서 제자들 70명을 두 명씩 짝지어서 여러 지역으로 보내셨다고 한다. 보내는 목적이 분명할 때 우리는 ‘파송’이라고 한다. 목사는 노회가 교회에 파송한다. 나는 기장 경기노회가 주민교회에 파송한 목사다. 이화랑목사는 기장 총회가 경기노회를 통해서 인도에 파송한 선교사다. 왜? 그냥 시간 때우라고 보내는 것이 아니다. 분명한 목적을 갖고 파송한 것이다. 이런 전통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여러 동네로 파송한 것에서 유래한다. 제자 파송이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고 평안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이 위험하고 불안하고 힘든 일이라고 하셨다. 그럼에도 주님은 왜 사랑하는 제자들을 파송하시고, 우리는 왜 힘들고 위험한 파송을 따르는가? 

 

2) 사도 바울의 고백 

기독교 선교의 대표자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복음을 전하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고전 9:14) 

 

우리식으로 말하면 ‘기독교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기독교인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산다.’고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진정 기독교인이고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3)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역들이 많다. 어려운 사람들 돕기도 하고, 이웃에 봉사도 하고, 교육을 통해 사람들을 가르치고, 의술을 통해 생명을 살리기도 한다. 서로 친교도 해야 하고 취미도 나눌 수 있다.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고 사회 속에서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인권을 보호해야 하고 평등세상을 구현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인생과 역사의 이런 과제들과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그것들 자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봉사단체가 아니고, 친목 동호회도 아니며, 학교나 병원도 아니다. 정당도 아니고 시민단체도 아니다. 이들과 같은 역할을 일정정도 하지만 그것은 주님의 복음이 이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 교회는 무엇 하는 곳인가?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을 전하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세상의 사회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기독교 복음이 곧 정치는 아니고 경제도 아니며 문화 예술도 아니다. 복음은 복음이다. 교회는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 목적을 분명하게 가지고 존재하는 모임이다. 

세상이 쉽게 이해할 수 없고 수용할 수 없는 목적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때로 오해받기도 하고 때로 핍박을 당하기도 한다,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존재해야 하며 교회의 목적은 복음 전파다. 이 당연한 기초가 무너지기 때문에 오늘 한국교회가 위험에 직면해 있다. 

 

 

3. 복음 전파의 기쁨

 

1)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움

복음 전파가 어렵고 위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하는 것은 그 결과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아기를 낳는 것이 힘들고 위험하지만 그래도 출산하는 것은 그 결과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기독교 복음은 탐욕과 죄를 지향하는 세상과 충돌한다. 그 과정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다치고 깨지고 심지어 죽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이사야 선지자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을 찬양하고 그 기쁨을 노래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 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사 52:7~10)


복음을 전파하러 가는 길에는 밭도 있고 자갈 길고 있고 꼬부라진 길도 있다. 높은 산도 있고 강이 길을 막기도 한다. 중간에 길이 끊기는 경우도 있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찾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복음의 길은 지속되어야 한다. 험난한 길이지만, 하늘엔 태양과 구름이 떠 있고, 꽃들이 피어나 환영한다. 화사하고 아름다운 발이다.

 

실제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발은 어떠했을까?

지금도 세계 오지의 사람들은 신발 없이 맨발로 길을 다닌다. 바닷가 고운 모래 같은 길이라면 모를까, 딱딱한 길, 작은 돌들이 있는 길을 걷는 발은 얼마나 아프고 힘들까? 이사야 시대나 예수님 시대에는 다행히 샌들을 신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발이 안 아플까?

 

영천에 있는 육군3사관학교에서 군종장교훈련 받을 때, 6.25 전적지 중의 하나인 대구 다부동 전투 기념비까지 56일 동안 200km를 행군하는 훈련이 있었다. 12주 장교 훈련 중 유격훈련과 함께 가장 힘든 일정이었다. 군복 입고 군화 신고 며칠 걷다 보면 몸이 아픈 것보다도 발바닥이 벗겨지고 붓거나 물집이 흉하게 잡힌다. 출발할 때 미리 조처를 취하지만 별로 소용이 없다. 나중에는 걷는 것 자체가 힘들다. 군화는 옛날 샌들보다 훨씬 나은데도 그렇다. 요즘 기능성 고급 운동화를 신고 달리면 괜찮으려나? 좀 낫긴 하겠지만 역시 힘들고 물집도 생길 것이다. 80년대는 대학에서 한 때 고무신이 유행했다. 하얀 고무신에 백 나이키 또는 백 구두라고 썼다. 고무신 신고 한참 다니면 다리가 굉장히 피곤하고 온 몸이 지친다. 고무신을 쿠션이 없기 때문이다. 수지침과 함께 수족침이란 것이 생길 정도로 발은 몸 전체의 건강에 매우 중요하다. 2천 년 전 이스라엘의 샌들은 쿠션이 있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러니 저런 거 신고 먼 길을 다니거나 빠르게 다니는 것은 그 자체로 무척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2) 의미로서 아름다운 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산 넘고 물 건너서 다니는 발들이 깨끗하거나 향긋하거나 강건하거나 아름답지 않았다. 사실은 상처 나고 더럽고 아프고 붓고, 고통스러운 발이었다. 그러나 오늘 이사야는, 사도 바울과 70명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2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전 세계에 파송된 수많은 선교사들과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온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같은 이들은 그 고통과 위험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다. 비록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전하다가 모욕, 폭행, 죽음까지도 당했지만, 그가 간직하며 전한 복음의 결과가 너무나도 거룩하고 아름다고 소중한 구원의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은 고통인데 그것을 거룩함으로 변화시키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지식, 운동, 수련, 도덕, 인간의 의지, 결단이 아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가능하다. 성령의 은총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에 용기와 능력을 불어넣어주실 때 가능한 것이다. 성령강림절기는 그래서 우리에게 은총이다.

 

3) 한반도의 운명에 매우 중요한 회담이 남북 정상회담과 한미 정상회담을 거쳐 북미정상을 향해 가다가 갑자기 좌초할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가 일어나 뜨겁게 기도하면서 성령의 권능으로 복음의 기쁜 소식을 이 역사에 전해야 한다. 그 발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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