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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성령강림후(14-1) - "겸손과 순종의 믿음" / 이태영 목사

이태영 2018-08-23 (목) 01:02 5년전 4876  

성령강림 열넷째주일 설교

 

 

겸손과 순종의 믿음

 

왕하 5:1~14

(5:13~20, 5:1~17)

 

이태영 목사 (군산 수산교회)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장군이면서 나병환자였습니다. 성경은 그가 언제 나병이 걸렸는지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장군이 되기 전부터 나병에 걸려 있었는지, 아니면 장군이 된 다음에 나병에 걸렸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현재 장군이면서 나병환자라는 것입니다.

장군과 나병환자, 이 둘은 서로 관련이 없는 일이지만 나아만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은 큰 용사이면서 나병환자였는데, 이 비극은 나아만의 본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나병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큰 용사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유능한 인물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큰 용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병환자였다는 것은 그의 위치가 얼마나 불안한 상태에 있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큰 장군이 아니고 그냥 나환자이든지, 아니면 나환자가 아니고 그냥 큰 장군이든지 둘 중의 하나만 있으면 고통이 덜할지도 모릅니다. 나아만 장군은 신세를 한탄했을지도 모릅니다. 신은 나에게 장군의 자리를 주시고, 또 나병을 함께 주셨는지 탄식을 하고 또 탄식을 했을 것입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나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은 우리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병은 의학적으로 한센 병으로 불립니다. 한센 병은 그냥 의학적인 병입니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는 병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나병은 신앙적으로 볼 때에는 우리의 죄 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병입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이 나병은 부정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정결함과 반대되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한 나라의 유능한 장군이었던 나아만에게 나병이 있다는 것은 그에게 결정적으로 죄된 본성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아만이 우리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입니다. 우리도 가정이나 마을에서, 직장이나 지역사회에서 꼭 필요한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만 장군이 나병을 가졌듯이 우리도 죄 된 본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이처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잘 보여줍니다. 한쪽 면은 긍정적이지만, 또 른 면은 부정적입니다. 우리도 큰 틀에서 보면 나아만 장군과 다르지 않습니다. 선한 성품도 있지만 악한 성품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하는 믿음도 있지만, 말씀대로 살지 않으려는 불신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을 가고자하는 믿음도 있지만, 십자가를 외면하고 내 마음대로의 길을 가고자 하는 불순종의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여종의 도움을 받아 엘리사에게 오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에게 사람을 보내어 요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 살이 예전처럼 회복되며 깨끗함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나아만은 매우 화를 내고는 돌아갑니다. 첫째는 엘리사가 직접 자신에게로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이 부분을 두 번씩이나 강조합니다. 둘째는 엘리사가 자기 앞에 서서 자기의 신인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엘리사가 나아만의 나병 부위 위를 향해 손을 이리저리 흔드는 의식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나아만의 분노는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은 매우 큰 용사인데다가, 자신이 섬기는 왕의 친서를 가지고 올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막대한 재물을 가지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는 얼굴도 비치지 않을 뿐 아니라 시냇물 정도밖에 안 되며 별로 깨끗하지도 못한 요단 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고 하니 화가 치미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제 나아만은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험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처음 시험에서 나아만은 실패합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엘리사의 말보다 자신의 체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판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명령을 뒤로 한 채, 그곳을 떠납니다.

그러나 나아만의 종들이 다시 나아만에게 말을 합니다. 열왕기하 513절입니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선지자가 큰 일을 하라고 하면 했을 텐데 하물며 작은 일을 왜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강물에 씻어서 깨끗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쉬운 일인데 당연히 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크고 어려운 일도 할 수 있는 분이 왜 작고 쉬운 일을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종들의 말은 매우 지혜로웠습니다. 나아만의 자존심도 살려주면서 나아만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도록 해 주었습니다.

 

나아만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멈춥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아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만은 매우 중요한 결단을 합니다. 엘리사의 명령을 듣기로 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바로 다음 절인 514절에 나아만이 요단 강으로 내려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절 차이지만, 실제로는 많은 시간이 생략된 것으로 보입니다. 나아만 장군의 행동이 이전과 매우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나아만 장군이 내려갔다고 표현함으로써 그의 내면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에게 말하기를 단지 요단강에 가서씻으라고 했을 뿐입니다. 내려가다는 뜻의 히브리말 야라드는 단지 위치를 낮춘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명성이나 신분을 떠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나아만 장군이 요단 강에 그의 몸을 잠그었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에게 잠그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씻으라고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나아만 장군은 요단 강에 자신의 몸을 잠그었습니다. 율법서에서 잠그다는 뜻의 히브리말 타발은 매우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특히 나병을 고치기 위한 정결의식에 쓰입니다. 레위기 1416절을 보면 오른쪽 손가락으로 왼쪽 손의 기름을 찍어그 손가락으로 그것을 여호와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찍는다는 말에 타발이 쓰이고 있습니다. 오른쪽 손가락이 왼쪽 손에 들고 있는 기름병에 잠그었다가 꺼내라는 말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요단 강으로 내려가서”(야라드) 몸을 일곱 번 잠근”(타발) 일은 나아만 장군의 삶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몸은 어린 아이의 살처럼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고통스럽게 했던 나병에서 낫게 된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병에서 낫게 된 것은 그의 순종과 겸손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위치를 고집하지 않고 엘리사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더욱 낮춤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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