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성령강림후(13-3) - " 주여 내 눈을 열어주소서! " / 김진수 목사 > 성령강림절

본문 바로가기

성령강림절 HOME > 설교올리기 > 성령강림절

[첫째해] 성령강림후(13-3) - " 주여 내 눈을 열어주소서! " / 김진수 목사

관리자 2018-08-18 (토) 17:21 5년전 4825  

본문) 행 21:39-22:16, 사42:14-16, 막10:46-52 

 

주여, 내 눈을 열어 주소서!

2018819일 사42:14-16/ 21:39-22:16/ 10:46-52 성령강림후열세째주일

 

장자(莊子)』 「산목(山木)장에는 장자의 사냥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장자가 밤나무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큰 날개와 눈을 가진 까치 한 마리가 삐뚤거리면서 날아와 엉거주춤 내려앉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장자는 그처럼 큰 날개와 눈을 가진 새가 왜 그렇게 어설프게 움직이는지 의아해 하며 조심스레 활시위를 겨눴지요. 그때 장자는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서 무아지경에 빠져 울고 있는 매미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곁을 보니 나뭇잎 뒤에 숨은 사마귀 한 마리가 매미를 잡을 요량으로 자신을 잊은 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행동한 까치는 바로 그 사마귀를 노리고 내려온 것이었어요. 사마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엉거주춤 움직인 것이었죠. 그런데 까치 역시 눈앞의 사마귀에 정신이 팔려 제 몸이 위험에 처한 것을 전혀 살피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장자는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 모든 사물은 이렇게 서로 엮여 있구나. 먹이를 노리는 자는 다른 자의 먹이가 되고 이로움을 구하는 행동이 곧 해로움을 초래하는 것을.” 그때 밤나무 밭을 지키는 사람이 장자가 도둑인줄 알고 서슬 퍼렇게 쫓아왔고 장자는 활과 화살을 내던지고 허겁지겁 밭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장자가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자 제자가 그 까닭을 물었다지요. 그러자 장자가 대답했답니다. “나는 바깥사물에 마음을 빼앗겨 내 몸을 잊고 말았다네. 눈앞에 있는 것에 몰두하다가 내가 당할 위험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지 그처럼 자기를 살피지 못한 탓에 밭지기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말았으니 어디 부끄러워서 나갈 수 있겠나?”

 

눈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합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산과 강, 하늘과 구름, 형형색색의 꽃들과 아름다움을 봅니다. 시력을 잃은 사람은 밤하늘에 총총히 박혀있는 눈부신 은빛바다의 황홀한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의 시력도 중요하지만 심미적인 안목도 중요합니다. 마음의 눈이 닫히면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아름다움, 내게 주어진 풍성함에 대한 감사, 이웃들을 향한 기쁨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 시력입니다. 영적 시력을 상실한 사람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보지 못하면 절망하고 낙담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심 봉사 눈뜨기(42:14-16)

 

이스라엘은 영적 시력을 상실한 백성입니다. 육체의 눈은 밝아서 그들의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것들을 보고 그것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당장 그들의 시야에 들어 온 것은 크고 강한 힘이었습니다. 무기와 군대, 높은 성곽과 거대한 도시들이 보였습니다. 그것만 소유하면 세상 모두를 다 가질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물질의 부요와 풍성함이 눈에 들어오고, 온갖 사치와 향락이 눈에 들어와 그들의 마음을 빼앗고 말았습니다. 경건과 거룩한 삶이 건조한 것이라면 저들이 향유하고 있는 것은 어릴 적 처음 맛보았던 아이스크림처럼 황홀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금기시하며 하나님이 두려워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들을 주변 나라들은 자기 멋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멋있고 부러워 보였습니다. !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사는 불행과 저주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버렸고 떠났으며 망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포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버지를 떠나 잘못된 길로 걸어가는 이스라엘을 그냥두지 않으시고 그들을 건져내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물리치고 심판하셔서 그 백성을 건져내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이 상실한 시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영적 시력을 회복하는 일은 마치 큰 고통을 겪고 아이를 출산하는 산모의 산고처럼 힘든 고통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심 봉사의 눈을 뜨기 위해 지불했던 공양미 삼백 석만큼이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심청이는 아버지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대신 팔았고 인당수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심청전에 나오는 이야기는 여기에서부터 신비에 휩싸입니다. 몸을 던진 심청은 용궁에 들어가 후한 대접을 받고 죽은 어머니 곽씨 부인을 만나고 연꽃 속에 들어가 환생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잘되고 잘 먹고 잘삽니다. 그래서 심청전은 소설입니다. 픽션인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눈을 새롭게 뜨게 하시는 일은 그런 신비가 아닙니다. 진정한 고통과 아픔을 겪고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래야 눈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들을 무너뜨리고 망하게 합니다.(15) 그리고 마치 산모가 아이를 분만하듯 온갖 힘을 다해 이스라엘을 다시 창조하십니다.(14)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노예로 끌려가 70년 동안을 신음하게 하십니다. 바로 그 시간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재창조하시는 산고의 시간이셨습니다. 그리고 바사왕 고레스를 통해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 지름길로 인도하셔서 예루살렘에 돌아가게 하십니다.(15-16) 예루살렘 귀환은 눈이 멀었던 이스라엘을 다시 재창조하시고 하나님을 찾게 하사 하나님의 방법으로 돌아오게 하셨고 회복시켜주신 놀라운 구원사건입니다.

 

기도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잘된다는 것은 심청이 신앙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고난 속에 있게 하시고 다 겪게 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와 함께 그 고통을 지시고 함께 아파하시며 마침내 해산하는 산모처럼 우리를 새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산산이 부서지는 아픔, 하나님을 떠나 산 세월이 얼마나 큰 고통이며 죽음에 이르는 절망인지를 알아야 눈이 열립니다. 제정신이 돌아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10:46-52)

 

눈은 빛을 통해 사물을 봅니다. 우리가 눈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사실은 그 사물에서 반사하는 빛을 보는 것입니다. 빛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 눈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밖에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눈이 열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온 세상은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마치 영화상영이 시작된 깜깜한 극장에 들어갔을 때와 같았습니다. 환한 스크린은 보이지만 좌석이나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더듬어 좌석을 찾습니다. 아쉽게도 이스라엘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맹인 같았습니다. 희미하게 율법만 보이고, 여전히 제사와 성전과 할례만 보였습니다. 그들의 영적 시력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정치적인 메시야만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태초의 빛이 되셨던 분,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찾아오셨습니다.

 

바디메오는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를 만남으로 날 때부터 보지 못했던 시력이 밝아진 사람입니다. 바디메오는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먹고 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버지의(디메오) 아들로만(바 디메오) 불렸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장애물을 넘어 마침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눈을 떴습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은 남의 소문을 통해 듣는 예수입니까? 아니면 날마다 우리 생활 속에서 만나고 있는 예수이십니까? 살아계신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날 때 우리의 눈이 열립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아름다움이 보이고 소망이 보이고 행복이 보이고 축복이 보입니다. 산책을 하고 돌아와 별로 본거 없었다.”고 대답하는 친구에게 헬렌 켈러가 말했습니다. “어떻게 오랫동안 숲을 거닐면서도 눈에 띄는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할 수가 있는가?” 비로소 율법의 목적이 바로보이고 성전의 존재 이유와 의미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절기와 정결예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비쳐보아야 비로소 그 바른 뜻과 의미가 바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 역사의 주인이 보이고 우리 삶에 들어 온 많은 사건들이 왜 들어왔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가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새 눈이 열린 자 사울(21:39-22:16)

 

이스라엘이 영적 시력을 상실했다면 사울은 매우 왜곡된 시력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신실한 율법준수(율법의 의)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이성적으로나 철학적으로 결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의 의를 거부하고 은혜로 받는 구원을 외치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에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있는 사울에게 주님은 정오의 태양보다 더 큰 빛으로 오셔서 그의 주위를 비추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물리적인 태양빛 아래서 참된 진리를 바로 보지 못했던 사울에게 더 큰 빛으로 비쳐주실 때, 잘못 보던 눈은 그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보았던 시력을 잃은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빛만 보였고 그동안 그가 보아왔던 시력은 상실한 것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옳다고 여긴 것, 소중하다고 여겼던 것이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것들이 쓰레기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새 눈이 열렸습니다. 진정한 이 역사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 핍박했던 그리스도 예수인 것이 보였습니다. 그분이 참 메시야요 하나님이요 구원자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나니야의 안수를 받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눈의 비늘이 벗겨지며 참 진리를 보는 새로운 시력을 얻었습니다.

 

얼마 전에 미국의 아메리칸 갓 탈렌트란 미국TV방송 경연프로그램에 한 여성 출연자가 나왔습니다. 그녀는 청각장애인인데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다른 악기연주자들과 함께 나왔습니다. 그녀가 무대에 서서 자신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신발을 벗었습니다. 심사위원이 의아해서 왜 신을 벗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곁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팀이 있는데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그 소리의 울림을 발로 느끼면서 노래 부르기 위해 벗었다고 대답합니다. 감동이었습니다. 악기 연주를 들어야 노래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 여성출연자는 맨발로 서서 무대를 통해 울려오는 소리의 진통을 통해 다른 연주자들의 연주소리를 듣고 그들의 연주에 맞추어 함께 노래를 불렀고 전 심사위원들과 모든 청중들의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녀가 무대에서 신을 벗고 다른 연주자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날, 그녀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새로운 귀가 열려 모든 연주자들과 소통하며 어떤 무대에서도 마음껏 연주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눈이 열려 성경이 보이고 구약이 보입니다. 우리의 지나온 과거가 보이고 미래가 보입니다. 고난의 의미가 보이고 앞으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미래가 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사명이 보이고 내 이웃이 보이며 하나님 나라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