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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13-2) - " 열린 눈을 통해 오는 구원 " / 최부옥 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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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성령강림후(13-2) - " 열린 눈을 통해 오는 구원 " / 최부옥 목사

관리자 2018-08-18 (토) 12:43 5년전 4520  

본문) 행 21:39-22:16, 사42:14-16, 막10:46-52 

 

사람은 보고 사는 존재입니다. 본대로 살고 본대로 행동합니다. 그러기에 잘못 보고 살면 악인(惡人)이 되고, 좋은 것들을 보고 살면 선인(善人)이 됩니다. 집안이 계속 싸우고 화목하지 못한 모습을 보고 살면, 그도 별 수 없습니다. 늘 싸우고 사는 것만 보았기에, 그렇게 살아야 되는 줄 알고 그도 사람들과 늘 싸우려 듭니다. 심지어는 자기 배우자와도 그렇게 싸우게 됩니다. 그러나 화목하고 좋은 분위기 속에서 살아오면, 그는 누구하고도 그렇게 살아야 되는 줄 알고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삽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어떤 면에서는 맹인과 같습니다. 모두에게 열린 하나님,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모두의 하나님’을 못보고 ‘자기만의 하나님’만 보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배타적이고 서로 다른 이들을 가슴으로 포용하지 못하고 배척하며 자기중심적인 집단을 만들었잖습니까? 이런 모습은 참 자유하신 예수를 한국교회가 자기의 틀에 가두어 둔 것은 아닌가 싶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 다시 보아야 합니다. 그 분에 대하여만은 제대로 눈이 떠야만 합니다. 

 

한 사람이 눈을 제대로 뜨면, 그 가정이나 교회나 공동체나 세상이 바뀝니다. 얼마 전, 촛불혁명으로 인하여 새 대통령이 들어서자, 이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습니까? 특히 일촉즉발(一觸卽發) 전쟁 위기에 처한 우리 한반도의 상황이 바뀌어도 너무도 바뀌었습니다. 이는 나라와 역사를 보는 현 대통령의 시각이 이전 대통령들과는 판이(判異)한 데에서 나온 까닭입니다. 

 

그는 한반도 운명을 결정짓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임을 천명하면서, 그 동안 사대 강국에게 우리의 운명을 의존에서 탈피하려는 자주적인 입장과 ‘평화가 곧 경제이다’라는 입장에서 남북이 서로 하나가 되면, 우리나라가 세계 평화의 주도적 주체가 될뿐더러, 경제적으로도 강국이 될 것으로 보는 시각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강대국 의존형 대통령이라면, 나라의 평화통일은 요원할뿐더러 우리 민족은 분단의 노예로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갈 뿐입니다. 전쟁도 불사하려는 태도는 더더욱 위험천만합니다. 단 한 번의 충돌로 우리나라 경제가 수십조 억 원의 손해가 나는 현상을 우리는 이미 연평도 해전 때에 뜨겁게 경험했습니다. 그때 주고받은 포 싸움 속에 우리가 쌓아 둔 재산 24조 억 원이 주식시장을 통해서 날아갔음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하여 경제발전을 이루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남북관계가 파탄나면, 우리 경제와 나라살림은 완전 거들 나는 것이 우리 현실 아닙니까? 몇 일 전에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대표자들 사이에 나눈 인사들이 큰 메시지였습니다. 북한 대표 리선권이 ‘북과 남은 이제 서로의 뜻을 거스리지 못할 정도의 막역지우(莫逆之友)가 되었다’라거나, 남한 대표 조명균이 ‘한배 타면 한마음이 된다’라는 말은 새 정부가 들어 쌓은 최고의 업적이라고 평가할만하다 하겠습니다. 

 

‘퍼주기’란 논리 때문에, 북한 돕기를 곧 줄 배제해 온 것의 결과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독일 평화통일의 사례를 기억합시다. 서독의 동독 퍼주기가 꾸준히 실행되고, 특히 교회들의 동독교회 살리기 위해 엄청난 퍼주기의 영향이 베를린의 분단 장벽을 끝내 허물게 한 주범이었잖습니까? 실제로 ‘미국 퍼주기’의 만분의 일만이라도 그동안 북한에 꾸준히 퍼주었다면, 지금쯤은 우리 남북관계가 서로 좋아져서, 우리 젊은이들 일자리 걱정은 아예 없이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우리의 젊은이들이 북한의 무진장한 자원개발과 새로운 미개발 영역들에 참여하면서, 엄청난 일자리를 즐기며 살고 있을 터이니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으로의 한국경제나 정치발전이나 국가발전은 남북관계 문제를 정상적으로 올려 세우지 못하는 한, 일거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우리가 보는 눈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내용들 모두는 보는 것을 통한 구원의 역사에 대하여 집중하게 합니다. 그 방법들은 다양합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한 사례도 있고, 본인 자신의 적극적인 믿음의 행동을 통하여 닫혔던 눈이 다시 뜨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에서는 하나입니다.

 

서신서를 봅시다 

 

1)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를 빛으로 만나면서, 3일 동안 육체적 맹인으로 지낸 모습이 주목할 만합니다. 그를 만나 주신 그리스도는 바울을 눈멀게도 하셨고 눈을 뜨게도 하신 주님이셨습니다. 

바로 그 때 바울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멍-’하니 바보처럼 세월을 허비했을 리가 없습니다.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보았으리라고 봅니다. 그가 그 때 본 것을 통하여,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을까요? 무엇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무엇이 살아났을까요? 그런 점에서 그의 눈 먼 시간대인 사흘의 짧은 기간은 실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 시간이었습니다. 

 

2) 무엇보다도 그는 새롭게 열린 눈으로, 그를 다메섹 길목에로 찾아 주셨던 나사렛 예수님을 새롭게 뵈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토록 증오하고 미워했던 예수를 다시 보았을 것입니다. 그가 과연 자기가 여전히 증오할만한 인물인지, 아니면 예수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기 유대인들이 그토록 대망해 왔던 바로 그 메시아인지를 확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자기가 몸담고 있었던 유대교에서 찾을 수 있던 그런 분은 절대 아니었던 분이었습니다. 박해(迫害者)였던 자기를 향하여서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라는 말씀으로 바울로부터 당신이 그토록 극심한 박해를 당하신 것을 밝히면서도, 막상 가해자(加害者)인 자기를 향해서는 함께 협력(協力)하자고 손을 내미시는 분이었다는 점에서, 바울은 진정 큰 충격과 놀라움에 빠져들었다고 봅니다. 

 

3) 바울의 증언에는 언제나 그런 예수와의 놀라운 만남에 대한 증언이 들어있습니다(3-5절).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고 친구와 동역자로 삼으시는 예수에게서 바울은 참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으로 봅니다. 그런 점은 그가 인과응보 사상에 절어 있는 유대교 율법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의 참 모습을 예수에게서 보았고, 서로 다른 모두를 품고 당신의 열린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안겨 주시는 구세주로 나사렛 예수를 새롭게 보았음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매달려 살아왔던 율법과 정죄의 세계에 대하여서도 다시 보게 되었다고 봅니다. 율법주의가 하나님을 세상 만민을 위한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게 하였고, 유대인인 자기들만 위한 하나님이요 ‘특정 세력만을 위한 닫힌 신’으로 오도하였음도 발견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를 만나면서 그는 율법의 한계와 그 시대가 지나가고 있음도 보았습니다. 자기 같은 원수까지도 친구요 동지로 삼는 이 나사렛 예수야말로 서로 다른 이질적 존재들로 가득 찬 이 세상에 ‘가장 적합(適合)한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삼일 간의 맹인(盲人) 생활을 끝내자마자, 세상에 나와서 바울이 외친 증거가 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점이었습니다(행9:20 참조). 

 

4) 결국 바울의 삼일 간의 맹인 체험은 완고했던 유대교인으로서는 죽고, 유연한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부활을 체험하는 기간이었고, 예수의 종인 사도(司徒)로 거듭난 시점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예수를 어떻게 보았습니까? 혹 그 분에 아직도 내 눈이 뜨지 못했다면 내 운명은 비극(悲劇)이겠지만, 그 분에 눈이 떴다면 내 운명은 기쁨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예수를 제대로 보고 살면, 구원을 받습니다. 

 

예언서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눈뜬 소경이요 길 잃은 양들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애석하게 생각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바벨론으로부터의 귀국을 계기로 그들의 삶의 현장에 직접 개입하셔서, 하나님에 직접 눈을 뜨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1) 사실 하나님은 이미 바벨론-메대-바사 제국의 왕들에게, ‘당신이 진정 이 세상에서 참 신이시며 진정한 주’이심을 계속 보여 주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참 신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하셔서, 종국에는 유대인 포로 해방도 순탄하게 이루지게 하신 분입니다. 누구를 통하여 그렇게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까? 당신의 신앙의 용사들인 사드락-메삭-아벳느고와 다니엘을 앞세워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2)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일들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가 열리고 하시는 일에 눈이 뜨게 되면 행복해질 터인데, 이스라엘의 영적 맹인 상태로 인하여 그들은 전혀 불행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약속하신 말씀에는 스스로 매이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그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친히 나타내 보이신 곳이 바로 바디매오를 눈 뜨게 하신 예수의 사건에 있습니다. 

 

복음서를 다시 봅시다

 

1) 바디매오가 다른 맹인과의 확실히 다른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보는가를 묻는 게 중요합니다. 그는 자신의 불행한 운명에 저항할 줄 알았습니다. 자신이 영원히 눈먼 자로 살다가 끝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자신은 변화되기를 원했고 (다시)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51절), 

아마도 그는 처음부터 맹인이 아니라 도중에 실명(失明)했던 존재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표준새번역./현대인을 위한 복음(미성서공회판), 그렇다면, 그의 회복에의 열망(熱望)은 너무도 절실했고 뜨거울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미 보아온 세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지요!

 

2) 현재의 맹인이나 거지 신세로 자기의 생을 마칠 수 없다는 갈망, 자기도 눈뜬 자유인이요 거지가 아닌 자립 인생의 꿈을 뜨겁게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열망과 소원을 품고 살았는데, 그가 어느 날 소원을 성취할 기쁜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바로 나사렛 예수만 만나면 자기도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예수를 향한 영혼의 눈이 활짝 뜨게 된 것입니다. 

 

그런 그의 간절했던 영혼이,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가시는 예수님의 발목을 여리고에 경유(經由)해 가시도록 붙잡아 끌어들인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또 그곳의 다른 인물인 삭게오도 마찬가지였고요(눅19장 참조)-! 그 바람에 예수님의 여리고 행(行)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그의 다시 보게 되는 꿈이 극적(劇的)으로 실현되는 감격(感激)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3) 그 순간부터 바디매오의 인생은 어떻게 변하였을까요? 아마도 초대교회의 큰 인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눈뜬 사건이 공관복음서(세 복음서) 모두에게 실명으로 증언되는 것은 그런 사실을 충분히 밑받침해 줍니다.

 

결 어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은 분명히 눈뜬 자의 것입니다. 미래도 물론 눈뜬 자의 것입니다. 어느 분야든 눈뜬 자가 큰일을 맡아서 합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에 눈이 열리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게 된다면, 그는 이 어지러운 세상에 정말 큰일을 행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이 혼란(混亂)한 시대일수록, 우리 눈(시야)의 구원을 위하여 간구해야 합니다. 

 

진정, 지금이야말로 바울의 삼일 간의 맹인 체험이 절실한 때가 아닐까요? 현재를 넘어 보다 나은 세상을 볼 눈을 위하여 간구해야할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눈을 감으면, 하나님은 우리 감긴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전혀 새롭고 놀라운 차원의 세계를 보게 하실 것입니다. 자신은 물론하고, 가정을 위해서도 그러하고, 교회를 위해서도 그러하며, 국가를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모여 기도합시다. 하나님이 내 맹인 된 눈을 뜨게 해주시도록! 우리 교회들의 눈을 뜨게 해주시도록, 우리 국가 지도자들의 눈을 뜨게 해주시도록! 지금은 정말 눈뜬 모든 분야에서 열린 눈을 가진 지도자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바울과 바디매오와 같이 예수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눈뜬 이들이 지금 정말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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