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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성령강림후(13-1) - "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 / 김은승 목사

관리자 2018-08-18 (토) 12:01 5년전 4868  

본문)  사 42:14-16, 행 21:39-22:16, 막 10:46-52

 

모르는 길을 기계 없이 옆 사람에게 안내 받아 운전할 때는 무척 긴장이 됩니다. 언제 어떻게 방향을 바꾸라는 말이 나올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령 있는 안내자는 미리미리 진로를 알려줘서 운전자가 편안하게 차선도 조정하면서 운전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런데 ‘그냥 가. 때가 되면 말해줄게’ 하는 불친절한 안내자가 있습니다. 자신은 길을 잘 알기 때문에 필요한 때에 알려주겠다 하지만, 길을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닙니다. 

 

네비게이션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쓸모 있다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기계를 잘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목표지점에 가까이 와서는 이리저리 헤매게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요새는 네비게이션 기기가 좋아져서 그런 일이 잘 없습니다. 아예 전체 경로를 파악해서 대략 어떻게 안내할 것인지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평상시 내가 알던 길이 아닌 쪽으로 네비게이션이 안내를 하면, 고민이 시작됩니다. 내가 알던 길로 갈까, 아니면 기계를 믿어볼까 판단이 서질 않는 겁니다. 그러다 기계가 안내하는 길로 진입했더니 나란히 가는 옆 길은 정체가 심한 반면 안내 받은 길은 한적한 경우를 한두 번 경험하면 기계에 대해 크게 믿음이 갑니다. 앞으로도 기계 말을 잘 들어야 되겠다 하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 어떤 안내자일까요?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데, 사람들은 왜 그 안내 받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일까요? 어쩌면 하나님은 불친절한 안내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안내는 실시간 네비게이션이 아니라 빙빙 둘러가게 만드는 구닥다리 네비게이션 같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미리 계획하고 조치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또 내가 원하는 대로 빠른 시간에 목적지에 다다르게 하는 것, 그 요구를 하나님은 잘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내 마음대로, 재빨리 가야 할 길이 아닙니다. 생명을 찾아 나서는 길은 좁고 험한 길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로 인도하겠다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새겨 듣는 오늘 이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저들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 떨기나무 불 속에서 들려온 음성은 ‘내가 저들을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겠다(출3:8)’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단한 생활에 열광할 만한 말씀이긴 하지만 그 진행 과정은 참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당신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보아도 하나님의 대답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말 뿐이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이시면 약속의 성취과정이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것 같아야 할텐데, 매번 정체 구간에 걸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10번이나 약속을 변개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발걸음을 막아 섰습니다. 거창하게 홍해를 건너면서 이제야 무언가 이루어지나 보다 했지만, 이들이 마주 선 곳은 광야였습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것도 사막을 지나던 대상(隊商)들의 길로 안내하신 것이 아니라, 길도 없는 곳, 물도 없는 곳을 헤매게 하셨습니다. 시간은 어떻습니까? 40년이 걸렸습니다. 함께 출발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겨우 두 사람만 살아남아서 2세들과 함께 요단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만약 네비게이션이 이런 식으로 안내를 했다면 진작 기계를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안내는 우리 생각과 달랐을 뿐, 참으로 제대로 된 것이었습니다. 홍해 앞에 마주서게 했을 때는 눈 앞이 캄캄했지만, 그것은 이집트 병사들의 추적을 종결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생명이 없는 땅으로 인도했다 하지만, 그 곳에서 하나님은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셨습니다. 물도 주고 먹을 것도 주셨습니다. 그것도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만나라는 것을 경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언제 텐트를 걷어 움직여야 할 지 계획할 수 없었지만,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언제나 백성들 앞에서 갈 길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연단과 시험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이스라엘이 꿈꾸지도 못했던 약속의 땅에 다다르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안내는 한 순간도 잘못된 것으로 인도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유배되어 있는 백성들을 향해 ‘눈 먼 나의 백성을 내가 인도할 것인데, 그들이 한 번도 다니지 못한 길로 인도하겠다(이사야42:16)’ 하셨습니다. 이집트에서 불러내셨던 구원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일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라. 내가 새 일을 행하겠다(이사야 43:18,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말씀 그대로 페르시아 임금 고레스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이 회복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다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출애굽의 하나님이 아니라 탈바벨론의 하나님으로 기억되게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이 한 번도 다니지 못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계획과 능력으로 일하셨습니다. 막다른 길이라 생각되는 곳에서 새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좌절할 만한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구원 능력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아니었습니까! 그 어느 누구도 도살장에 끌려 가는 어린 양 같은 메시야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죽음에 세상은 좌절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높은 담장 같이 넘어설 수 없었던 율법의 한계는 자기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안에서 한 번에 허물어졌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는 언제나 사람의 생각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결국 사람은 그 뜻에 순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나아가는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의 기적사건을 보십시오. 바디매오는 참으로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디매오라 했지만 이는 그저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후에 성경은 그를 ‘그 눈먼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름을 불러주지 않습니다. 그런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소리질렀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람들은 그를 꾸짖었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습니다. 눈을 뜨고자 하는 열망이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를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바디매오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바디매오가 정말 소경이기는 했을까요? 바디매오는 벌떡 일어나 예수께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전처럼 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는 대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디매오는 곧 다시 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고 했습니다. 이 일을 전하면서 성경은 굳이 바디매오가 자기 겉옷을 벗어 던졌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바디매오는 이미 결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전 모습을 벗어 던져버립니다. 자기의 생존이 달려있는 재산과도 같은 겉옷이었습니다. 자기의 냄새가 베어있는 삶 자체였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물을 던져두고, 또 아버지와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처럼, 바디매오는 자기 겉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그래서 눈을 떠서 보게 된 사람은 바디매오와 같이 용기를 내어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겉옷을 벗어 던지듯 자기 생각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나서야 합니다. 자기 의로움, 자기 자존심, 자기 욕심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를 구원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사람들은 ‘이것은 내가 알던 길이 아닌데…’ 하면서 주저합니다. 따라 갈까 말까 고민합니다. 당장에 막힌 길이 눈앞에 펼쳐지면 그만 그 길 따르기를 포기하고 맙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믿는다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세상 어디에나 하나님이 있지’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자기 제단을 쌓으려 합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한 번도 다니지 못했던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 가기가 떨리고 두려운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일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 어떤 길이기에 바디매오가 따라 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멸시받고, 조롱 당하는 길이었습니다. 살해의 협박을 받고, 결국 십자가에 달리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음을 보았기에 바디매오는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뜨게 해 주신 두 눈으로 그 영광을 보았기에 그는 용기 내어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간 길이 바로 그런 길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로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하늘에서부터 비쳐온 강렬한 빛은 세상에 대해서는 눈 멀게 하였고, 하나님의 뜻에는 눈 뜨게 하였습니다. 그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일어나서, 다마스쿠스로 가거라.’ 다마스쿠스에는 그의 적대자들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결코 환영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변절자가 되고, 신앙을 저버린 자로 매도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한 증인이 되겠다고 결단했습니다. 아나니아의 요청대로 바울은 ‘일어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사도가 되고 복음 선포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땅끝까지 선포되었고, 오늘 우리들의 입술로 고백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당신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 구원의 역사를 목격하고 주님 예수를 따르기로 결단한 우리들은, 이제 용기 내어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막힌 길, 돌아가는 길을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부할 일이 아닙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본을 따라서, 우리는 주님 가시는 길을 끝까지 따라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저 자신의 지난 날을 돌아보면 절대로 제 정신으로는 그려낼 수 없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 순간마다 하나님의 손길이 계셨고, 하나님의 계획은 조금도 차질 없이 이루어져가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때문에 같이 고생했던 아내도, ‘하나님이 당신을 참 사랑하시나 보다’ 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 하나님 뜻에는 더욱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소망을 두시기를 바랍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겪게 하시면서도 그 가운데 자라게 하시고 뿌리를 내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십시오. 그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서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여러분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이 한 번도 다니지 못했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된 세상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용기 내어 일어서는 믿음의 백성, 가정, 그리고 교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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