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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12-1) - "평화의 주님, 우리로 하나되게 하소서" / 이영재 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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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성령강림후(12-1) - "평화의 주님, 우리로 하나되게 하소서" / 이영재 목사

관리자 2018-08-09 (목) 23:56 5년전 4856  

본문) 롬10:5-17, 사42:18-43:7, 막7:31-37

 

오늘은 8.15 광복절을 맞아서 각 교회에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며 거룩하게 지키는 평화통일주일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도 매우 절실한 과제입니다. 온 세계인들이 주목하고 있는 한반도를 주목하는 초미의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작년까지도 북미 사이에 벌어진 긴장의 상황이 심각했습니만, 지금은 평화를 모색하는 화해의 상황으로 급변하였습니다. 이 급전은 사람이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의 사건이었음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께서 한반도에 평화를 이루시고 더 나아가 남북의 자유로운 교류와 마침내 통일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판문점 정상회담 이후 싱가포르 북미회담을 거쳐 평화를 향한 행진 속에서 성령님의 힘찬 행동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평화와 통일은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닙니다. 평화는 성서가 오랫동안 증언해온 말씀의 주제입니다. 통일도 성서의 주제입니다.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하나되라고 부탁하신 예수님의 고별사와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바울 사도의 신학 속에서 “통일신학”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온 인류가 하나가 되어 한 분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 소통하며 교류하는 가운데 사랑하는 길을 발견하고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성서가 제시하는 사람의 사는 도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보편성과 평화와 통일성을 노래하는 시인이 시편 67편에서 하나님은 만민에게, 모든 나라의 모든 백성에게 두루 평화를 끼쳐주시는 분이시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보편성은 역사에서 모든 피억압자를 구원하시는 주님으로서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시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하여 “주님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읊었습니다. 주님의 차별 없는 보편성을 노래하여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라고 읆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이루며, 동북아시아의 평화는 전 세계의 평화를 향한 디딤돌이 되는 것이니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구축됨으로써 만민이 평화롭게 살게 되는 길이 열립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모든 국가의 지도자들과 민족들을 다스리시는 평화의 임금이시니 주께서 허락하셔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오늘 봉독한 이사야서 42장의 말씀은 심판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배 같이 아끼던 자기 백성 이스라엘(출19:5)을 심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맹인이 되어서 눈을 뻔히 뜨고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구원사역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에게 귀가 있었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사42:20-21). 이스라엘은 눈 먼 맹인이었고 귀 먹은 귀머거리였던 것입니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존귀하게 하려고 그들에게 말씀을 베푸시고 교훈하였으나 이스라엘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사42:24). 이로써 심판은 이스라엘에게 필연이 되었고 북왕국에 이어 남왕국마저도 마침내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민들과 지도자들은 모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거기에서 노예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사42:25). 그들은 맹인이었고 귀머거리였습니다. 

 

심판의 필연성을 회고하는 이사야서 42장의 말씀은 이사야서 6장의 말씀과 동일합니다. 이사야서 6장은 예언자 이사야의 소명기입니다. 이사야서 6장에도 맹인과 귀머거리 모티프가 나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 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사야가 받은 소명은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고 백성의 눈을 감기게 하고 귀를 멀게 하여서 그들이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라는 사명이었습니다(사6:9-10). 백성을 구원하라고 부르신 줄로 알았던 이사야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야훼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타락과 범죄가 너무나 심대하여 심판하시려는 결심은 이미 굳게 섰으니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비롭게 은혜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기에(출34:5) 이스라엘이 지금이라도 뉘우치고 회개하여 통회하고 자복하면 심판의 손길을 거둘 수밖에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못하도록 막는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나무가 밑둥까지 잘리고 마침내 그루터기에서 싹이 돋아날 때까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은 계속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은 이처럼 엄중한 것이었습니다. 

엄중한 심판이 선포된 6장의 심판예언이 이사야서 42장에 다시 회고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심판예언은 바벨론 포로시대에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지금은 페르시아 고레스의 칙령으로 포로귀환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페르시아제국을 건국한 태조 고레스는 바벨로니아제국을 멸망시킨 후 모든 포로들에게 자유를 선포했습니다.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으며 각각의 전통문화와 종교전통을 지킬 수 있는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사야서에서는 고레스 왕을 가리켜서 “메시야”라는 호칭을 붙여서 불렀습니다(사44:28; 45:1). 이 모든 해방과 자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총임을 이사야서 43장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포로이후기에 이사야를 추종하던 무리들이 이사야서를 더욱 확대하고 증보하여 저술하였습니다. 

 

오늘 봉독한 이사야서 42장과 43장도 이사야의 증보판에 속한 부분입니다. 포로이후기의 이사야 제자들은 고레스의 칙령으로 새로워진 세계질서를 환영하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고백하며 감사하려고 이사야서 증보판을 작성하였습니다. 이들은 역사를 구원의 현실로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야훼를 온 우주의 창조주로 더욱 굳건하게 믿게 되었습니다(사40:28; 42:5).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은 “야훼”이시며 그 분은 한 분이라는 유일신 신앙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신6:4; 사43:11; 44:6, 24; 45:5, 6, 18, 21, 22; 46:9; 슥14:9).  

 

고레스가 다스리는 페르시아 시대를 우리는 “포로이후기 시대”라고 부릅니다. 주전 530년 이후의 시기를 가리킵니다. 포로이후기에 이르기까지 바벨론 포로지에는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바벨론 도성의 외곽에 형성된 노예촌에 유대인 노예들이 거주하였습니다. 이 노예촌을 디아스포라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디아스포라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여야 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각골명심하는 가운데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신전이 없는 상황에서 예배는 말씀의 예배로 가능해졌습니다. 이들은 말씀으로 정의롭고 평등하며 평화로운 공동체를 영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토라”를 작성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기원입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생겨난 생활공동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라고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교회의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고 이사야서는 디아스포라 말씀공동체의 정체성을 “교회”로서 확립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심판을 받아서 세상의 노예가 되어서 고생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은혜로 다시 주님의 품 안으로 돌아와 진정한 백성으로 회복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보편성은 용서와 화해와 치유와 회복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심판을 받았고 징벌을 받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을 알게 되어 과거사를 뉘우치고 회개하니 용서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사야서가 사용한 눈과 귀의 모티프는 바울 사도가 쓴 로마서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바울 사도는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에서 모든 것은 출발합니다. 믿어야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고백하려면 알아야 합니다. 안다는 것은 깨달음이 있다는 뜻이지요. 바울은 깨달음을 «마음으로 믿는다»라고 표현합니다. «마음으로 믿는다» 함은 믿음이 지식에 그쳐서는 안되며 온 존재의 변화를 통하여 성도의 삶이 완전히 통째로 바뀐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깨달음을 온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에의 순종»이 바울 사도가 강조하는 주제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복음을 간단히 정리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라고 선언한 복음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만민의 주님»이시라는 선언입니다.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10:12). 복음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민족이나 종교의 차별이 없습니다. 노예나 자유인이나 신분의 차별이 없습니다. 여자나 남자나 성의 차별이 없습니다. 구원은 모든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평등한 기회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바울 사도는 선언합니다(롬10:13). 

 

이와 같은 차별 없는 복음은 이사야서가 그토록 애타게 외쳤던 «유일신 신앙»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오도하고 있던 유대교는 유대인 민족주의에 빠져 있었고, 가부장제의 사회에서 여성을 차별했으며, 고대노예제사회에서 노예제를 온존하는 데 협력하였습니다. 잘못된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를 왜곡하고 백성을 오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잘못된 성경해석을 타파하시고 교회의 원조인 디아스포라 말씀공동체의 유일신 신앙을 바르게 되살려 냈습니다. 참된 말씀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유대교의 대안으로서 정립되게 되었습니다. 

 

유일신 신앙은 모든 차별을 철폐하고 모든 인류가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가치를 인정받는 보편성을 담보합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며 차별 없이 사랑하라는 말씀의 요구는 유일신 신앙의 요체이며 그러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 집중합니다. 이 법도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도이므로 어김이 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신약성서는 이와 같은 유일신 신앙의 정수를 «차별 없는 복음»이라고 규명하였습니다(행15:9; 롬3:22; 10:12; 골3:11; 야2:9).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진리의 말씀임을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의 땅까지도 찾아 다니면서 선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돈과 두로까지 두루 다니시며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조상 대대로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의 땅입니다.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바알숭배로 괴롭혔던 골치 덩어리였으며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북왕국 아합 왕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 공주와 결혼하여 온 나라를 바알숭배의 올무에 빠뜨렸습니다. 아합의 죄는 멸문지화라는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두로와 시돈에서 유입된 우상숭배로 인하여 북왕국도 조기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무서운 우상숭배의 심장부를 찾아가셔서 하나님의 유일성과 그 보편성과 차별 없는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대립과 갈등과 투쟁 속에서 병이 들대로 들어서 고통 중에 누워있는 생명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두로와 시돈의 선교여행을 마치신 예수님은 이어서 데가볼리 지역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열 개의 도시들이 식민지의 지배를 위해서 세워졌습니다. 이 도시들에 제우스나 헬라나 아폴로와 같은 신들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이교도의 도시를 방문하셨습니다. 그들에게도 차별 없는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을 복음으로 증거하시고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데가볼리 방문에 이어서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으로 귀환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어떤 지역이었습니까? 갈릴리는 우리나라 호남평야처럼 넓은 평야지대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사는 지주들이 대부분의 농토를 소유하고 주민들은 그들의 소작농이나 일용노동자로 전락하여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 지배에서 이중삼중으로 수탈당하였던 갈릴리 평야지대였습니다. 갈릴리에는 가난한 자들과 직장을 잃고 떠도는 유랑인들과 과부와 고아와 병자들이 득실대는 고난의 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차별이 없는 기회균등의 복음을 갈릴리 지역에서 선포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다. 천국이 저들이 것이다”(마5:3)라고 선포하심으로써 차별 없는 복음을 민중에게 들려주시며 희망을 주었습니다. 하루는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쳐달라고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는 세상에서 고생하는 민중(오클로스)을 압축한 표현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서 손가락을 그 사람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어 그 고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에 상처받고 그 받은 상처로 인하여 말씀도 들리지 않고 자신의 의견도 표현할 수 없던 한 장애자였습니다. 그의 치유는 예수님의 살리시는 차별 없는 복음을 증언합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살리시는 생명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파되고 있습니다. 차별 없는 복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귀가 먹었지만 이제는 들리게 되어 주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게 변화를 받았습니다. 차별 없는 복음이 일으킨 기적입니다. 굳었던 혀가 풀려서 자신의 의사를 공공연하게 말하게 되는 치유를 체험합니다. 차별 없이 임하는 구원의 역사가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차별 없는 구원의 기회는 모든 죄인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살인자나 창기나 세리나 죄인이나 동성애자에게나 차별이 없습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유일신 신앙은 차별 없는 복음입니다. 병든 사회에서 차별을 당하고 고생하다가 병 들어 죽어가는 모든 생명을 살리는 복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므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입니다. 하나로서 사랑하며 살아가라는 메시지가 성경말씀에 드높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샬롬”이란 용어로 표현합니다. 흔히 “평화”라고 번역하지만 그 개념은 더 넓고 깊습니다. 성서의 평화는 하나님의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의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해하여 소통하는 관계가 회복된 상태가 샬롬이며 진정한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거역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너희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는구나”라고 한탄하셨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여는 마당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차별 없는 복음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평화로 통일을 이루어 가는 길에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전달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남한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북조선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 함께 기도문을 작성하여 보내왔습니다. 이 기도는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면서 회개로써 시작합니다. 

 

“사랑의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나이다. 역사의 하느님, 전쟁과 대결은 물러가고 평화와 통일로 인한 번영의 새 역사를 주소서. 평화의 하느님, 판문점 회담으로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를 이루소서. 희망의 하느님, 화해와 통일의 전환점으로 새 역사의 희망을 주소서. 창조의 하느님, 평화선언으로 평화와 통일의 열매가 맺히게 하소서.” 

 

WCC가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기도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평화를 정착시키고 통일의 새 세계를 열어가는 마당에 광복절을 맞이하였습니다. 평화와 통일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허락하여야 한다는 점을 새기면서 교회가 앞장 서서 모든 차별을 폐지하고 평등하게 하나가 되는 길을 기도로써 열어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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