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성령강림후(11-1) - " 생명의 강물 되신 예수님 " / 김진수 목사 > 성령강림절

본문 바로가기

성령강림절 HOME > 설교올리기 > 성령강림절

[첫째해] 성령강림후(11-1) - " 생명의 강물 되신 예수님 " / 김진수 목사

관리자 2018-08-03 (금) 15:19 5년전 4872  

본문) 겔47:1-12/ 행3:1-10/ 막1:29-39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만드신 후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습니다.(창2:8) 에덴동산은 ‘생명의 동산’입니다. 그 동산으로부터 생명강수가 흘러나와 네 개의 강을 이루어 온 동산을 적셨습니다. 그리고 그 동산 가운데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고 동산 중앙에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있게 하셨습니다. 

 

생명은 ‘풍성함’입니다. 건강한 나무에서 자라는 무성하고 푸른 이파리들과 저 풍성한 열매를 보십시오! 병든 것은 모양만 있고 메말라 있습니다. 생명은 ‘아름다움’입니다. 살아있는 꽃을 보고 엄마 품에 잠들어 있는 어린 아이를 보십시오! 그러나 죽은 것은 추합니다. 생명은 ‘강함’입니다.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고, 병충해를 이겨내고 강한 바람을 이겨냅니다. 죽은 것은 약한 바람에도 다 넘어집니다. 생명은 자신의 ‘사명(몫)’을 다합니다. 조그만 들꽃은 아무도 보지 않아도 있는 그 자리에서 가장 예쁜 꽃을 피워냄으로 창조주 하나님이 위임해 주신 자신의 사명을 묵묵히 감당합니다. 생명은 ‘기쁨’입니다. ‘즐거움’입니다. 참 생명이 있는 곳이 ‘에덴’(기쁨의 동산)입니다. 푸른 하늘만 보아도 아름답고 꽃 한 송이만 보아도 감사합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이 황홀한 감격입니다. 가난해도 감사요 아픔도 감사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죄악의 길로 가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기쁨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 땅의 불행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상실’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우리가 상실한 생명을 되찾아 주고 참 기쁨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무더위에 정신 줄 놓지 않은 사람(겔47:1-12)

 

요즈음 무더위 때문에 난리입니다. 한반도가 섭씨 40도 열대지방으로 변했습니다. 한 낮에 밖으로 나가면 마치 모하비에서 데워진 사막바람을 맞는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이 한국에서 더워서 못살겠다고 합니다. 무더위에 시달리다 자꾸 ‘더위 먹은 사람’이 생깁니다. 더위에게 잡히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어지럽고 두통이 생기며 소화도 안 되고 밥맛을 잃고 잠을 잘 자지 못합니다. 정신이 혼미해져 할 일도 자꾸 잊어버립니다. 의욕은 사라지고 조그만 일에도 자꾸 짜증을 내고 열불을 냅니다. 

 

바벨론으로 잡혀간 유대인 포로들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넘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만해도 용기와 감사가 넘쳤습니다. 그런데 자랑스러웠던 통일 왕국시대를 지나 분열왕국을 거치면서 국력은 약해져만 갔습니다. 북 왕국이 망할 때만 해도 회복에 대한 일말의 소망이 있었지만 남 왕국마저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은 파괴되고 성전마저 유린되면서 마지막 소망의 줄을 놓았습니다. 예루살렘이 불에 타고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지는 큰 충격 앞에서 정신을 잃었습니다. 바벨론 강변에 포로(3차포로)로 잡혀왔을 때에는 절망의 눈물만 남았습니다. ‘더위 먹은 사람’처럼 ‘고난과 역경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장차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이 난국을 어떻게 하면 극복해 나갈 수 있는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자신에 대한 낙심과 서로에 대한 불평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절망의 와중에서 정신 차리고 산 사람이 있었습니다. 에스겔입니다. 2차 포로로 이미 바벨론에 와있던 그는 모든 환경을 뛰어넘어 온 세상의 창조주시오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고통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도 이 역사를 다스려 가시는 분에게 그의 시선을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겔37장)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인 ‘새 예루살렘 성전’의 조감도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 세상의 절망을 넘어 새 희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큰 고통에 빠진 사람, 그 아픔에 사로잡힌 사람은 절망합니다. 앞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환경과 형편을 뛰어 넘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모든 환경을 뛰어 넘어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새 소망의 눈을 뜨고 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것은 새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유대백성을 구원하시려면 지리적으로는 포로의 현장인 바벨론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정치적으로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행하실 유대인들의 구원은 지리적으로 바벨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시작되고 정치적인 해방이 아니라 성전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동쪽 문, 그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1-2절) 

 

성전은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 동쪽에 있는데 그 성전문의 문지방으로부터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물은 모든 죽고 병든 생명들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생명의 물인데 하나님의 보좌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입니다. 이물은 매우 특별합니다. 흘러갈수록 흙에 흡수되어 말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풍성해지고 멀리 갈수록 더 협소해지는 것이 아니라 넓고 깊어지는 물이며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을 이루게 하는 물입니다.(3-6절) 그리고, 그리고 강 좌우의 나무들을 소성케 하고 그 물로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않으며 달마다 새 열매를 맺게 합니다.(7, 12절) 이 생명의 물은 요단강(동쪽으로 향함, 8절)을 통하여 죽음의 사해바다(아라바)로 흘러 그 황량한 죽음의 바다를 살리고(9절) 그 속에 살아 뛰노는 각종 고기들이 번성하여 어부들이 온 강에서 그물을 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10절) 실재하는 요단강물이 살려낼 수 없는 것까지 다 살려내는 물, 모든 절망한 자들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다 구원해 낼 수 있는 생명의 강수,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생명의 강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막1:29-39)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떠나 절망의 광야가운데 사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생명의 강수로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는 바로 에스겔이 보았던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생수이십니다. 생명의 강수이신 예수님이 흘러가시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열병(프레수사 : 홧병)으로 누워있는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님께 수종을 드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29-31절) 고기 잡는 직장 버리고 배도 팽개치고 예수만 따라다니는 베드로의 장모가 사위 때문에 얼마나 열불 났겠습니까? 사위 홀리고 딸 신세마저 망치게 한 그 예수가 또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그의 손을 잡으실 때 생명의 강수가 화병으로 가득한 그의 심령에 흘렀습니다. 주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그 화병이 사라지고 이제는 자신이 나서서 주님을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들을 쫒아내 주셨습니다.(32-39절) 질병은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악한 세력입니다. 귀신은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사로잡아 더러운 귀신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인간을 사로잡고 있던 악한 세력들이 물러갔습니다. 오! 그 주님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강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제 오후, 결혼과 함께 유학길에 오르기 위해 우리 교회를 떠났던 한 성도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피아노를 전공한 교회의 반주자였고 교회에서 만난 자매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는 한 쪽 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큰 부상을 입은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습니다. 눈물 흘리며 전해 준 그의 지난 이야기를 듣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자신은 대학 강사로 아내는 건축사로 자녀를 낳고 살다가 한 불행한 사건을 겪으면서 두 사람 관계에 큰 위기가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랑으로 용납하지 못했고 서로 원망하고 분노하고 날마다 부딪치며 싸웠습니다. 2년 넘게 쌍방 고소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결국 이혼소송을 하느라 또 1년을 보냈습니다. 모하비 사막보다 더 건조한 바람 맞으며 길을 걸었습니다. 손톱만한 용납도 이해도 사랑까지도 다 말라버리고 오직 분노와 미움의 거친 모래먼지 속을 헤맸습니다. 직장도 잃고 모든 인간관계도 끊어졌습니다. 마지막엔 대리 운전하러 나갔다가 넘어져 다리에 큰 부상을 입어 큰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비참해진 인생길에 우리 주님의 은총이 임했습니다. 교회 선교합창단의 반주자가 공석이 되자 지휘자가 혹시 하는 마음으로 과거의 교회 반주자에게 전화하다 연결이 되어 수년 만에 선교회 찬양연주의 반주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찾아온 날 첫 합창단 예배시간에 그 사막 같은 마음에 생수이신 예수 생명의 은총이 임했습니다. 사막같이 살았던 심령에 몇 년 만에 맛보는 생명강수의 감격이었을까요? 그 후로 다시 대학 강사로 나가고 있고 찬양단 모임 때마다 임하는 주의 은혜의 만나와 생수로 심령이 회복되던 어느 날 하나님이 인도하심으로 남편에게 큰 상처를 입고 홀로 사회복지사로 살고 있는 믿음이 좋은 자매를 만났습니다. 이혼 후 2년 이 지났을 때입니다. 그날 결혼을 앞두고 그의 부러진 다리를 잡아맸던 고정 쇠를 마지막으로 푸는 수술을 마치고 저를 찾아 온 것입니다. 

 

제자들을 통해 흐르는 생명의 강수(행3:1-10)

 

성전은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성전이 곧 예수님이 아닙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통해 예수님 만나는 것이지 성전이, 예배가 곧 예수는 아닙니다. 예수와 상관없는 예배, 예수 없는 기도, 예수와 상관없는 성만찬을 할 수 있습니다. 성전건물에서는 생수가 흐르지 않습니다. 의식적인 예배에서, 눈에 보이는 조직과 제도에서는 생명의 강수가 흐르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지금 성전 앞에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이 오랫동안 성전 앞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1-3절) 어떤 생명의 강수도 이 장애인에게 흐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난하고 초라한 두 사도가 그들의 심장 속에 박동 치며 흐르고 있는 예수 생명의 강수를 이 사람에게 흘러 보내고 싶어서 우리를 보라고 했고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며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4-7절) 이 사람도 제자들을 바라보았고 그 명령을 따라 발에 힘을 주며 일어서는 순간 생명의 강수가 그에게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 생명으로 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이 일어섰습니다. 즉시 발과 발목에 힘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걷기도 하고 서서 뛰기도 했습니다.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지금도 그의 제자들을 통해, 예수 생명이 살아 있는 교회를 통해 이 사막 같은 세상, 죽음의 세상을 향해 흘러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강수가 닿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에스겔이 본 생명강수가 닿지 않는 곳, 즉 진펄, 개펄은 회복되지 못했습니다.(겔47:11) 생명강수가 흘러가도 둔덕 때문에 신선한 생명강수가 유입되지 못해 생명의 생수를 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 때문에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삶의 위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때문에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줄 것은 은과 금이 아닙니다. 은과 금은 필요하지만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자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대한 성전 건물이나 그곳을 드나드는 큰 무리들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가슴 속에 흐르고 있는 예수의 생명, 사람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과 사랑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그 생명, 그 사랑을 전달해 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