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65장 17-25절, 요한계시록 21장 1-7절, 누가복음 13장 22-30절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누가복음 13장 24절)
원주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양안치 고개 초입에 ‘매지리’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백운산 자락에 터 잡은 고즈넉한 마을이지요. 매지리에는 아주 유명한 집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토지 문화관입니다. 박경리 문학을 기리는 집이지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막국수 맛집입니다. 토지 문화관은 몇 번 들른 적이 있지만, 막국수 집은 소문만 들었는데, 얼마 전 무척 더운 날 그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후더분할 때 물 막국수 한 그릇 들이키면, 정말 시원하고 깔끔하지요. 구수한 수육까지 곁들이면, 얼마나 뿌듯하겠습니까? 망설일 게 없지요. 차를 돌려 막국수 집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막국수 집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습니다.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두 집이 딱 마주하고 있는데, 이거 어느 집이 진짜 맛집일까요? 간판을 보니, 한 집은 ‘매지 막국수’고, 다른 집은 무슨 ‘대추나무 막국수’입니다. 동네 이름이 매지 마을이니까, 매지 막국수 집이 진짜 원조겠지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대추나무 막국수 집 앞에 사람들이 버글버글합니다. 주차장은 이미 꽉 찼고, 골목길을 따라 차들이 계속 줄을 서서, 아예 멀리 차를 세우고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매지 막국수 집은 휑한 주차장에 달랑 차 한 대입니다. 어느 집으로 가야 맞을까요? “맛난 음식 먹고 싶으면, 사람 많은 집으로 가라!” 식도락의 기본이지요. 재빠르게 대추나무 집에 줄을 서서, 막국수를 맛나게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그 집, 그 매지 막국수 집 막국수 맛은 어떨까요? 그렇게 손님이 없으면, 칼국수 집으로 바꾸든지, 아니면 차라리 주차장을 해야 할 듯한데, 어떻게 그리 초연하게 버티는 걸까요? 정말 궁금합니다. 뭔가 있지 않을까요? 언제 한 번 꼭 매지 막국수도 먹어봐야겠습니다.
모름지기 잘 모르면 사람 많은 집으로 가야 합니다. 먹는 것만이 아니지요. 自古로, 사람이 뭔가 이루고자 하면 사람 많은 곳으로 가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사람 많은 곳으로 가라’는 이 萬古不變의 법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오늘 우리가 새겨 보아야 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7장 13~14절에도 나옵니다. 마태복음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이 말씀을 ‘산상수훈’에서 소개합니다. 세상에는 크고 넓은 문이 있는데, 그 大門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크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마태복음 7장 14절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은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산상수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신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는 좀 다르게, 이 말씀을 사람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해주신 말씀으로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성읍과 마을에 들러 가르치시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이 질문으로 미루어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셨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신통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힘차게 선포하시니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많은 사람이 믿고 따랐다면, 그랬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적으냐고 여쭐 까닭이 없지요. 실제로 누가복음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시기 직전에, 예수님은 회당에서 18년 동안 병마에 시달리던 여인을 고쳐주셨습니다. 허리가 굽어서 조금도 펼 수 없는 여인이었지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런데 이렇게 고통스러운 여인을 고쳐주신 예수님을 보고 회당장은 어떻게 했습니까? 기쁜 일이라며 감사하고 찬양했겠지요? 아닙니다. 회당장은 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느냐고, 오히려 분개했습니다. 내가 회당장인데, 내 회당에서 누구 허락으로 이런 짓을 했느냐는 투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 바로 뒤에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님께 이곳을 떠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배척했습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너무나 적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며 이렇게 한탄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34절)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상황이 그랬습니다. 고통스러운 여인을 병마에서 풀어주시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따르기는커녕, 자신들의 지독한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혀서 오히려 분개하고 공격하고 핍박하는 사람들, 그들이 누굽니까?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을 돌로 치는 사람들, 그들은 또 누굽니까? 그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율법도 모르고 성전도 모르는 無知莫知한 이방인들일까요? 아니지요. 그들은 세상에서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유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정작 예언자를 죽이고 하나님이 보낸 사람을 돌로 쳤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반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하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여기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먼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바로 이 말입니다. 여기서 이 ‘너희’는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 예수님의 제자들이지요. 제자들은 구원받을 사람이 적다고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자들이 걱정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제자들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지요.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걱정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쓰이고, 다른 사람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초점을 ‘그들’에게서 ‘너희’에게로 돌리셨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너희’라는 말씀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많으냐 적으냐가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것은 ‘너희’가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구원받을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정작 내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중요한 것은 내가,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 그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좁은 문’은 무엇일까요? ‘비좁은 길’은 어떤 길일까요? 문으로 들어간다면, 기왕이면 크고 널찍한 문으로 들어가는 게 좋지요. 비좁고 험한 길로 가는 것보다는 넓고 평탄한 길로 가는 게 훨씬 편하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은 굳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험한 길로 가라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무슨 비포장 시골길에 대한 로망이라도 가지고 계신 걸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신 까닭은, 우리를 개고생시키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좁은 문이 바로 ‘생명으로 이끄는 문’(마 7,14)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라 하신 까닭도, 그 문이 ‘멸망으로 이끄는 문’(마 7,13)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문이 얼마나 크냐 작으냐 하는 것보다, 그 문이 생명에 이르느냐 멸망에 이르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명에 이르기를 바라시기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시 궁금합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왜 어째서 ‘좁은 문’일까요? 왜 멸망에 이르는 길에는 사람이 북적북적 많은데, 생명으로 이끄는 길에는 사람이 적은 것일까요? 왜 그렇겠습니까? 사람들이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명의 길을 마다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멸망의 길로 홍수처럼 밀려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 예언서에서, 이사야가 꿈꾸었던 생명 가득한 새 세상, 새 하늘과 새 땅의 희망을 함께 읽었습니다. 하나님이 새롭게 재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할까요? 새 예루살렘은 기쁨이 가득 차고, 그 주민은 행복을 누립니다. 다시는 울음소리도 울부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누구나 다 천수를 누리며 나무처럼 오래 삽니다. 참 아름답고 행복한 평화의 낙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의 겉모습보다 더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사는 ‘사람들’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이사야 65장 21절) 22절에서 다시 한번 뒤집어서 강조하지요.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을 것이며,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지은 집에 자기가 들어가 사는 것, 자기가 기른 포도나무의 열매를 자기가 먹는 것, 이것이 이사야가 꿈꾸는 새 세상이요, 그토록 희망하는 거룩한 나라의 모습입니다.
이사야가 꿈꾸었던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은, 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한번 거룩하고 장엄하게 펼쳐집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새 하늘과 새 땅에 사는 사람들을 주목했다면, 요한계시록은 거기에 살 수 없는 사람들을 주목합니다. 누구일까요? 어떤 사람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 수 없습니까? “비겁한 자들과 신실하지 못한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하는 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쟁이들”(요한계시록 21장 8절)입니다. 이런 자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마땅히 사람답게 사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新天地라 할지라도, 괴물 짐승이 지배한다면, 무자비한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겠지요. 수정같이 빛나는 황금성이라도, 사탄의 좀비들이 우글거린다면, 참담한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기가 지은 집에 자기가 들어가 사는 삶! 그저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하는, 마땅하고 평범한 일상 아닙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라면, 너도나도 누구나 다 그렇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사야가 바라보았던 그 거룩한 평화의 동산,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는 평화의 나라는 끝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도무지 그렇게 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라마다 한사코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불행하게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은 아닐까요? 이 세상에서는 남의 집을 빼앗는 자가 능력자가 되고, 남의 포도를 훔치는 사기가 지혜로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자기가 지은 집에 자기가 살고, 자기가 가꾼 포도나무 열매를 자기가 누리는, 이 너무도 당연하고 평범한 일상은 너무도 비좁고 험한 길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서로 해치거나 상하는 일이 전혀 없는(사 65:25) 평화의 문은 좁은 문이 되고, 생명의 길은 너무나 비좁고 험한 길이 되었습니다. 평화를 기도하는 사람들,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무 적어졌습니다.
요즘 배재고등학교 야구부 문제로 시끄럽지요. 지난달 29일 광주일고와 경기하던 중에 배재고 선수들이 5.18을 조롱하는 응원가를 불렀습니다. 불과 얼마 전 스타벅스 사건으로 가뜩이나 예민한데, 고등학생들이 참담한 희생자를 조롱하는 응원가를 만들어 부른 것입니다. 참, 어쩌다가 이 지독한 독선과 혐오에 아이들까지 휩쓸리게 된 걸까요? 그 시간에는 배재고가 광주일고를 6 대 2로 이기고 있었답니다. 8회 초니까, 승리가 거의 확실했지요. 보통 사람의 마음이, 지고 있는 상대에 대해서는 좀 너그러워지는 것 아닙니까? 패배한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 스포츠의 기본이요 人之常情이지요. 이것은 左右의 문제가 아니지요. 人間의 基本, 사람됨의 근본 문제입니다. 정말 가슴 아픈 것은, 아이들이 약자를 조롱하고 희생자를 모독하는 폭력적인 독선과 혐오를 놀이로 안다는 것입니다. 왜, 어째서,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되는 걸까요? 우리 사회가, 어른들이 포악한 독설과 무참한 혐오와 사악한 거짓말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 위로하는 말을 하고, 함께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일이, 그 길이 너무나도 좁은 문이 되어버린 것 아닐까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지 않는 세상, 그 거룩한 동산을 이루는 길이 너무나도 험한 길이 되고 만 것 아닐까요? 더구나 교회가 이 지독한 독선과 혐오를 전염병처럼 퍼뜨리며 부추기고 있다면, 얼마나 끔찍하고 얼마나 참담한 일입니까?
요즘 가끔 목사님들을 만나면 모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교회가 참 어렵답니다. 이제는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서 소수종교가 될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걱정스럽지요. 두렵고 안타까운 일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이 그것일까요?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은, 교회가 쇠락해서 사람 수가 적어지는 것보다, 교회가 그 본분을 잃어버리는 것 아닐까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면, 구원받을 사람이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가 좁은 문을 외면하고 큰 문으로만 몰려간 것,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외면하고 로마 황제의 길을 흠모하고 따라간 것, 그것이 문제입니다. 크고 넓은 문으로, 멸망으로 이끄는 문으로 들어갔으니, 멸망에 이르는 것이 당연한 귀결입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 정신 팔고 홀려서 빨려들어 갔으니, 황폐하고 사악한 사이비 이단이 횡행하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고, 가장 비좁고 험한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 마침내 영원한 생명에 이르셔서, 생명의 문이 되시고 생명의 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 문으로, 좁은 문으로 오라 하십니다. 좁은 길로 함께 걸어가자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예수님과 함께 좁은 길로 걸어가서, 마침내 참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서재경 / 한민교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