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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2-1) -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 / 환경주일 / 문홍근 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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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강림후(2-1) -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 / 환경주일 / 문홍근 목사

관리자 2024-05-31 (금) 09:47 15일전 103  

본문) 미 7:18-20, 갈 6:1-10, 요 7:53-8:11


1) 기후위기 시대에 맞는 환경주일

제41회 환경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수시로 기후위기와 관련해서 환경문제들을 말씀드렸지만 늘 그런 상황을 이야기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절박하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는 현실에 맞닥트리게 되었습니다. 동남아 지역에서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날씨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다는 보도를 접하며 이제는 지금 문명사적 전환(文明史的 轉換)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했을 때 니느웨 사람들은 높은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짐승에 이르기까지 금식하고 회개하여 니느웨의 멸망을 막아냈는데 지금 우리가 니느웨 사람들보다 훨씬 더 악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후위기가 닥쳤다는 이야기들은 서로 하지만 누구도 환경을 생각하며 불편한 생활 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벼랑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이 지구열차를 막을 수 있는 ‘요나’가 필요합니다.

불편하게 사는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누가 해주겠지 하는 생각을 버리고 내가 해야 한다고 나서야 합니다.

이 세계는 우리가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이 지구촌을 돌보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청지기가 주인처럼 행세한 것을 회개해야합니다.

또 우리 후세대들에게 고통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지금의 무절제한 생활을 지금 여기서 멈추어야 합니다. 이제는 소비가 미덕이 아닙니다. 쓰레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생활방식을 찾는 것이 최선입니다.


2) 허물을 용서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미가는 주전 8세기 중반 남쪽 변경 모레셋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많은 군인들이 드나들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짓밟는 모습을 보고 힘들어하는 중 하나님의 신탁(神託)을 받고 심판을 외쳤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부자들을 책망하는 말씀을 외쳤습니다. 3장에 보면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며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백성의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미3:2-3)하며 책망하고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미가만큼 신랄하게 죄악을 책망한 예언자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 7장 말미에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시는 분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미가는 인애(仁愛) 곧 헤세드를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하나님이 하나도 용서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벌을 주신다면 세상에 살아남아 있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버젓이 사람 행세하며 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미가서 가장 마지막 부분인 7장 18-19절은 이런 하나님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가 예언자는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여 때로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징계하시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분이지 정말로 멸망해 버리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닙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징계도하고 심판도 하는 것이지 죽이려고 작정하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3)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을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그 여인이 부끄러웠겠습니까? 사실 간통은 여자 혼자만 한 것이 아니고 남자랑 같이 했을 텐데 남자는 놔두고 여자만 붙잡아온 것은 저들의 비겁함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법대로 처리하지 않고 이 여인을 예수님에게 끌고 온 것은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들은 율법을 들어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고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하며 물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돌로 치라고 했다면 사랑을 가르친 예수가 사람을 죽이라고 했다며 비방하고 문제를 삼았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그냥 용서해 주라고 했다면 저들은 예수를 율법을 범한 사람으로 몰아붙였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아무 말씀 없이 땅에 글을 쓰시고는 일어서셔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들기시는 천둥벼락 같은 소리였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저들은 하나, 둘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여인과 둘만 남은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시며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바로 예수님의 이 용서를 믿는 신앙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기 위해 당신이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기독교는 용서를 빼면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용서가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용서를 위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서도 살인한 강도를 용서해 주셨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4) 너 자신을 살펴보라

바울사도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용서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6장에서 교회공동체를 향해 “형제들아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 하라”(갈6:1)고 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모두 다른 사람처럼 실수하고 잘못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알고 조심하라고 한 권면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실수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 공격하고 시험거리를 만들지 말고 조용히 온유한 마음으로 용서하고, 그를 바로잡아 주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6장 2절의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는 말씀은 범죄로 말미암아 고통의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의 짐을 나누어지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서로 짐을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들의 죄 짐을 지신 것을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용서가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반대로 천국은 용서가 있는 곳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사랑이 넘치는 천국 같은 곳이라면 용서가 넘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정치판은 용서가 없는 곳이라고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용서나 넘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오래된 과거 일을 들추어내어 정죄하는 일은 교회에서 할 일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 지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죄 용서 받고 신생(新生)의 삶을 살아가는 용광로 같은 곳입니다. 용광로 속에는 어떤 낡고 더러운 쇠도 다 녹아 사라지고 새로운 쇳물로 변화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하고 외쳤습니다. 이러한 재생의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덮어주는 교회가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고 했습니다. 사랑하면 용서할 수 있는 데 사랑하지 못하면 용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용서받고 교회의 기둥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용서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용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가롯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는 유다는 자신을 용서 하지 못해서 극단적 선택을 했는데 반면에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 받았습니다. 스스로 사죄의 은총을 체험하고 새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점은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교회를 박해한 큰 죄인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신생(新生)의 삶을 살았습니다.

용서가 사랑입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또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허물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바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5) 맺음

용서가 사라진 세상이 얼마나 각박한지를 지금 우리 사회는 실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허물은 보지 않고 모두들 다른 사람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손가락질하기에 바쁩니다. 끊임없는 갈등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는 오늘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의 가르침입니다.

서로 용서합시다, 용서가 지금 우리 사회와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푸는 마스터키입니다.

용서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가 될 때까지 몸부림을 하며 노력하다가 보면 언젠가는 용서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용서를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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