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신 5:1-21, 행 2:1-13, 요 14:15-31
“키다리 아저씨”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1912년 미국 여류작가 웹스터가 쓴 작품이지요. 한 고아 소녀가 자신의 후원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동화입니다. 소녀는 후원자의 이름도 성도 나이도 얼굴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키다리 아저씨’라 부르지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 ‘키다리 아저씨’는 후에 애니메이션과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이 ‘동화가 발표되기 직전 1907년에 미국은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었습니다. 수많은 은행이 파산하고 기업이 도산했지요. 서민들의 일상이 파괴되어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길거리로 내몰렸습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무엇이 필요할까요?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무엇이 중요했을까요? 무엇보다 집도 부모도 잃어버린 고아들에게 가장 절실한 게 무엇이었겠습니까? 후원자입니다.
그런데 동화의 후원자는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습니다. 조용히 뒤에서 도와줍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언제든 든든하게 지지해주고 응원하는, 참 멋진 사람 아닙니까? 사실 당시 미국에서는 금융위기를 계기로 금융재벌들이 부상했습니다. 금융재벌들이 지배하는 세상,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열린 것이지요. 이들은 자신들의 돈으로 정치도 지배하고 문화도 농락하고 사회도 장악하고 종교도 쥐락펴락했습니다. 한마디로 이들이 후원하지 않으면 누구도 대통령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뒤에 숨어서 그림자처럼 세상을 지배하던 자본이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노골적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바로 ‘후원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실제로는 ‘지배자’였습니다. 당시의 그런 상황을 생각하면, ‘키다리 아저씨’는 어쩌면 지배의 야욕을 숨긴 음흉하고 탐욕스러운 후원자를 희롱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숨기는 후원자,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하지만, 그러나 지배하려 하지 않는 후원자, 그런 따뜻한 후원자가 있다면 정말 든든하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는 성령강림절의 말씀으로 요한복음의 말씀을 함께 받아 읽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면서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일까요? 하나님께서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누구를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그분은 바로 ‘보혜사’입니다. 보혜사, 도와주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지켜주시고 도와주시는 ‘보혜사’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보혜사’일까요? 사실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는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은 어려움을 당할 때였습니다. 요한복음 9장 22절은 보면, 그때가 어떤 때였는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대 사람들이 이미 결의해 놓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구절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당시는 로마가 지배하는 시기였습니다. 기원후 70년 유대 전쟁으로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완전히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지요. 그런데 로마는 식민지의 종교에 대해 유화정책을 폈습니다. 본디 로마의 ‘판테온’은 그 말 자체가 ‘모든 신’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신을 다 수용한다는 말입니다. 다만 한 가지 전제가 있다면 신들의 위계질서를 깨뜨려서는 안 됩니다. 로마의 최고 신의 대리자인 황제의 지배와 통제를 받으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원후 90년에 유대교는 로마의 공식 종교로 인정을 받고 유대교의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로마의 후원하에 유대교는 성장과 부흥을 도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은 본래 유대교에 속했으니까, 그냥 유대교 회당 안에서 보장된 신앙생활을 영위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와 바울의 편지에서 보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바리새파 율법학자들과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부딪혔지만,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이방 사람 문제였지요. ‘이방 사람’ 중에서도 본디 유대 사람이었지만 바빌론 포로 이후 태어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그래도 할례를 받으면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이방 사람도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할례가 문제가 아니었지요.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이 심각하게 다툰 것도 주로 이 문제였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정말 다행히,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문제를 피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서 정말 치열한 토론과 논쟁을 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그들도(이방 사람들도,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도) 꼭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우리는 믿습니다.”(사도행전 15장 11절) 정말 지금 들어도 가슴 벅찬 고백이요 참으로 놀랍고 멋진 결정 아닙니까? 마땅하고 마땅한 결정입니다. 중요한 결정이지요. 이게 2000년 전에 내린 교회의 결정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정은 동시에 교회를 어렵게 만든 결정이었습니다. 제 발로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死生의 결의였습니다. 안전한 보금자리에서, 회당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바깥으로 추방당할 수밖에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라는 위험한 징표를 달고 다녔습니다. 당시 로마는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자들을 ‘십자가’로 위협하고 처단했지요. 유대 전쟁에서는 한꺼번에 수천 명을 십자가에 끔찍하게 처형했습니다. 로마에서 십자라는 말 자체가 위험한 금기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선포한다면,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로마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안전이 보장된 회당에서 모이는 게 얼마나 중요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문제로 유대 지도자들과 부닥쳤습니다. 그리고 유대교는 공식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자신들의 회당에서 추방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길거리로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겠다.”(18절)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제자들이 고아처럼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아처럼 아무도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말씀입니다. 더구나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도 작은 무리였습니다. 그 쪽수라도 많으면, 그래도 걱정이 덜할 텐데,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작고 너무 약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떠나시고 나면 예수님을 미워했던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회당에서 내쫓기고(16:2) 세상은 박해하고 죽이려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할 것도 아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이 슬픈 길이며 고난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게 망망대해 같은 세상에 고아처럼 덩그러니 내던져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그 어려움, 그 박해와 고난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누가 있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혜사’입니다. 여기서 보혜사라고 번역한 그리스말 παρακλητοs는 변호사, 대변자, 중재자라는 뜻입니다. 특히 로마가 지배하는 세계시장에서는 극한의 경쟁이 벌어졌지요. 돈이 지배하는 시장(아고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후원자/보혜사가 중요했습니다. 속고 속이는 세상에서 만약 김앤장 같은 후원자를 둘 수 있다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재벌이 뒤에서 지지한다면, 아니, 술 잘 먹는 검사가 뒤에 있다면 못할 일이 없겠지요? 뒤에 있는 사람, 후원자, 이른바 “빽”이 관건이었습니다. 정치에도 후원자가 중요하고, 예술에도 후원자가 필요하고, 교육에도 후원자가 왔다고, 종교에는 더욱 후원자가 절실했습니다. 후원자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패의 관건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실제로 로마의 황제는 후원자들이 만들어낸 걸작 중의 걸작이었습니다. 따라서 황제는 언제나 후원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그 자신의 거룩한 소명에 충성을 다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혜사’를 약속하셨습니다. 망망대해 같은 세상에 고아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켜주시고 위로하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성령입니다. 보혜사! 성령의 또 다른 이름 보혜사는 그렇게 험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람들과 함께하셔서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분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물론 여기 예수님이 말씀하신 보혜사 성령은 저 세상의 ‘후원자’들과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 제 세상의 후원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자신들의 돈과 권력으로 후원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들의 권력과 돈을 무한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도우려는 자가 아니라 지배하려는 자입니다. 무엇보다 저 세상의 후원자는 온갖 불법과 불의와 거짓을 무기로 삼고 횡포를 부립니다. 그렇지만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그리스도인을 진리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얼마 전 참 황당무계한 사기 사건이 교회라는 곳에서 터졌습니다. 목사라는 자가 교회에 무슨 선진경제연구소라는 것을 만들고는 여러 대학의 교수들이 연구자라고 선전했지요. 그리고는 교계의 명망가들을 초빙해서 거창한 강연회도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투자금을 끌어들였습니다. 기도하는 투자, 성령이 인도하시는 투자는 대박 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허섭스레기 사기에 상당히 많은 원로 목사들이 당했답니다. 정말 너무 한심하고 너무 참담하지 않습니까? 무슨 도깨비방망이도 아니고 어쩌다가 성령을 이 지경까지 모독할 수 있을까요?
보혜사 성령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보혜사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을 험한 세상에서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을 그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드는 영이 아닙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영이 아니라, 자유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는 영이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 일어서서 걸어갈 수 있도록,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고 동행해주시는 영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계명을 따라 살도록 일깨워주시고, 도와주시는 영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진리의 영을 따라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시련의 땅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을 따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 계명을 따라 살아갈 때 이스라엘 백성은, 척박한 광야에서도, 바빌론 유배지에서도, 당당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박해와 고난의 때를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환난과 박해를 당할 때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보혜사 성령과 함께,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으로 모든 환난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며, 서로 후원자가 되어주며, 고난의 때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리의 영을 따라 살 수 있도록,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께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서재경 목사/한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