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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강림후(13-1) - " 끝까지 견디게 하소서 " / 이훈삼 목사

관리자 2023-08-23 (수) 14:43 1년전 830  

본문) 10:21~22 (6:8~10, 6:1~23)

 

1. 예수 믿는다는 것

2000년 전,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평범하지 않은 삶을 선택하는 결단이었다. 철저한 유대교 중심의 종교사회구조에서 유대교와 대결하면서 소수자로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험난한 길이었다. 소수자는 소수에 속한다는 것 때문에 불안하고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이주민 300만 시대라고 하지만, 그중 다수는 중국 동포이고 실제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인들은 정말 소수다. 이들은 절대다수인 한국인들과 언어와 문화가 다르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낯설고 위험하게 느낀다. 유대교 사회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느꼈을 소수자의 불안은 이보다 훨씬 심각했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살벌한 말씀을 하신다.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마태 10:17,18,21)

 

단지 예수 믿는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매 맞고 투옥되고 가족 사이에서도 죽고 죽이는 끔찍한 고통을 당할 수 있다. 신기한 것은 주님이 이런 아픔을 예고하고 또 실제로 많은 사람이 어려움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계속 생겨났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신앙인의 행렬은 주님이 계시지 않는 시대에도 중단되지 않았다. 초대 교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은 예수를 믿고 증거하는데 열정을 다했다. 놀라운 기적을 행하기도 하고 회당에서 유대교인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스데반은 기적을 행하고 논쟁을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것 때문에 오히려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기독교인이 다수로서 주류를 이루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는가? 소수자의 불안과 고난은 초대교회 내내 이어진 아픔이었다.

 

그리고 이런 박해는 예수님 돌아가시고 300년 동안 로마 제국 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검투사들에게 죽고 사자 먹이로 죽고 불에 태워져 죽고 평생을 햇빛이 들지 않는 지하땅굴 카타콤에서 살아야 하는 고통을 받아야 했다. 일제 36년도 너무도 길었는데 초대교회의 박해 시기는 300년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 불안과 어둠의 시기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견디고 이겨냈다는 점이다. 기독교 신앙은 견디고 이겨내는 것이다.

 

2. 사자 굴 속의 다니엘

BC 300년쯤부터 100년 이상 동안 이스라엘이 마주한 최대의 과제는 그리스 문화의 세계화를 시도한 헬레니즘과의 대결이었다. 헬레니즘 확산의 첨병으로 알렉산더 대왕이 나섰다. 알렉산더는 단순히 영토 확장이 아니라 자부심 가득한 그리스 문화를 아직 미개한 세계 여러 지역에 전파하고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원대한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미 세계화(Globalization)를 시작한 것이다. 물처럼 문화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알렉산더는 세계화를 정복과 강제를 통해 인위적으로 실행하였기에 헬레니즘의 확산은 당연히 폭력과 저항을 동반했다. 헬레니즘은 약소국으로서는 거부하기 버겁게 큰 파도처럼 밀고 들어왔다. 문화의 본질은 종교이기에 헬레니즘은 곧 이스라엘의 정체성인 야훼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특히 BC 2세기에 이런 현상은 두드러져서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다니엘서는 이런 위기 상황에서 열정적인 야훼 신앙인들이 과거 바빌론과 페르시아 시절 포로로 잡혀가 궁중 관리로 일했던 이들의 일화를 정리해서 편찬한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의 목적은 시련과 환란 가운데서도 신앙을 유지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것이라고 격려하기 위함이다.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고 견디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으로 함께 하시고 지켜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실감 나게 주려는 것이다. 그 두 가지 대표적인 이야기가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에 던져지나 하나님께서 보호하셨다는 이야기(3)와 다니엘이 사자 굴 속에 집어 넣어졌지만 거기서도 말끔하게 살아남았다는 신나고도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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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 사자 굴 속의 다니엘,

2.24*3.3m, 1613, 워싱턴국립미술관

 

이 장면을 17세기 플랑드르에서 대성한 화가 루벤스가 그렸다. 페르시아 다리우스 왕의 총애를 받고 최고위직에 임명된 다니엘은 다른 관리들의 시샘을 받아 죽을 위험에 처한다. 다니엘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해 이들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 왕이 스스로 법률을 공포하게 하고 그 올무에 다니엘을 꽁꽁 옮아 매게 한다. 아무리 왕이 다니엘을 총애한다 해도 다니엘에게 예외를 적용할 수 없다. 다니엘은 다른 신에게 기도하지 말라는 왕명을 어긴 죄에 따라 사자 굴에 던져진다. 혹시라도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사자 굴의 입구는 단단히 봉해졌다.

 

굴 안에는 아홉 마리의 사자가 있고 그중 일곱 마리가 수사자다. 무리 생활을 하는 사자는 한 마리 수사자가 여러 암사자를 거느린다. 사냥과 새끼 양육은 모두 암사자가 맡고 수사자는 대개 놀고먹다가 사냥감은 제일 먼저 시식한다. 그런데도 암사자들은 수사자에게 꼼짝 못 한다. 하이에나 등 천적과 싸움에서 수사자의 힘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수사자가 무섭다. 다니엘이 던져진 굴에는 이 수사자가 훨씬 많다. 다니엘의 생존 가능성은 없으며 두려움은 배가 된다.

 

바닥에는 이미 사람을 잡아먹은 뼈와 해골이 뒹굴고 있다. 다니엘이 굴속으로 던져진 순간 바람처럼 달려들어 뜯어먹을 판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사자들이 얌전하다. 먹잇감인 다니엘에게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자가 품위를 잃고 고양이로 전락한 것도 아니다. 여전히 사자로서의 힘과 잔인함을 유지하고는 있다. 다니엘 아래의 사자와 바로 옆의 사자가 보여주는 이빨은 강하고 날카로우며, 단 한방에 큰 동물의 숨통도 끊어놓을 기세다.

 

다니엘의 벗은 몸은 루벤스의 다른 인물처럼 근육질이긴 하나 맹수의 이빨 앞에서는 하얗고 여린 속살일 뿐이다. 저 아름다운 육신이 잔인하게 찢기는 두려운 순간이다.

 

다니엘을 고소한 관리들과 다니엘을 아끼지만 보호할 수 없었던 왕도 당연히 여기던 죽음의 결과가 이 사자 굴 안에서만은 비껴갔다. 단단하게 봉인했던 굴 입구는 열려 있고 하늘이 보인다. 처참한 죽음의 자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다니엘은 두려움으로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하고 있다. 그의 눈은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다. 눈동자의 2/3는 흰자위로 그렸다. 그리고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하다. 두려움과 감사가 공존하는 눈물이다.

 

자연과 상식을 파괴하는 이 놀라운 기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내 생명 주님께 있다는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견디고 지키는 자에게 내리시는 구원의 은총이다. 사자 굴 속의 다니엘은 풀무 속 다니엘의 세 친구 이야기와 함께 헬레니즘이라는 거대하고도 두려운 파도에 맞서 흔들릴 수밖에 없는 믿음을 끝까지 부여잡고 견디려는 신앙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복음이었을 것이다.

 

3. 견디는 자에게는

예수님 당시나 이후 초대교회의 상황이나 또는 훨씬 이전의 다니엘처럼 고난의 시기에 신앙인은 자신의 신앙을 잃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지금은 신앙의 자유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어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기본권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이런 근대정신이 확립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인류는 아주 오랜 역사 동안 신앙의 문제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잃어야 했다. 기본권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호받고 있는 현대인은 탄압이나 위협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자기 신앙을 끝까지 지키기가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1) 과학 만능주의적 사고와 교육이 기독교 신앙을 어렵게 만든다.

현대는 과학의 시대다. 과학이 인간 생각과 세계 역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이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 인정한다. 과학은 단지 인간과 사회의 영역만이 아니라 신의 영역까지도 과학적 방식으로 지배하려고 한다. 즉 하나님도 과학 실험하듯이 증명해야지 증명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없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과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의 미숙한 인간이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만든 것이니, 이제 과학 시대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분위기다. 하나님을 피조 세계와 똑같은 존재라고 전제하고 실험실에서 실험하듯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큰소리친다. 이런 과학주의가 어린이들의 교과서에서부터 사회 곳곳에 있어서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에 젖어 있으면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기가 어렵다. 하나님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실험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이미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다. 인간의 이성에 철저하게 근거하고 있는 과학주의를 넘어서야만 기독교 신앙에 이를 수 있다. 요즘 젊은 세대(청년청소년어린이)가 교회에 없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아주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어려서부터 과학만능주의 교육을 받기에 신앙을 받아들일 공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NCCK 신학위원회는 앞으로 과학과 기독교 신앙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교회 이재범집사님이 매년 500만원씩 5년 동안 후원하는 헌금은 이런 연구를 위해 소중하게 사용될 것이다.

 

2) 하나님 말씀대로 신앙생활하려는 마음이 약해지면서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유지된다. 그것은 주일예배를 통해서 정례화되었다. 주일예배만 드리면 다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일성수 안 하고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주일예배 빠지면 천벌을 받는다든지 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내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1주일에 한 번 하나님 만나고 예배드리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코로나가 심각할 때 보수적인 한국교회들은 집단감염의 위험 중에도 대면 예배를 강조하여 사회의 비난을 샀다. 그래서 진보적인 신앙인들이 온라인예배가 대면 예배와 똑같은 효능을 지니고 있다고 강변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 대면 모임 규제가 풀리고 자유롭게 모일 수 있게 되었는데도 대면 예배에 참여하지 않거나 아니면 과거에 비해 훨씬 대면예배의 중요성이 축소되었다. 결국 신앙은 정성이고 진실한 사랑이다. 모일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온라인으로도 예배드릴 수 있지만 우리가 해보면 정말 어쩔 수 없는 사정 아니면 대면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대면이냐 온라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 자세 속에 정말 하나님을 대하는 정성이 얼마나 유지되고 있느냐가 핵심이다. 우리 안의 편리주의가 신앙을 조금씩 약화시키고 있다.

 

3) 우리의 삶이 너무 고단해졌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알바가 별로 없었다. 물론 그때도 알바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정말 형편이 어려운 사람만 하는 것이 알바였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용돈이 부족했다. 그런데 대부분 다 경제적 여유가 없으니 놀아도 돈이 별로 안 드는 방식으로 놀았다. 지금은 청년뿐 아니라 청소년들도 알바하는 것이 당연하고 안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게으르고 생활력이 없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너무 바쁘고 힘들다. 그래서 경제는 더 나아졌지만 신앙생활은 어려워졌다. 옛날에는 할 일이 없어서도 교회서 하루종일 살았다. 요즘은 그럴 수 없다. 모두 바쁘고 일에 지쳐있다. 경제는 나아졌지만 신앙은 피폐해진다. 게다가 기독교의 사회적 신뢰가 떨어지고 도덕 지수가 감소하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선망이 사라졌다. 아직 교회 안 끊었느냐고, 아직도 교회 다니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지금 신앙생활 유지하기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4) 과거 교회 역사에서는 여러 가지 핍박이 신앙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었다. 지금은 외부의 핍박보다는 비기독교적 사회 분위기와 절실함과 정성이 사라진 우리 내부의 신앙 자세 때문에 신앙 유지하기가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이유야 어떻든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난이든 유혹이든 내 믿음 잃지 않고 견뎌야 한다.

 

주님 말씀하셨다 ;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태 10:22)

 

끝까지 견뎌야 한다. 구원은 그 길 끝에서 받는 숭고한 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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