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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2-1) - "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 / 이병일 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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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강림후(12-1) - "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 / 이병일 목사

관리자 2023-08-16 (수) 15:37 8개월전 256  

본문) 사 4:2-6; 빌 2:12-18; 마 5:13-16


이사야 1장 1절에 의하면 예언자 이사야는 유다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 및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예언자로 소명을 받았는데(6:1; BCE. 742년), 그 후 약 40년 동안 활동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대부분 늘 앗시리아의 위협으로 야기된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난 위기와 격동의 시대였다. 

 웃시야 시대(BCE. 783~742년)는 정치적 안정과 군사적 힘을 바탕으로 유다의 국력이 크게 신장되고 경제적 번영을 구가한 시기였습니다.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은 평화관계를 유지하였지만, 남북왕국 모두 경제번영의 혜택이 부유한 특권층에게만 돌아가고 가난한 자들이 많아 생기면서 불의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웃시야 왕 때의 이러한 상황은 요담시대(BCE. 750~735년: 750~742년은 웃시야와 공동섭정기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두 나라의 안정과 번영의 시대는 주로 8세기 전반에 앗시리아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BCE. 745년 디글랏-빌레셀 3세가 앗시리아의 왕이 된 후에는(BCE. 745~727년) 상황이 일변하였습니다. 그는 주변의 약소국들을 다시 굴복시켰으며 그의 강력한 후계자들을 통해서 앗시리아는 그 후 1백여 년 이상 고대 근동의 지배권을 행사하였습니다.

아하스 왕은(BCEE. 735~715년) 이러한 앗시리아의 위협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국제관계로는 정치적 소용돌이와 전쟁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고, 내부적으로는 사회적 불의가 만연한 상황에서 예언활동을 하였습니다.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연합군이 그들의 반앗시리아 동맹에 유다를 강제로 끌어들일 목적으로 BCE. 734년에 유다를 침공한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때 남 유다의 왕 아하스는 이사야의 충고와는 반대로 앗시리아에게 원조를 요청하였습니다. 앗시리아는 반란 세력을 공격하여 BCE. 733년에 시리아는 멸망하였고, 이스라엘은 갈릴리를 중심한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기게 되었고, 유다는 앗시리아 속국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 이사야의 본문이 선포되었습니다. 이사야서의 본문은 2:5-4:1까지의 심판 선언에 이어서 예루살렘이 바로 그 심판 날(아모스 5:18; ‘야훼의 날’)에 회복될 것임을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유다의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려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게 결코 아니므로 심판을 통하여 예루살렘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하심과 아울러 남은 자에 대한 구원을 약속하십니다(10:20-27). 따라서 본문은 남은 자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의 경륜과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을 잘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활동은 “시온 산의 모든 지역과 거기에 모인 회중 위에, 낮에는 연기와 구름을 만드시고, 밤에는 타오르는 불길로 빛을 만드셔서, 예루살렘을 닫집처럼 덮어서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에 공동체적인 구원입니다. 


빌립보 지역은 로마의 군사적 전초 기지로서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 중 하나였으며, 전략상 마케도냐 지방의 제일로 꼽히는 성읍이었습니다. 또한 빌립보에는 헬라인, 로마인, 아시아인 등 여러 민족이 모여 살았으며, 각종 철학, 종교, 미신 등이 성행하였습니다. 이 도시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으나 그들의 생활, 언어 관습은 오히려 헬라적이었습니다. 빌립보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소수였으므로 회당도 없었고, 또 종교와 생활습관의 차이 때문에 그곳 사람들이 유대인을 대하는 감정은 좋지 않았습니다. 서신에 언급된 빌립보교회의 구성원들은 에베브로디도, 유오디아, 순두게, 글레멘드인데, 이 모든 이름에서 빌립보 교회가 두드러지게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감사함과 그들의 선물과 핍박의 상황에서 그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또 핍박의 상황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교회 자체 내에서 하나됨을 유지 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특히 외적인 이방인들의 핍박이나 유대 열광적 그리스도인들의 훼방에 맞서서 믿음에 굳게 서도록 하기 위하여 본 서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 의해서 바울에게 보고된 빌립보교회 내의 분쟁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교회 전체가 하나됨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하나됨을 위해서 서로 겸손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비우시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음을 일깨우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생활을 하라고 합니다. 어떤 시련을 겪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같은 생각으로 같은 사랑을 나누며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를 낮추는 생활을 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기에는 열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표현대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강조합니다. 이는 성숙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13 하느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14 무슨 일이든지, 불평과 시비를 하지 말고 하십시오. 15 그리하여 여러분은,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느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16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으십시오. 그리하면 내가 달음질한 것과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아니하여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17 그리고 여러분의 믿음의 제사와 예배에 나의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 개역성서),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하겠습니다. 18 여러분도 이와 같이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빌립보의 상황이나 이사야의 상황이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입니다. 최근에 우리가 경험한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뿌리 깊게 이어온 적폐의 민낯을 확실하게 보게 됩니다.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의 희생으로 그동안 숨어서 국민들 피를 빨아먹은 모든 적폐세력들이 이제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수구부패정당 세력, 판검사 세력, 재계와 언론 세력 그리고 권력에 협잡한 종교 세력까지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집을 가진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부동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부동산 인질사회라고 합니다. 집 장만을 하기 전까지는 주거불안이 해소되지 않고, 집 장만을 하고 나면 집값 상승을 바랄 수밖에 없고, 부동산을 활용하지 않고는 노후에 중산층 정도의 생활을 유지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한국사회는 부동산 인질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 식의주(食衣住)인데, 집을 투기의 대상으로 삼아서 탐욕의 극대화를 이루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욕망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실제로 자기들이 만든 법으로 몇 십억의 이익을 본 사람들이 거짓 통계로 사람들을 더욱 불안하게 조장하고 있습니다. 

법률소비자연맹이 대학생과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법의식’ 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85.3%(642명)가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상에 동의한다’고 답했습니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답변은 14.1%(106명)에 불과했습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현재진행형의 생명력을 띠고 끊임없이 반복 재사용되고 있는 자체가 사법 불신의 갑갑한 현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남한은 국민의 27%가 사법부를 신뢰한다고 합니다. OECD 전체 사법부 신뢰 평균치가 54%인 점을 감안하면 우리 국민의 절대 다수는 사법부가 사회 정의를 제대로 실현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2018년에 조사한 것인데 지금은 훨씬 더 악화되었을 것입니다. 법은 상식의 집합체입니다. 상식선에서 법이 집행되고 그 대상에 가림이나 차별이 있어선 안 됩니다. 검사, 판사들이 밟고 사는 땅이 대중이 발을 딛고 사는 땅과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세대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소금의 속성 혹은 기능은 무엇입니까? 언뜻 생각나는 것이 맛을 내는 것, 부패를 방지하는 것입니다. 소금은 짠맛을 낼뿐만이 아니라, 단맛을 더 강하게 하거나(대비효과-팥죽) 신맛의 자극을 부드럽게 하면서(억제효과-초무침) 맛의 조화를 이룹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 맛 나게 하는 존재입니다. 세상과 더불어 살면서 그 세상에 함께 있는 사람들을 살 맛 나게 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소금은 부패를 방지합니다.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소금을 사용합니다. 이처럼 세상이 아무리 부패가 만연해도 그리스도인은 그 부패에 휩쓸리지 말고 오히려 그 부패를 방지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부패를 방지하게도 하지만, 부패를 빠르게 하기도합니다. 쇠의 부식을 가속화하게 합니다. 부패할 것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부패하게 하는 것입니다. 

빛의 속성 혹은 기능은 무엇입니까? 빛은 비추는 것입니다. 비추어 어둠을 몰아냅니다. 빛은 세상의 부패를 조장하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세상을 밝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어 밝히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세상을 밝게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어둠으로 감추어져 있던 사실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하느님의 통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에 새로움을 선포하였습니다. 새롭다 함은 숨겨진 것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국제적 현실이 어둡다고 하지만 역사의 힘은 대단합니다. 권력에 의해서 숨겨지고, 자기의 이익만을 탐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감추어졌던 일들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위에서 우리가 생각한 소금과 빛의 속성들보다 더 중요하고 근원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을 살리는 기능입니다. 어떤 생명도 소금과 빛이 없이는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소금과 빛의 의미는 모든 생명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소금과 빛은 우리 삶의 필수품입니다. 없어도 되는 존재들, 아니 없어져야 마땅한 존재들로 취급되었던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꼭 필요한 존재라’는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 그 사람들은 강한 자부심과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아 행복하다고 행복하게 되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세상과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꼭 필요한 존재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개인으로서는 한계가 분명하고 나약하기 때문에 공동체로 부름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선언은 개인에게 한 것이라기보다는 “너희”라는 공동체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월호 이전과 이후, 코로나19 이전과 이후, 그리고 기상이변으로 인한 장마 이전과 이후는 달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권력자들의 의식이나 태도는 바뀌지 않고, 변명과 남탓으로 일관합니다. 심지어 약자들을 희생양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변화의 모습은 사안마다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달라져야 하는 것은 사회적 분위기와 흐름, 즉 인간의 마음입니다. 달라져야 하는 것은 자본의 무한탐욕과 그 부산물인 ‘속도, 효율, 경쟁’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이념입니다. 더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위해서 우리 각자가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수많은 원인을 비판하면서도 그 비판 앞에 나를 세워야 합니다. 

지금 살아 있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자랑거리가 되고 영광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거룩하다고 일컬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게 하심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제사와 예배에 나의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기꺼이 그 길을 가야합니다. 

지금의 현실은 재앙의 징조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 나라 이 민족에게 열릴 수 있는 새로운 구원의 길, 해방의 길의 전조로도 보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는 결정될 것입니다. 정부의 정책과 사회적 분위기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삶과 지향을 전환할 때에 새로운 엑소더스(출애굽, 해방)의 길이 다가올 것입니다.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흠 없고 순결해질 때에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상을 바꾸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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