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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5-1) - " 오직 아버지께 보고, 들은 것으로 행동하라 " / 맥추감사주일 / 송종근 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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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강림후(5-1) - " 오직 아버지께 보고, 들은 것으로 행동하라 " / 맥추감사주일 / 송종근 목사

관리자 2023-06-30 (금) 11:42 9개월전 365  

본문욥 28:12~28, 행 17:16~34, 요 8:31~38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주인공은 욥입니다. 욥은 세상의 천국과 지옥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부와 성공을 경험했고, 반면 그 모든 것들을 한 순간에 모두 잃어버리고, 그 자신도 몸에 지독한 피부병을 얻는 큰 시련을 경험한 인물이 욥입니다. 그런 욥의 인생을 두고 그의 아내는 저주했고, 가장 친한 친구들은 욥을 정죄하기 바빴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그 가운데 욥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의 본문은 참된 지혜에 대한 욥의 증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욥은, 지혜란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것임을 지적하면서 지혜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음을 담담히 고백합니다. 자신들의 지식에 근거하여 욥을 정죄하기 바빴던 친구들을 향해 우리가 진짜 믿고 의지할 지혜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욥은 자문 자답의 형식을 통해 지혜는 오직 하나님만이 그 있는 곳을 아신다 고백하며, 진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 담담히 고백합니다. 이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분명한 지적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지혜에 대해 끊임없이 찾고자 하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진정한 지혜는 깨달을 수 없음을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서신서의 증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서신서의 말씀은 바울이 아테네에서 그리스의 철학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한 대목입니다. 아테네는 전통적으로 철학과 사상, 신화의 중심지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호로 등재된 파르테논 신전이 도시의 중심에 버티고 있을 정도로 아테네는 세계의 수많은 종교, 철학의 중심지입니다. 그런 도시에 바울이 도착했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 들어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훼방하는 유대인들이 쫓아왔기 때문입니다. 자칫 훼방하는 자들로 인해 신변에 위협을 받을까 걱정한 초대교회 성도들이 아테네로 피신시킨 것이죠. 곧 바울의 아테네행은 계획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눈에 들어온 아테네의 현실은 우상과 잡사상이 넘쳐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아테네에 거주하던 경건한 유대인들조차 그들의 믿음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우상과 이방 사상 가운데 방황하자 바울은 적극적으로 복음을 증거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7:17절은 아테네에 도착한 바울이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다증거합니다. 바울이 변론한 대상은 경건한 유대인 뿐 아니라 아테네에 거주하던 철학자들, 사상가들이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그 가운데 그 유명한 아레오바고 언덕에서의 설교가 탄생한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내용에 궁금증을 갖고 있던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복음을 증거했던 것이죠. 이에 대해 오늘 성경은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증거합니다. 이는 아테네 철학자들의 관심이 그리스도와 복음이 아닌 논쟁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 자신의 지식으로 다른 이들을 이기는 것이 그들의 주된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테네라는 지역적 특성이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아고라에서 틈만 나면 자신들의 생각과 사상을 두고 논쟁했던 것이 그들의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특이한 이야기를 전파하니 호기심에서 관심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복음 증거를 마쳤을 때 나타난 그들의 태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32절은 그 반응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이는 아테네의 철학자들이 철저히 자신들의 사고와 지식의 한계 안에서 바울의 증거를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바울의 증언을 헛소리로 여겼던 것입니다. 지혜를 찾는다, 진리를 찾는다 하면서 그 지혜와 진리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서의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분명한 증거요, 선언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에 대한 증거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자유하기 위해서임을 증거합니다. 주목할 것은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의 의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자유하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지적을 유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당당하며, 노예가 아닌데 어떤 자유를 찾으라는 것이냐 반문했던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들은 율법적으로 완벽하고, 자유로운 존재라는 주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본질적인 한계를 지적하며, 그들의 본질은 죄의 종이고, 종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죄의 종된 이들이 자유함을 얻는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통해 자유함을 받는 것 뿐이다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아들을 통해 자유케 함을 받는다는 것은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아들이 전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믿을 때 아들의 권세로 죄의 종된 이들이 자유케 될 수 있음을 오늘 말씀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요한복음 5:24절을 통해 선포하셨던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을 옮겼느니라는 선포와도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진정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요, 그 자유는 참된 지혜이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깨닫는 것임을 오늘 복음서는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불어 37절의 말씀은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이려 하는지 보여줍니다. 자유인이라 주장하는 유대인들이 율법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적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유인들이라는 유대인들이 율법과 전통에 얽매여 있으니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도 부정하며,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은 철저히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이요, 의지인데 정작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믿음의 백성이라 자부하는 유대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스스로를 자유인이라 말하고 있지만 그들은 율법의 노예요, 죄의 노예가 되었고, 그 결과 거룩한 진리를 외면하게 되었음을 오늘 예수님은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36절을 통해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가르치신 예수님은, 아들을 믿을 때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 세 본문이 찾고자 했던 궁금증에 대한 분명한 해답입니다. 욥이 그 친구들과 논쟁을 통해 도달했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된 지혜라는 고백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요, 바울이 아테네에서 헛된 지식과 진리에 매달리는 철학자들을 향해 증언했던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증언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인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그것을 믿을 때 우리는 참된 지혜를 경험하고,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오늘 복음서는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란 논리적으로 따지거나 파헤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놀라운 신비임을 오늘 세 본문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그 믿음의 끝에 지혜와 자유가 주어짐을 오늘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을 우리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이 맥추감사주일이기도 하고, 한 해의 절반이 지나고, 새롭게 절반이 시작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절기상 맥추절은 구약시대 칠칠절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칠칠절은 한 해 첫 소산에 대한 감사의 절기입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칠칠절을 지키라 명령하시면서 동시에 고아, 과부, 나그네, 제사장, 레위인들도 돌보라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곧 단순히 풍성한 결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절기가 아니라 주님 주신 은혜와 복으로 이웃과 함께 행복을 누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절기가 칠칠절에 담긴 본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맥추감사절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우리 이웃들의 현실도 살피고 돌봐야 하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감사와 찬양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주셨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칠칠절이 출애굽으로,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와 찬양에서 출발한 절기이듯 맥추절도 그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는 절기라는 것입니다. 430년 노예로 고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사, 땅을 허락하시고, 정착하게 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마음이 칠칠절에는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가 지키는 맥추감사주일이 세상의 Give & Take식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우리들의 신앙고백을 담아내는 절기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며, 하나님이 참 진리요, 지혜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절기가 맥추감사주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복되고 거룩한 절기, 우리가 기억할 분명한 가르침은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예수님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전하는 말과 행동은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 있고, 예수님을 거부했던 유대인들의 말과 행동은 그들의 전통에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본질적인 하나님의 뜻이 아닌 그들의 전통, 그들의 생각과 판단만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지적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은 교회를 믿지 못하겠다 말하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들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그들에게 보여줄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드러내는 도구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핀 세 본문의 말씀에서 욥은 참된 지혜이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거짓이 아닌 진리임을 증거했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께 보고 배운 것을 드러내고 있음을 고백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자유하라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든 성도들도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을 드러냄으로 세상에 교회가 살아 있고, 교회가 하나님의 몸임을 드러내는 존재로 거듭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영광 받는 맥추감사절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온 땅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었던 칠칠절의 정신이 오늘 주의 말씀대로 증언하고, 행동하는 우리 성도들을 통해 온 세상에 드러나고, 선포되는 맥추감사주일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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