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행 11:1~18, 막 7:24~30, 슥 8:18~23
유대인들이 금식하는 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음을 기억하는 참회의 날이며 고통의 날입니다.
스가랴서에서 넷째 달의 금식, 다섯째 달의 금식, 일곱째 달의 금식, 열째 달의 금식은 바벨론이 예루살렘 성에 구멍을 내고, 성을 파괴하기 시작하고, 그달리야를 죽이고, 성을 포위하던 사건들을 기억하기 위한 금식입니다.
하나님의 도성이 무너진 사건을 금식하며 기억한다는 것은 삶의 뿌리가 뽑히고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절망의 시간에 잠겨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할례는 주 여호와에게 속한 사람으로 유대교인임을 확증하는 돌이킬 수 없는 증표입니다.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여호와께 속하지 못하는 부정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이라면 부정한 자들과 한 자리에서 먹고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이 율법입니다.
욥바에 있던 베드로는 환상 가운데 보여주시고 들려주신 하나님의 지시처럼 가이사랴의 어느 집으로 초대를 받았고 그들에게 ‘구원받을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베드로는 할례 받은 사도들과 형제들로부터 무할례자들과 한 자리에서 ‘먹고 마셨다’는 질책을 받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함께 도착한 형제 여섯 명과 함께 가이사랴로 가서 구원받을 말씀을 시작할 때에, 처음 제자들에게 임하셨던 성령이 그들에게도 임하셨음을 보고합니다.
베드로는 그 현장에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렸다는 고백도 합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할례받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심정을 말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의 보고를 들은 할례자들이 “이제 하나님게서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셨다.”라고 베드로의 행적에 대해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가끔 오해를 발생시킬만한 일들이 생깁니다. 그 중에는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주장을 하면서 교회공동체를 소란스럽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형제와 사도들이 문제를 삼은 중심 주제는 베드로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먹고 마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을 어긴 사실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베드로의 행위를 비난합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행위에 대해 자기들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러쿵저러쿵 하다가, 베드로를 질책하려는 준비도 마쳤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의 독단적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예루살렘에 돌아온 베드로와 그 일행으로부터 듣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시는 광경을 함께 본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인 증인들도 있습니다. 그때에야 예루살렘의 사도와 형제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생명 얻을 회개의 문을 열어주셨음을 인정합니다.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증인들이 있는 가운데 ‘처음 우리들이 성령을 체험하던 것처럼 그들도 그렇게 하였다’는 베드로의 보고는,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형제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베드로를 비난하려는 생각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율법에 따라 할례 받은 자들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베드로와 또 다른 여섯 명의 경험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활동하시다가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얼마 후 두로 땅으로 피신하셨습니다. 두로는 12지파가 땅을 분배받을 때에 아셀지파에게 배정되었으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도 페니키아가 지배하던 이방지역입니다. 아무도 몰래 이방인의 땅인 두로의 어느 집에 들어가셔서 계시려고 하였으나 예수님을 찾아 나선 이방인이 있습니다. 더구나 그 이방인은 여인입니다. 유대인 남자를 이방인 여자가 찾아왔습니다.
예수께서 이방인의 지역으로 가셨고, 그 곳은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이 살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름 없이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불리는 그에게는 귀신들린 딸이 있습니다. 딸을 둔 어머니도 여인이고, 딸도 여인입니다. 이방인이나 여인을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대인 남자를 찾아온 어머니를, 유대인이며 남자인 예수는 막말을 하면서 쫓아보내려고 합니다.
현대인이라면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대답을 하는 예수는 유대인이며 남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만약 우리 자신이 그런 예수 앞에 서 있다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을 가지고 찾아가 해결해 주기를 간청하는 그 사람이 나였다면 예수의 대답이 어떻게 들렸을까요?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진 어머니, 그렇지만 예수라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어머니는 냉정했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은 펄펄 끓어 폭발할 지경이라도, 딸을 고쳐야 한다는 판단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이성을 발휘합니다.
“상 아래에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이 어머니는 자기를 모독하는 유대인, 군대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가족들에게 돌아가게 해주었다는 남자, 죽은 아이도 살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의 주인공인 이 유대인 남자 앞에서 자신의 인격을 개의 먹이로 던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던져서 딸을 치료하고 싶다는 이방 여인의 간청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던져 온 생명을 구원하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놓고 인격을 짓밟는 사람 앞에서 비굴함을 견디며 딸을 구하려는 어머니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믿음으로 산다는 우리들도 이처럼 강력한 요청을 거부하면 안 됩니다. 이런 정도의 요청을 거부하는 자는 스스로 개로 전락하는 길을 택하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우리가 주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으로 위로 받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믿고 순종하는 복음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어떤 마음으로,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금식을 하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문자대로 하면 된다는 안이함을 회개하는 심령이 귀합니다. 회개하는 심령이 되었을 때에 만군의 여호와가 베푸시는 은혜와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하며 주의 임재하심을 요청할 때에 성령께서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게 하시며, 비로소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고 진실과 화평으로 쌓는 삶의 제단인 예배를 주께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주인 되시는 분이 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성도라면 주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내 계획에 따라 활동하시도록 독촉하고 명령할 것이 아니라, 상 아래에서 부스러기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주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기의 딸을 사랑하는 그 심장으로 철저하게 자신을 낮춘 자세로 예수님의 마음을 뚫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 남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이방인 여자, 귀신들린 딸을 둔 어머니에게 내밀었던 거부권을 거둬들이셨습니다.
성령강림절을 지키는 우리들은 임마누엘의 믿음으로 오늘 여기에서 일어나는 성령하나님의 활동을 기대합니다.
주님은 언제든지 우리의 상식을 깨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매달리는 세속적 합리성을 찢어버리고 오시는 분이심을 기억합시다. 금식이 아닌 회개, 율법의 문자가 아닌 율법에 담긴 뜻, 관습적 행동이 아닌 진심을 간직한 열정으로 주께 나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그리고 주께서 일하시기를 기다립시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허락하신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허락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