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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성령강림후(6-2) - " 여호와의 날에 " / 최병학 목사

관리자 2018-06-29 (금) 14:58 5년전 4871  

본문) -  습1:14-18, 벧후3:8-13,  눅17:20-37

 

1. 영화 <2012>과 종말론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 <2012>는 고대 마야 문명에서부터 끊임없이 회자되어 온 인류 멸망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곧 고대인들의 예언대로 전 세계 곳곳에서는 지진, 화산폭발, 거대한 해일 등 각종 자연 재해들이 발생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최후의 순간이 도래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서의 종말론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지난 간 이야기지만, 금융위기로 인해 2012년 종말론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었던 적이 있습니다. ‘2012년 종말론’의 근거는 “(1) 고대 마야 문명의 역법이 기원전 3114년 8월 시작해 기원후 2012년 12월 21일에 끝난다. (2)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도 재해석해보면 종말의 해는 1999년이 아니라 2012년이다. (3) 파푸아 뉴기니의 후리족 전설에도 2012년을 다루고 있다. (4) 주역에도 이날이 지구 종말의 날로 기록되어 있다. (5) 태양계의 감춰진 행성 엑스(X)가 2012년 지구와의 충돌이 예측된다. (6) 2012년 초강력 태양폭풍이 발생한다. (7) 수마트라의 토바호에 있는 지구 최대 화산이 2012년 폭발할 가능성이 크다. (8) 미래 예측 시스템 ‘웹봇’이 2012년 지구 온난화로 지구가 멸망한다고 예측했다.”등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2018년 7월입니다. 그렇다면 종말은 없으며, 의미 없는 것일까요?

 

2. 여호와의 큰 날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에 많은 영향을 끼친 예언자 스바냐(여호와께서 숨기신자, 보호하신 자)는 히스기야 왕의 4대손으로 왕족입니다. ‘여호와의 날’을 통해 악에 대한 심판과 의에 대한 구원을 예언했지요.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보내셨다는 것은 세상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바냐서의 분위기를 보면 보통 문제가 아니라, 나라가 멸망하게 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를 지닌 시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바냐의 예언은 역사적으로는 유다와 이웃 나라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고(물론, 그 이후 유다의 회복을 말하기도 했지만), 영적으로는 세상의 대 환난을 거쳐 미래의 천년 왕국 실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날’은 무엇입니까? 오늘 구약의 본문은 여호와의 큰 날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습17:14a).”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라 합니다. 왜 이렇게 여호와의 날에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스바냐는 사람들의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17).” 정의를 행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지 못했으며 우상을 숭배하고 그릇된 길로 가버린 이스라엘 백성의 죄입니다. 스바냐 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1-2).” 따라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이 땅 모든 주민은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습1:18)’이라 말씀합니다.  

 

3. 회개하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의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 분노의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까지 그저 기다려야 하나요? 베드로 사도는 우리들에게 회개를 요청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그렇습니다.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더 나아가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3:11)’고 묻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3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거룩한 행실(11)’과 ‘경건함(11)’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12)’하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종말의 때일수록 우리는 거룩한 행실을 통하여 경건의 훈련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국은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것(13)입니다. 

 

최근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수용하여 과정신학을 소개한 존 캅 교수가 나이 90세에 『예수의 아바 하나님: 실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한국기독교연구소, 2018)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에서 존 캅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가르친 하나님은 예수가 믿었던 하나님과 전혀 다르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한 끔찍한 범죄들을 지적하고 다시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혁명적인 통찰을 주목해야 된다는 존 캅의 외침이 놀랍습니다. 사실 존 캅의 외침은 단순합니다. 그저 ‘하나님을 예수께서 생각한 대로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 사라진 우리 세대에 존 캅의 말은 놀라운 울림을 우리들에게 전해줍니다 그의 말을 들어볼까요?

 

“이 책에서 나는 예수처럼 하나님을 생각하고, 또 하나님과 관계 맺을 것을 주장한다. 물론 기독교는 항상 그렇게 해오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기독교가 하나님 및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가르쳐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해 이해해온 것과 예수가 ‘아바 하나님’에 대해 이해한 것은 분명코 다르다.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데 교회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행위를 찾을 수 없는 교회(계3:1-2)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3:5) 목회자, 하나님의 의가 아닌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 예수께서 믿으셨던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바라는 사람(벧후3:11)’이 되어야 합니다. 

 

4. 잃는 자는 살리라

 

그렇다면 베드로가 바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신약의 본문은 핵심적으로 그런 사람을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눅17:33)”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입니다. 십자가의 자기부정, 자기희생, 이것이야 말로 종말의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한때 구멍 난 양말을 기워 신으며 철학자 헤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찢어진 양말은 기워 신으면 초라하고 볼품없지만, 정신은 찢어진 상태를 극복하면 찬란해진다.” 젊은 날 가정교사를 전전했던 헤겔의 ‘물질적 부족’과 ‘정신의 충만’을 엿볼 수 있는 말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이 훗날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모토가 되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정신은 자기의식을 갖추게 되면 체세포가 분열하듯 스스로 갈라집니다. 헤겔은 이것을 ‘소외’라고 부릅니다. 아무튼 자기 내부에서 찢겨 피투성이가 된 정신은 탕자와 같은 여행을 통해 불화와 상쟁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상처를 극복하고 돌아와 온전한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오딧세우스의 여행이 끝나는 것입니다. 성서적으로 말하면 ‘돌아온 탕자’라고나 할까요? 

 

중요한 것은 헤겔의 정신은 한 개인의 정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개별 정신들의 집합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공동체(사회, 국가, 물론 교회)도 개별 정신의 의식처럼 분열과 갈등을 통해 이를 잘 극복하면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두 개로 찢어진 한반도와 찢어진 세대와 빈부격차로 인해 찢어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 땅(물론, 교회도 물질적으로 풍성한 대형교회와 정신의 충만 만을 외치는 힘들고 어려운 교회로 나뉘어졌죠?), 원주민과 난민, 피부색과 언어로 갈라진 이 땅에 헤겔의 찢어진 양말에 대한 단상은 정신의 찢어진 상태를 극복하여 찬란한 ‘절대 정신’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자기부정, 자기희생을 통한 극복과도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의 큰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더딘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참고 계신 것입니다.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행실로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스바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고, 내어주고, 섬기며 겸손히 예수 십자가의 삶으로 살아갈 때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더라도 여호와의 큰 날이 기쁨과 감사와 영광의 날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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