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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성령강림절(1-1) - " 성령체험은 말씀 사건이다 " / 이영재 목사

관리자 2018-05-16 (수) 20:51 5년전 4869  

본문) 행2:1-13,  신5:1-21,  요14:15-31

 

오늘(2018년 5월 20일)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오늘 봉독한 사도행전 2장의 본문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보도합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한 집에 모였을 때 성령이 강림하였습니다. 오늘 바로 이 예배 시간에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초대교회의 그 성령이 강림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순절이 왔는데도 제자들은 여전히 절망과 좌절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권력과 빌라도의 식민지 통치는 너무나 막강하였고 헤롯의 군대도 무시무시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종교는 타락하여 입에 담기도 싫었습니다. 사두개파 제사장들은 부패하였고 바리새인은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토라의 말씀이 온통 왜곡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새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새 희망이었던 스승 예수는 처참히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제자들이 걸었던 역사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제자들은 절망하였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이 주는 의미를 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다시 살아나셨으나 40일 후에 승천하고 말았으니 구원주 메시야는 역사현장에 없었습니다. 역사를 살아야 하는 제자들에게 부재하신 메시야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고 부탁하신 말씀을 제자들은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새롭게 조직을 가다듬었습니다. 맛디아를 선발하여 제자단을 충원했습니다. 열두 지파로 이루어진 하나님나라가 제자들을 통해 다시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자들은 힘이 빠져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절망은 너무 깊었습니다. 부활의 현실은 멀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힘겨웠습니다. 주께서 땅끝까지 증언하라고 하신 그 명령을 받기는 했으나 무엇을 증언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오순절이 다가 왔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며, 초막절은 광야 40년 유랑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칠칠절은 시내산의 말씀계시 사건을 기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백성에게 십계명과 토라를 주셨습니다. 칠칠절이 곧 오순절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은 말씀의 사건을 강조하는 절기입니다. 제자들이 모인 오순절 기념자리에 성령과 말씀, 이 두 가지 주제가 한 데 어우러져 성령강림 사건으로 발생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첫 오순절 날에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어떤 한 집에 모여 있었습니다(행2:1). 제자들에게 세찬 바람 소리가 들리고 혀 같이 생긴 불꽃의 형상이 모든 제자들의 머리 위에 나타났습니다(행2:2~3).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제자들이 방언을 하기 시작했는데(행2:4), 제자들은 성령께서 시키는 대로 말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방언은 세계 각국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각각의 지방 언어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제자들의 방언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행2:8). 제자들이 방언을 하였을 때 성령께서 통역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제자들의 방언을 알아들었습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언어가 혼잡해진 이후 소통이 끊어진 어두운 불통의 역사를 넘어서 새로운 만민소통의 세계가 열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강림주일에 성령만을 강조하고 말씀을 간과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령을 받으라고 하면서 입신이나 방언 등 신비한 체험만을 강조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제자들이 방언을 하였다는 구절에 집착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말씀에는 ‘성령과 말씀’이라는 더 깊은 차원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방언을 하되 공중 앞에서 하지 말 것을 금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됩니다. 공중 앞에 나와서 방언을 하려거든 반드시 통역의 은사를 받아서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여러 나라 다양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제자들의 방언을 잘 알아들은 것이 바로 성령강림의 사역임을 바울은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출범하는 성령강림 사건에는 모든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을 갈라놓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불통의 장벽이 허물어진 대소통과 화해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남북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이 무너지고 서로 서로를 잘 이해하고 사랑으로 껴안는 사건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재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강림의 사건을 올바르게 해석하였습니다. 바울은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는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차별 없는 복음은 곧 육이 되신 말씀입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곧 말씀의 계시 사건입니다. 오순절에 방언이 임한 신비체험만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성령’은 사도행전에만 나오는 단어가 아닙니다. 성경의 맨 앞부분인 창세기 1장 2절에 벌써 ‘성령’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시더라’란 말씀에 나오는 히브리어 <루악흐>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한글역본들에서 ‘영’(靈) 내지 ‘기운’(氣運)이라고 번역하지만 이른 역본은 ‘신’(神)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루악흐>가 작용하여 창조의 사건을 일으킵니다. <루악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하는 능력입니다. 시편 104편은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노래합니다(시104:30). 주께서 말씀하시면 주의 영이 움직여 만물을 새롭게 창조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를 거쳐 모세의 시대에 이르도록 계속 그의 나라를 세워주셨습니다.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정립하셨으나 사사시대에 닥친 세상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세속의 왕국을 세우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좌절되는 듯 보였습니다. 세상을 따라 우상을 섬기다가 다윗왕국은 분열하고 말았습니다. 북왕국도 남왕국도 마침내 멸망을 당했습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은 이윽고 자신의 죄책을 깨닫고 회개하였습니다. 회개의 열매는 토라의 말씀으로 맺혀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라는 명령입니다. 시내산 계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방법론을 알려 줍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인데 세상 속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힘겨운 상황을 만날 때마다 성령께서 교회를 일으키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원리인데 그 원리는 곧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의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하라는 부름을 받은 백성이 예수님의 제자이며 하나님나라의 백성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의 안내 없이는 사랑할 수가 없다고 예수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곧 말씀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불렀습니다. 보혜사는 도우시는 성령입니다.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인데 요한복음 14장 16절의 새번역 성경을 보면 “변호해 주시는 분, 또는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각주가 달려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함께 하셔서 도와주시고 변호해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수 없습니다.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성령께서 주시지 않으면 지닐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만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말씀을 깨달아 실천해야 합니다. 성령은 말씀을 준행하게 도우는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으로써 백성의 곁에 머무시고 사랑의 말씀으로써 백성 가운데 계십니다(요14:17). 하나님을 모신 백성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성령은 신비체험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주에 편만한 창조의 기운입니다.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성령님이 수행하십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 낙심한 백성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살해당하셨으나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건을 다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내 지상을 떠나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은 하셨으나 지금 당장 주님 없는 세상은 너무나 힘겹습니다. 용기가 나지 않고 맥도 빠졌습니다. 너무나 막강해 보이는 세상의 권력 앞에서 하나님나라의 권력은 너무나 보잘 것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맛디아를 새로운 제자로 충원하였으나 힘이 나지 않았습니다. 

 

오순절 날 힘겨운 제자 공동체에 힘을 주시는 성령이 강림하였습니다. 성령은 바람 소리로 임했습니다. 여기에 ‘소리’의 신학이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에도 백성들은 하나님의 우렁찬 소리를 들었습니다(출19:5, 16, 19). ‘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는 수단입니다. 세찬 바람 소리는 성령이 말씀으로 임하신다는 뜻입니다. 불같이 갈라지는 혀도 말씀을 표현합니다. 혀와 방언은 말씀을 상징합니다. 엘리야도 호렙산 동굴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은 말씀 속에 계셨습니다. 시내산에도 모세와 백성에게 하나님은 소리로 임하였습니다.  

 

신비체험은 어느 종교에나 있습니다. 우상종교에도 황홀경에 들어가는 신비체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의 신비체험은 기독교를 말씀의 기초 위에 굳게 세우는 체험입니다. 말씀이 곧 신비함입니다. 기독교 교회의 예배에는 반드시 말씀의 예전이 있으며 말씀이 육이 되신 사건을 기념하여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라틴어 sacramento는 성찬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그 원뜻은 ‘비밀/신비’란 뜻이며 헬라어로는 <뮈스테리온>이라고 부릅니다. 이 또한 ‘신비, mystery’란 뜻입니다. 성령체험에는 반드시 말씀의 배우고 깨닫는 체험이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가는 말씀을 몸으로 살아가는 성육신의 체험이 성서적 신비체험인 것입니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전쟁기운을 물리치고 평화의 기운을 일으키시는 분은 성령입니다. 이 성령을 체험하는 길은 말씀이신 평화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깨우치는 길뿐입니다. 하늘로부터 소리로 주시는 방언을 받았을 때 절망 속에 빠졌던 제자들은 힘차게 일어났습니다. 불같은 방언(= 방언 = γλῶσσα)을 받았을 때, 베드로는 성령에 충만하여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날에 회개한 하나님의 백성이 3000명이나 되었습니다. 성령강림사건은 말씀전파의 사건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회개한 백성들은 모두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각자의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가졌습니다(행2:44-45). 성령강림은 말씀의 사건이며 죄인의 삶을 바꾸고 죄의 역사를 뒤집는 개혁의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금번 성령강림절에 성령충만 받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우리 모두 말씀으로 힘차게 일어섭시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실천합시다.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의 성령 바람이 일어납니다. 우리도 성령충만 받아서 가정과 직장에서 평화의 물결을 일구어냅시다. 성령충만 받아서 우리교회를 평화의 나라로 받들고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힘차게 세워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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