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4:2~6, 빌 2:12~18, 마 5:13~16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과 두려움을 호소하고, 기후이상으로 피조물들의 탄식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교회가 희망의 메시지와 새로운 징표를 보여줄 것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교회가 문제의 근원이라는 좋지 못한 시선으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사도는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속에 별과 같이 빛나라고 권면합니다,
곤고한 현실속에서 희망의 메시지와 징표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기력하거나 거짓과 역겨운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음 두 가지 이야기가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게 합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우화 <기러기>
거위들 틈에 살던 기러기가 있었다. 기러기는 거위도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거위들은 기러기를 보며 뜬 구름 잡는 몽상가라고 비난한다. 의기소침해진 기러기는 결국 하늘 날기를 포기하고 거위처럼 뒤뚱거리며 살게 되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우화를 통해서 당시 기독교 세계의 타락을 준엄하게 꾸짖었던 것이다.
자카리아 타메르가 쓴 <열 번째 날의 호랑이>
숲에 살다가 잡혀온 호랑이는 여전히 사나왔다.
첫째 날 호랑이는 으르렁대며 쇠창살을 물어뜯으려 했다. 며칠이 지나자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어 조련사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자 조련사는 <고양이처럼 야옹거리면 고기를 주겠다>고 했다. 호랑이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호랑이는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울음소리 하나로 숲을 울리던 호랑이가 고양이처럼 야옹거렸던 것이다. 조련사는 고양이를 길들이기 위해 당나귀처럼 히힝거릴 것을 요구했다. 호랑이는 그 제안을 거절했지만 결국 너무나 배가 고파 결국에는 당나귀처럼 히힝거렸다. 우리에 갇힌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호랑이가 히힝 대자 조련사는 고기가 아닌 건초더미를 던져줬다. 그는 더 이상 호랑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기러기가 다시 날 수 있을까? 호랑이가 호랑이다움을 되찾을 수 있을까?
교회가 세상에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희망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다! 라고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대답을 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서 세상에 희망의 매시지를 선포하고, 희망의 증거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세 본문을 통해서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에서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길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성령 안에서 더러움을 씻어라(사 4:2~6)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날이 이르면, 다시 새로운 싹이 움트고,
옛 꽃이 떨어진 자리에 새로운 순이 아름답게 돋아날 것이다.
그날이 이르면, 잊혀 진 이름들이 다시 거룩하다 불릴 것이다.
그날에는 더러움이 씻겨 지고, 굳어진 피를 닦아 주시고, 빛 가운데 서게 하리라.
이 일은 우선적으로 심판의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 정결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유다의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을 통하여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거룩함을 회복한 남은 사람들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심판의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주시기를 힘써 구하자.
둘째, 세상의 소금과 빛은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마5:13-16)
교회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거룩한 무리들의 모임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거듭남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의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서 되어진 것으로 에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요3:5-8)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앞서 이사야 말씀을 따르면 희망의 새싹이요, 희망의 새순입니다, 그것은 아름답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숨겨질 수가 없습니다.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행실이 세상에 희망을 주는 아름다운 일로 나타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그와 반대로 가는 것 같이 보입니다.
숨겨진 추한 모습들이 드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습니다.
일시 봉합하는 이미지 쇄신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세상의 손가락질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자. 힘써 구하자. 그래서 심판하고 소멸하는 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자. 하나님은 빛과 소금으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자리는 산상수훈의 말씀이 선포된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은 산상수훈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논리나 생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삶은 아름답고 착한 것이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더러움을 씻어 거룩함의 옷을 입고 말씀을 따라 살자. 그러면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아름다운 향기로 세상을 맑게 할 것입니다.
셋째, 흠 없고 순전하므로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빌2:12-18)
바울은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인격의 변화, 생활의 변화를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우이가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할 이 세대는 어떤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빌2:15)입니다.
이 세대는 하나님과 어그러진 세대입니다.
어그러진다는 말은 제자리를 벗어나 틀어지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에서 벗어나 틀어져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에서 틀어져 있습니다.
생각이 맞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대는 하나님의 뜻에서 어그러진 길을 가는 세대입니다.
이 세대하는 또한 거스르는 세대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아담과 하와에게 한 일입니다.
어그러진다는 말은 낚시 바늘의 끝과 같습니다. 미늘 말입니다. 살을 파고드는 것입니다. 남의 속에 상처를 추고 파 헤집는 말들이 난무합니다. 남의 진심을 왜곡해서 말하는 것이 이 세대의 특징입니다.
그런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흠이 없고
이것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에 쓰는 말입니다. 완전한 제물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삶으로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새데를 살아야 합니다.
순전하다./ 불순물이 혼합되지 않는 것
사람에게 쓸 때는 행동의 동기가 깨끗한 것입니다.
사람을 선대할 때 그것을 우리가 믿지 않는 것은 속으로 다른 불순한 동기를 감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가장 싫어합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는 속셈을 숨기고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하는데
그 말씀에 합당하게 흠이 없고 순전할 때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속에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힘이 있습니다.
사람들도 피조물도 탄식하며 희망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그들에게 희망의 말을 선포하고 희망의 증거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안에서 우리가 새로워지고, 말씀을 따라 살되 흠이 없고 순전하게 행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속에 생명의 말씀으로 빛을 밝히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