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 40:17~38, 빌 1:3~11, 마 18:15~20
메시지 성경’의 저자 유진 피터슨은 2018년 세상을 떠나기 전 ‘교회의 현장 사역’에 대하여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믿음대로 살아갈 유일한 기회는 바로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그 상황 속에 있다. 당신이 사는 이 집, 당신이 함께하는 이 가족, 당신이 몸 담아온 이 직장을 비롯하여 지금 대면하고 있는 상황이 바로 그 기회이다.” 네, 기독교적 삶이란 현재 직면하고 있는 현실, 바로 문화와 시대 속으로 들어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의지를 분별하여, 그뜻에 순종하는 것은 지당한 일입니다. 신앙이란 내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개인의 영역에서 다른 사람들의 삶으로 흘러 넘쳐가는 것인데, 오늘 8.15 광복의 날을 기념하는 ‘평화통일 주일’을 맞이하여 함께 나눌 말씀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 행진하는 길에 (출 40:17~38)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나온 지 둘째 해 첫째 달, 그러니까 새해 첫날 그들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성막을 세우고 봉헌합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은 더 이상 산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이곳 이 민족이 거주하는 곳 중심에 있는 성막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구름 속에서 성막으로 오십니다. 이런 묘사는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봉헌할 때에도 등장합니다. 출애굽의 긴 이야기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세운 성막에 임재하시는 것으로 끝납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확인할 것은, 먼저 ‘성막’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K;v]mi(미쉬칸)에 관한 해석입니다. 이 낱말은 ‘거주하다’에서 비롯된 말로 장소를 뜻하는 ‘거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출애굽 사건에서 익히 아는 바와 같이 바다가 갈라지고 길이 만들어진 일,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일, 광야에서 메추라기로 온 백성을 먹이시는 사건에 집중하면서 지나치고 있었던 부분입니다. 이것은 당시 ‘하나님은 산에 거하신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제부터는 이스라엘과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34-35절).
이로써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오셨으며, 이스라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앞으로 나아갔으며,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36-37절)는 말씀은 지금 우리로 하여금 자손 대대로 기억하고 지키며 계승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38절). 역사를 잊지 않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 나라 이 민족, 세계 만민이 걸어가는 이 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2. 복음을 위한 일에 (빌 1:3~11)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편지를 씁니다. ‘빌립보교회에게 보낸 편지’가 그것입니다. 바울은 소요를 일으키고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며 젊은이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하는 중입니다. 바울은 그럼에도 교회들에게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요구하는 편지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그 자신이 시대와 사회에 합당하지 않다는 판단을 받아 구속이 된 몸인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제안하는 복음에 합당한 삶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당시 권세잡은 자들이 요구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바울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5절)하는 것을 가리켜,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를 따르는 것(6절)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의의 열매를 맺는 일이라 전합니다(10-11절). 바울에 의하면 다 같이 이 일에 참여할 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처럼 복음을 널리 전하는 일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 일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일이었으며, 지난 날로부터 먼 미래에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인은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말씀에 내 삶을 동화시키고 작동시키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많이 배우고, 고상하고, 우아한 일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가식이 아닌 진짜 사랑을 베풀고, 목마른 이에게 냉수 한 잔을 건네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의를 구하고, 예수님과 함께 상처난 발을 씻어주는 삶입니다.
지금 오늘, 하나님 지으신 창조세계의 희망이 사라지고 있는 이 현실의 모든 상황을 바르게 분별하시고 행하셔서, 여러분을 통해 이뤄질 복음의 역사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3. 예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마 18:15~20)
이 본문은 반드시 마태복음 18장의 전체 문맥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이 내용을 구실 삼아 교회의 권면과 목사의 권고를 듣지 않을 시에는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왜곡을 일삼기 때문입니다. 18장은 ‘천국에서 누가 큰자인가’하는 논쟁으로 시작하여 이 본문에 앞선 두 단락 (6-9절)과 (10-14절)에서는 세상이 작고 천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정작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잘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죄인을 다시 찾는 기쁨’에 대해 알지 못하면 이 본문은 무용지물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는 자칫 멸망할 위험에 처한 작은 자들을 고려하라는 촉구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 앞에 선 우리 역시 세상 사람들처럼 무관심하고 냉랭하게 대했음을 고백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근거하여 새로운 물음이 제기됩니다. ‘공동체 내에서 죄와 혼란이 만연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인가? ‘죄와 혼란이 작은 자들을 위협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현실 속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더 큰 힘을 누리고자 하는 것(1-5절), 나쁜 마음을 품고 남을 실족하게 하는 것(6-9절), 무관심(10-14절), 그리고 본문에 등장하는 다툰 뒤에 화해하지 않으려는 것(15-17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그 사람을 찾아가 다툼의 조정을 위해 노력하는 일보다,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화해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문제는 잘못을 저지른 행동 자체라기 보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화해하지 않으려는, 분별력을 잃은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이 다툼을 화해하려는 노력을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교제와 사귐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7절)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말씀은 그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는 대상으로 보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매다’와 ‘풀다’라는 표현에 빗대어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부여하셨습니다. 19절입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아버지께서 이루게 하시리라’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는 것으로, 기도는 형제자매를 걱정해 주는 마음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둘’은 모임을 이루는 최소 단위이고요. 기도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을 잘 담아내는 것이지, 벌을 주거나 앙갚음하려는 바람이 아닙니다. 거듭 말씀 드리면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잃은 사람을 다시 찾는 겁니다(10-14절).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화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네게로 이르는 길, 네가 깨끗한 얼굴로 다시 내게로 되돌아 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2023년 대한민국이 해방된 지 77년을 맞이하지만, 같은 민족인 남과 북은 아직도 휴전중이며 표류 중입니다. 화해보다는 서로 대치하면서 비방과 조롱을 반복하는 중입니다. 상호 공존보다는 서로 흡수 통합을 내세우며 자극과 도발을 서슴치 않는 것이죠.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 백성이라는 우리가 취할 방식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는 일에(출애굽기), 초기교회가 복음을 위하는 일에(빌립보서), 그리고 예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마태복음) 역사하시고 능력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과거 이스라엘과 같이 역사를 잊은 민족이 되지 않기를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