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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강림후(11-1) - " 매는 것 그리고 푸는 것 " / 평화.통일주일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23-08-10 (목) 11:36 1년전 782  

본문) 출 40:17-38, 마 18:15-20, 빌 1:3-11


얼마 전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가슴 아픈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교권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교육의 기본에 대한 논쟁까지 벌어졌습니다. 본래 교육은,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수용’과 동시에, 아이의 잘못을 일깨우고 바로잡는 ‘통제’를 통해서, 아이가 바르게 자라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수용’과 ‘통제’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가 자기 아이를 무조건 받아주기만 하고 전혀 통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잘못한 아이를 제지합니다. 그러면 학부모가 내 새끼에게 정서적 학대를 했다며 선생님을 협박하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급기야 제 기분을 나쁘게 했다며 선생님을 욕하고 폭행까지 하는 아이도 나왔습니다.

이런 교육 현장에서 최근 5년 동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생님이 100명이나 됩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을까요? 도대체 그 학부모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다른 사람의 마음은 도무지 모르쇠고, 그저 내 기분만 아는 것입니다. 정말 너무 편협하고 이기적인 독선이지요. 그렇게 내 새끼의 마음이 중요하면, 다른 아이들의 마음도 헤아려야 하고, 또 누군가의 자식이요 가족인 선생님의 마음도 존중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실 그 부모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식을 망치는 것입니다. 부모는 무조건 오냐오냐 아이들을 받아주기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뱀을 달란다고 독사를 던져주는 사람은, 그건 부모도 아니지요. 부모는, 그리고 선생님은 아이들을 때로 매어주기도 하고 때로 풀어주기도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18장 15-20절 말씀을 함께 받아 읽었습니다. 오늘은 18절을 주목해 보고, 마음 깊이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지요. 

우선 여기서 ‘매는 것’과 ‘푸는 것’은 뭘 말하는 것일까요? 매는 것은 묶어서 고정하는 것이지요. 푸는 것은 묶인 것을 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매고 푼다면 무슨 뜻이 될까요? 사람이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죄를 지었을 때 그 사람을 맵니다. 매는 것은 죄인을 심문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푸는 것은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말에서도 용서한다는 말은 풀어준다는 뜻을 가집니다. 그렇게 다시 읽어보면, 이 말씀은 “너희가 땅에서 정죄하면 하늘에서도 정죄하고, 땅에서 용서하면 하늘에서도 용서한다” 이 말입니다. 너희가 정죄하면 하나님께서도 정죄하고 너희가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신다,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엄청난 권한을 가진 ‘너희’는 누구일까요?

한때는 매고 푸는 권한이 교황에게만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앞 16장에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요. 그때 예수님께서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6: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열쇠를 ‘너’(단수)에게 준다고 하셨으니까, 베드로에게 그 특별한 권한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베드로의 특권은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승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맺고 푸는 것은 교황의 독점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8장 본문에서, 예수님은 ‘너’(단수)가 아니라 ‘너희’(복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제자들도 매고 푸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또 그렇다고 해서 이 맺고 푸는 일이 제자들이나 사도들이나 목사들에게만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도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이요, 곧 ‘교회’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맬 수도 있고 풀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풀어주는 사람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옭아매는 사람들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으로 풀어주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사실 여기서 푸는 것, ‘용서’는 권력이 아니지요. 용서는 우리의 의무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의 기도’에서는 어떻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이어 ‘용서받지 못한 종’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 일곱 번이면 되느냐고 여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종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렇게 하실 것이다.”(35절) 무슨 말입니까? 용서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용서는 나 자신을 푸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도저히 갚을 길 없는 큰 죄(만 달란트)를 용서받은 우리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작은 죄(백 데나리온)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용서하기만 하는 사람들일까요? 교회는 무조건 받아들이기만 하는 곳이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는 또한 매는 사람들입니다. 푸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인 것과 마찬가지로 매는 것 또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매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매는 일은 엄중하고 신중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5절에서, 형제가 죄를 짓거든 어떻게 하라 했습니까? 먼저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라고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매는 일일수록 조심하고 신중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해야 하는 까닭은, 그렇게 해야 그 형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솔하면 사람을 잃는다는 말이지요. 사람을 소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조심히 충고했는데,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람이 돌이켜서 형제를 얻게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지요. 그러나 그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쩌면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하셨습니다. 신중에 신중을 더하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두세 사람이 함께 권해도 듣지 않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젠 더 볼 것 없이 내쳐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때는 ‘교회’에 말하라 하셨습니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을 때는, 그를 이방인처럼 세리처럼 여기라 하셨습니다. 매는 일일수록 더욱 신중하게, 무엇보다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출애굽기의 마지막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새해 첫날에 만든 것이 있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맨 처음에 만든 것,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성막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성막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광야에서 가나안을 향해 다시 출발하기 전에 먼저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그 성막은 백성의 중심이 되고, 행진하는 백성의 맨 앞에서 그들을 이끌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막의 중심, 그 한 가온에는 무엇을 두어야 할까요? 당연히 법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긴 증거판을 담은 법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진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궤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법궤 위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새긴 증거판이 법궤 안에 있다면, 법궤 위에 무언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20절입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증거판을 가져다가 궤 안에 넣고, 그 궤에 채를 꿰고, 궤 위에 속죄판을 덮었다.” 속죄판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속죄판으로 증거판이 든 법궤를 덮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성막의 중심에는 증거판과 속죄판이 함께 있었습니다.

여기서 증거판은 무엇일까요?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율법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짓지 않도록 묶는 것, ‘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십계명은 ‘하지 못하게 매는 계명’들이지요. 반면에 속죄판은 무엇입니까? 속죄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속죄는 ‘푸는 것’, ‘용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맨 앞에서 이끄는 성막의 중심에는 ‘매는 것’과 ‘푸는 것’이 함께 있었습니다. 한 민족을 이끌기 위해서는 ‘매는 것과 푸는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은 8.15 광복 기념 주일이지요. 해방 78주년을 맞는 우리는 아직도 역사를 매고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부는 일본을 용서하라는 무슨 명령이라도 받은 듯한 태도입니다. 아직 역사의 매듭을 매지도 못했는데, 그걸 다 풀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몇 분 남지 않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눈물도, 강제 노동자들의 피땀도, 우리 정부가 대신 배상하겠다지요? 그나마 일본을 묶고 있는 제약도 다 풀어서, 군대도 들어오라 하고,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도 풀고, 심지어 그 물을 마시겠는 인사까지 등장했습니다. 참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역사가 그렇게 독단으로 매고 풀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역사를 푸는 것은, 먼저 그 역사적 진실을 분명하게 매듭짓고 나서야 시작할 일입니다. 일본이 인정하지도 않고 사죄하지도 않는데, 누가 뭘 어떻게 용서한다는 말입니까? 한 맺힌 역사는 한 맺힌 사람들이 풀어야 하지요. 선무당처럼 매고 푸는 지도자는 그 줄에 자신이 묶이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말씀 아닙니까? 우리에게 매고 푸는 권한이, 아니, 의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용서는 예수님이 주신 소명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풀어 주면) 그 죄가 용서될(풀어질)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 20:23) 용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소명입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에게는 ‘매는 소명’도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맬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풀어준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지요. 내 손가락도 풀지 못해 쩔쩔매는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매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때로 매어야 합니다. 매는 일은 형제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매는 것은 어떤 학부모들처럼 야단치고 겁박하고 고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그리고 나를 죄와 악으로부터 지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매는 일은 교회를 지키는 일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 없이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려야 하기”(빌 1:11)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먼저 매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나 자신, 우리 자신입니다. 나 자신을 먼저 말씀에 단단히 매야 합니다. 우리는 주의 기도의 마지막 기도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악에 빠지지 않도록, 나 자신을 단단히 묶는 기도입니다. 나 자신은 가혹하리만큼 강하게 묶어야 다른 사람을 맬 수도 있고 풀어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매는 줄은 사랑의 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밧줄에, 유행가 가사처럼, 꽁꽁 묶인 사람들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아이들이 매고 풀 줄 아는 성숙한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아이들을 가르치며 애쓰는 선생님들에게 하나님께서 위로와 용기를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역사도 꼬인 매듭을 잘 풀어서, 다시 생명과 평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매고 푸는 소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날마다 우리를 말씀과 사랑의 빛으로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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