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8~17, 마 8:1~13, 사 1:1~8
하나님은 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살게 하셨을까요? 성경은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즉, 가축들을 잘 쳐서(젖을 얻기에) 좋은 땅, 나무들이 잘 자라서 풍성한 열매(꿀, 단 포도와 과일들) 맺기에 좋은 토질과 기후를 가지고 있는 땅 이라고 말씀합니다(출3:8 33:3). 그러나 아닙니다. 그 땅은 전혀 다른 땅입니다. 마르지 않는 나일 강 물로 농사를 지었던 애굽과는 달리, 지형이 주로 산과 골짜기로 되어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메마른 땅이요, 날마다 하늘에서 내려주는 비만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 땅(신11:10-11), 하나님이 매순간 돌보아주지 않으면 한순간도 살 수 없는 땅(신11:12),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살 때만,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땅입니다. 그래서 그 땅은 진짜 복 있는 땅입니다. 그 땅은 오직 믿음으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에게만 애굽처럼 물대는 수고마저도 필요 없는 땅, 오직 하늘에서 때를 따라 내려주는 물을 받아먹는 것으로 만족한 땅, 물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영원히 마르지 않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땅이기 때문입니다(시1:1-3).
하나님을 떠나 산 사람들(사1:1-8)
오늘 구약본문(사1:1-8)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하며 살았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시대에 벌어진 유다의 참상을 증언합니다. 이 시대에 유다는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을 우습게 여겼으며 아예 하나님을 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크고 놀라운 불행과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1) 한 순간에 죄와 마귀의 노예가 되어 “온 땅에 사람들이 저지르는 온갖 더러운 행악과 부패”로 가득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1:4)”
하나님을 떠나자 죄를 다스릴 힘을 잃었고 죄의 노예가 되고 정욕의 노예가 되고 쾌락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2)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자 우리의 영혼이 병들고 상한 상처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할 힘이 없고 용서할 힘이 없습니다. 마귀를 이길 힘이 없게 되었습니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1:5-6)”
3) 무엇보다 심령이 황폐하여 메말라버렸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자 우리 영혼이 모든 소망을 잃고 완전히 절망에 빠진 것입니다. 새 삶에 대한 소망이 사라졌습니다. 내 앞에 주어진 삶을 아무 목적도 의미도 없이 살아갑니다.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사1:7)”
결국 이스라엘은 망했고,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은 불탔으며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노예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심령이 부패되어 마귀의 노예가 됩니다. 온 몸이 병들고 마음이 상합니다. 그 심령이 황폐하여 말라버립니다. 살았으나 죽었고 아무 소망 없이 무의미하게 사는 사람이 됩니다.
지난 6월 29일 미국 비즈니스 인사이더 신문에 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텍사스 주 엘진에 사는 크리스 메펜이라는 사람이야기입니다. 가족들과 여행하기 위해 기차를 탄 메펜은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에 근처에 앉아 있던 한 여성으로부터 뜻밖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자신을 피부과 의사로 소개한 여성은 메펜의 왼쪽 뺨에 있는 불규칙하게 생긴 검은 점에 대해 누군가 이야기해 준 사람이 있었는지를 물었습니다. 메펜은 이야기 해 준 사람은 없었고 3년 그 이전에 점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 피부과 의사는 그 점이 피부암으로 인한 흑색종으로 의심된다며 자신의 병원에 들려 조직검사를 받아볼 것을 권했습니다. 며칠 후 메펜은 여의사가 운영하는 피부과에 들러 검사를 받았고 다행스럽게 수술로 제거가 가능한 초기 흑색종을 앓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아직 암이 주변이나 다른 장기에 퍼지지 않아서 항암치료 없이 제거수술과 후속치료로 완치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이 지금 죽음에 이르는 절망적인 병에 걸린 지도 모르고 의미 없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믿음으로 산 사람들(마8:1-13)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아무 소망 없이 절망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두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나병환자입니다(마8:1-4). 당시의 나병환자는 의료적인 치료가 불가능한 사람들이었고 전염성이 강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 가정과 친구와, 동네에서 버림받고 성 밖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어쩌다 사람들이 있는 곳을 지나가려면 옷을 뒤집어쓰고 “불결!, 불결!, 불결!”을 외치며 불결한 자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 받을 기회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총회에도, 절기에도, 안식일 회당모임에도 참여할 수 없었으니까요. 정말 완벽한 절망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는 모든 절망 앞에 굴복하지 않고 절망을 넘어 예수께로 나갑니다. 예수님은 그의 모든 절망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유일한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 유일한 소망을 발견한 사람은 어떤 위험도, 환경도 무릅쓰고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말합니다(마8:2-3).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이 몹쓸 병을 고쳐달라고 하지 않고 “주께서 원하시면!”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는 단순히 치유를 넘어 그의 전 존재의 미래를 자신의 주인이신 예수께 완전히 믿으며 맡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받으시고 그를 치유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새 모든 삶의 절망을 뒤집어엎을 유일한 소망이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모든 환경을 뛰어넘어 그 주님께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무 소망이 없다고 여기는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마8:5-13).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집을 방문하거나 그들과 식사하거나 교제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백부장은 그 금기를 깨고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가 놀랍습니다. 자신의 천한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이 이방인은 모든 인종과 신분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앞서서 실천할 만큼 이미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에 응답하십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그런데 여러분, 이 이방인의 입에서 어떤 유대인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믿음의 고백이 선포됩니다(마8:8-9).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8:8-9)”
믿음은 완전한 절망에서 나옵니다. 자신에게 그 어떤 소망도 없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신에게 절망하며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절망한 사람이라야 오직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모든 환경을 뛰어넘어 주님을 붙잡고 순종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환경이 어려워서 기도하지 않는 것 아닙니다. 아직도 자신을 강하게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내 실력을 믿고, 내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산 사람들(롬1:14-1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죄에서, 사망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롬8:14-15)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 이제는 믿음으로 열매를 맺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4-17)”
로마교회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기 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롬1:8) 그런데도 바울은 로마에 가기를 원했고(13절), 로마서를 통해 다시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세워진 로마교회가 이제는 다시 믿음으로 성숙해지고 열매 맺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11-13절). 그렇습니다. 교회는 믿음으로 하나님 자녀가 되었지만 다시 믿음으로 날마다 새로워지는 “재복음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으면 이제 믿음으로 의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사는 것입니까?
날마다 복음의 은혜 앞에 빚진 자로 사는 것입니다(14절). 쥐꼬리 만 한 봉사해놓고 자랑하지 말고 다시 십자가 앞에서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한 것은 보이지 않고 빚진 것만 보입니다. 다 받은 것입니다. 빚진 사람은 자랑이 없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빚진 사람은 자기 공로가 없습니다. 다 내가 먼저 받은 것을 되갚는 것뿐입니다.
날마다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16절).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 능력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순교의 죽음 속에서 죽음보다 강한 부활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베드로가 두려워 저 로마에서 도망치던 길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다시 로마로 돌아가 그 고난의 십자가에서 나와 함께 계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듯이, 우리도 고난을 피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질 때 나와 함께 계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날마다 믿음으로 의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습니다(稱義). 그러나 이제는 다시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죄를 이기고,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며 우리의 삶에서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어느 날 여러 목사님들이 존경하는 노 목사님을 방문해서 한국목회자들에게 유언으로 남기실 말씀을 전해주시라고 부탁했습니다. 잠시 생각을 하신 후 말했습니다.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믿음이 없는 목사가 많고 믿음이 없는 장로가 많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일은 합니다. 봉사도하고 헌신도 합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의 감격은 잃었습니다. 첫 사랑을 잃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내 공로, 내 자랑이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차츰 고난의 십자가를 회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복음의 은혜를 도둑맞고, 복음의 능력을 상실했으며, 복음으로 의를 이루는 삶을 상실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으니 이제는 날마다 믿음으로 의롭게 사는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