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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9-1) - "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 / 오정석 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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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강림후(9-1) - "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 / 오정석 목사

관리자 2023-07-27 (목) 19:00 1년전 823  

1:8~17, 8:1~13, 1:1~8

 

한반도 곳곳에 깊은 상흔을 남기고 장마가 끝났습니다. 폭우로 인해 피해를 입은 우리 선한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전 국민의 따뜻한 사랑이 전해져서, 다함께 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성령강림 후 여덟째주일이었던 지난 주일에,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서로 섬기며 살아가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서로 섬기는 것이, 비로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섬겨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누가복음 2229절에서 들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 받은 것이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결국에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는 일은,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작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거저 받은 것이기에, 그 누구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언제든 섬겨야 하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았다는 신앙의 고백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스스로 크고자 하지 않고, 섬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어디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제자들에 이어서 오늘날 이 땅에 있는 수많은 교회들에게, 그리고 그 구성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현주소는 섬김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됐다는 믿음을 갖고, 높은 자리에서든, 낮은 자리에서든 그 기본 자세는 섬김의 자세여야 하고, 서로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후 아홉째주일입니다.

오늘도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섬김과 생명 살림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맡겨진 하나님 나라 사역을 합니다.

마태복음 82, 3절을 읽읍시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 이후 기적을 베푸신 첫 번째 사람은 나병환자였습니다. 왜 나병환자였을까요? 우연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먼저 고치셨지만, 마태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먼저 나옵니다. 그 이유는 마태가 이 사건을 통해서 당시 유대인들에게 말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인과응보 교리에 의하면,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나병환자는 가장 악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살아있는 상태에서 살이 썩어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체를 지극히 부정한 것으로 여겨 멀리했는데나병환자는 살아있는 시체였던 셈입니다나병환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산송장이어서 유대인들은 그들이 가까이 오면 돌을 던져 때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병환자들은 사람들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 사역을 부여받은 예수님께서 누구를 제일 먼저 만나셔야 했을까요나병환자는 예수님께서 만나셔야 할 첫 순위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 이야기가 특별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교 율법상 접근 금지 명령이 내려진 나병환자를 다가오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어루만지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어루만지셨을까요? 사랑이 많아서? 이렇게만 생각한다면 본문을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정통신앙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알려주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손을 대셨습니다. 유대교 정통신앙에 의하면 나병환자를 가까이 갈 수도 없었는데, 손을 댄 것과 그가 즉시 깨끗하여졌다는 것은 유대교 정통신앙이 잘못되었다는 증거였고, 또 유대교 정통신앙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 한 나병환자의 치유는, 한 개인의 질병을 치유하신 기적을 행하신 의미 이상으로, 유대교 정통 신앙의 그릇됨을 드러냄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 예수님은 한 사람을 만납니다.

5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유대인에게는 선민사상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민족 중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자신들만 선택받았으며, 다른 이방인들은 선택받지 못한 지옥의 땔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아예 상종하지 않아서 이방인의 집에는 들어가지 않았고 이방인을 집 안에 들이지도 않았습니다. 꼭 만나야 할 일이 있으면, 집 밖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이면서 동시에, 당시 자신들을 식민 지배하던 로마인 백부장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에 걸리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 사역이 나병환자였다는 것이 우연이 아니었듯이, 이 또한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왜 로마인 백부장을 만나셨을까요? 그리고 선뜻 나서시면서까지 왜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을까요?

 

이것은 앞선 나병환자를 치료하신 사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릇된 선민의식과 인과응보 교리라는 유대교 정통신앙을 고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맡겨진 하나님 나라는 병든 자든, 이방인이든 제한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 사건에서 로마 백부장을 좀 더 조명합시다.

10, 11절 말씀을 읽읍시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직접 백부장의 집에 가서 하인을 고쳐주려고 하자, “유대인인 주님께서 이방인인 제 집에 오실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으로만 하셔도 제 하인의 병이 나을 것입니다라는 로마 백부장의 말을 들으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로마인 백부장! 그는 누구였길래, 그리고 무엇을 행했길래,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없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는다고 하셨을까요?

무엇이 믿음인지, 하나님을,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는 것이 제사이며 금식이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반대로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인이라고 낙인찍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로마 백부장은 자기 자식이나 가족도 아닌 중풍병에 걸린 하인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 포기되지 않는 마음, 포기할 수 없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서 비록 자신의 집에서 일을 하는 하인임에도 불구하고, 신분 지위에 따라서 차별하지 않고, 누구나 골고루 행복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하며, 인간의 존엄을 지켜주려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일을 하다가 중풍병에 걸린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를 살려내려는 간절한 마음. 이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나면 하인이 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에 걸린 하인일지라도 자신의 일처럼 여기면서, 간절히 회복되기를 바라고, 회복시키고자 동분서주 했던 백부장을 외면하지 않았고, 외면할 수가 없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한가지 이어서 상상을 하면, 고침을 받은 백부장의 하인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지만, 아마도 이 하인은 새로 얻은 생명으로 또 다른 생명을 살려내는 삶을 살았을 것 같습니다.

 

오늘 로마서 말씀을 보면, 바울은 지속적으로 믿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믿음에 대한 내용인 6번이나 반복됩니다.(8, 12, 16, 17)

바울이 말하려는 믿음이 무엇일까요?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바울만의 독자적인 믿음을 말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의 믿음과 바울의 믿음이 다른 것이 될 테고, 성경 안에는 두 개의 믿음이 있게 되는 모순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믿음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어떤 믿음일까요? 바로 이스라엘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로마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너와 나 할 것 없이 아픔의 현장에서 외면하지 않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 안타까워하는 마음, 포기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마음, 그 간절한 마음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바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랫 사람이든, 윗 사람이든, 나그네든, 고아든 과부든, 병자든, 건강한 자든, 이념과 사상으로 나뉘어 있든, 동과 서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든, 지구 이편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든, 지구 저편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든, 남자든, 여자든...

이 세상에 있는 차별과 갈등과 전쟁을 끝내고, 신음하는 온 피조물을 긍휼히 여기며, 안타까워하고 아파하며 포기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이런 모든 문제를 내 문제로 끌어안고 예수님께로 나아오면, 반드시 예수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시리라는 믿음이야말로 온 세상을 살리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을 살려내고자 몸부림치는 이 믿음보다 더 큰 믿음이 있을까요? 과연 이 믿음을 부끄러워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유대교 정통신앙에 매여있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믿음에 대한 정의가 바뀐 바울은,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바울은 이방지역에 가는 곳곳마다, 최고의 복음, 최고의 믿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피조물을 살려내는 최고의 가치이기에 어떤 어려움이나 방해가 있다고 할지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 말씀을 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다 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시기를 배은망덕의 시대이라고 평가합니다.

4절 말씀을 읽읍시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도대체 유다는 어떤 모양이었을까요?

이사야 선지자가 고발하는 유다의 죄목은 아모스가 고발하는 죄목과 같습니다. 가난한 자들, 힘없는 자들을 돌보는 것은 철저히 외면한 채, 절기는 성대하게 치루고, 하루에도 수차례 예배를 드리며 제물을 많이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땜질을 하려는 것이 죄목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나 아모스 선지자는, 망하지 않고 죽지 않고 살려면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목이 터지도록 외칩니다. ,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며 그들을 돌보며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기쁨이라며 통곡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복음서의 한 나병환자의 치료와 로마 백부장의 믿음으로부터 시작해서, 로마서와 이사야 말씀까지를 두루두루 보았습니다.

오늘 나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점검해 봅니다. 자신의 삶의 여유로움에 취해서, 나의 선한 이웃의 아픔과 설움은 외면한 채,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고 자부할 수 있었는지 분명히 되짚어봐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아서 이 세상에 오신 독생자 예수님은, 분명 자신의 집에 있는 하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안타까워하며 회복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백부장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당시 거대 제국의 중심지인 로마 안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면서, 이 믿음이 로마 뿐만 아니라, 세계를 살릴 수 있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 나라의 믿음과는 동떨어진 형식적인 예배에 빠져 사는 유대인들이 돌이키기를 절규하며 외쳤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예수님께 인정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의 곳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과 마음과 믿음이 응답되는 현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하나님의 사랑의 절규로 받아들여서,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킬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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