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 22:24-30, 사 32:1~4, 16~18, 계 11:15~19
“누가 큰가?” 이 질문은 단순한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면서 평생토록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질문은 한 생명이 이 세상에 나오면서 가장 먼저 받는 질문입니다. 부모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무엇보다 이 아기가 정상적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봅니다. 특별한 장애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면 그 다음에 몸무게는 얼마나 되는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아기가 크게 나왔는지, 작게 나왔는지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심은 지극히 정상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숨을 돌리고 나면 부모들은 자기의 아기를 다른 아기와 비교합니다. 자신과 가까운 친구나 친족의 자녀들과 비교합니다. 이렇게 비교하는 그 밑마음에는 이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 아이와 다른 집 아이를 비교하면서 질문합니다. “누가 큰가?” “누가 더 무거운가?” “누가 더 건강한가?” “누가 더 튼튼한가?”
부모의 질문은 자녀가 자라면서 더 세부적으로 발전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누가 더 공부를 잘하나?”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아무런 구김살 없이 밝게 커야 하는데, 아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질문이 이 질문입니다. “누가 더 공부를 잘하나?”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이 질문에 주눅이 들고, 많은 고통을 강요당합니다. 물론 이 질문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거의 뒤에서 맴도는 아이들을 보면 배짱이 좋습니다. 자기 뒤에도 몇 명 있다고 큰 소리를 칩니다.
하지만 “누가 더 공부를 잘하나?”라는 질문은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 질문이 됩니다. 이 질문은 “누구의 시험 성적이 더 좋은가?”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의 결과에 따라 취직이 결정되기 때문에 심각한 질문이 됩니다.
“누가 더 공부를 잘하나?”라는 질문은 “누가 더 능력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현실적으로 능력에 대한 문제는 한 개인의 삶에 아주 중요합니다. 직장이나 일터에서 승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다른 동료들이 승진하는 것을 볼 때, 자신과의 경쟁에서 자신을 이기고 올라서는 것을 볼 때, 능력에 대한 질문은 자신을 괴롭게 하기도 합니다.
“누가 더 힘이 센가?”라는 질문도 있습니다. 단순히 물리적인 힘을 쓰는 집단의 구성원들은 이 질문이 매우 중요합니다. 힘이 강약이 서열을 정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복잡한 집단에서도 이 질문은 중요합니다. 단순히 물리적인 힘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힘, 사회적인 힘, 정치적인 힘까지 고려됩니다.
경제적인 힘은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힘입니다. 물질이 많을수록 이 힘은 강해집니다. 수많은 대인관계에서 오는 사회적인 힘도 무시할 수 없는 힘입니다. 정치적인 힘은 종합적인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을 비롯해서,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 그리고 한 사회가 보유하고 있는 힘을 활용할 수 있는 총제적인 힘이 정치적인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누가 큰가?”라는 질문에서 조금 더 깊이 나아가려 합니다. 그것은 사람은 왜 “누가 큰가?”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누가 큰지를 묻는 것은 비교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큰가?”를 묻는 질문의 밑바탕에는 “사람은 왜 비교를 하려하는가?”에 대한 마음이 그 바닥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왜 비교를 하는가?” 성경은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인간의 죄가 드러나는 장면에서 비교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는 대신, 동생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 매우 불편해합니다. 그리고 화를 냅니다. 창세기는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 4:5하)라고 가인의 마음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제물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다면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순서입니다. 자신의 제물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그리고 그 제물을 드리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그런 다음에 다시 제물을 드리는 것이 순서입니다.
하지만 가인은 엉뚱하게도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동생을 죽였다는 것은 자신과 동생을 비교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비교가 극단적인 미움으로 이어졌고, 비교의 결과가 끔찍한 죄를 낳은 것입니다. 가인이 자신을 돌아본 것이 아니라, 동생과 비교하고 살인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성경은 비교하는 마음의 밑바탕이 욕심과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는 “죄가 너를 원하나”(창 4:7)라는 표현을 통해 가인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원한다”는 말에 쓰인 히브리단어 “테슈카”가 쓰였습니다. “테슈카”는 인간의 깊은 욕망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죄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깊고도 질긴 욕망이 하나님과의 관계도 왜곡시켰고, 아벨과 자신을 비교하게 하고, 결국 아벨의 목숨까지 빼앗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욕망(테슈카)의 기원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창 4:7)와 똑 같은 형태의 기록이 “너는 남편을 원하고”(창 3:16)에 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에 대해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와는 남편을 향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와의 욕망은 새롭게 생겨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와가 하나님과 자신을 비교하는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뱀이 하와에게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유혹한 것은 하와에게 있는 죄 된 마음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같이’라는 표현은 비교하는 마음에서 옵니다. 하와의 마음속에는 아주 대담하게도 하나님과 자신을 비교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 비교심은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큰가?”라는 질문은 이처럼 인간의 원죄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 본문에서 제자들이 이 질문을 놓고 다툼이 있었다는 것은 이 세상이 처해있는 죄 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섬김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다고 하셨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섬기는 자”로서 제자 들 중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섬기는 자”란 실제로 시중을 들고, 심부름을 하는 등, 종의 신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다투는 제자들을 보면서 섬김과 겸손에 대한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보좌’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특별한 이유는 22장 26절과 27절에 언급된 ‘섬김’에 대한 말씀과 22장 30절에 ‘다스림’에 대한 말씀이 서로 반대가 되고 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보좌’는 왕들이 앉는 높은 자리를 말합니다.
제자들이 볼 때, 왕들이 앉는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고 통치를 한다는 것은 대단히 매력적인 일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야말로 제자들이 그동안 바라고 바라던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온 일이 극적으로 보상받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보상받는 일에 관심을 나타낸 적이 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 베드로를 비롯해서 다른 제자들이 “누가 큰가?”를 질문하면서 서로 언쟁을 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보좌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9장 2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영광의 보좌”라는 표현은 예레미야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렘 14:21) 그런데 우리가 깊이 살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간구는 심판을 구하는 청원이 아니라 용서를 구하는 청원입니다.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심판을 하는데, 이 심판이 실은 용서를 구하는 청원과 같은 맥락에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과 용서는 본래 서로 모순적입니다. 양립할 수 없습니다. 심판하면 용서할 수 없고, 용서를 하면 심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한 번에 이루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이 세상 모든 죄의 심판을 대신 받으셨고, 이렇게 하심으로써 세상의 모든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 지파를 다스리고 심판한다는 것은 세속적 의미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는 권력과 실세를 갖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보혈을 흘리신 것처럼, 이웃과 형제자매의 죄로 인해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로 가는 일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큰가?”를 묻고 이로 인해 서로 양보 없는 다툼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정반대의 길로 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는 일만이 진정한 겸손이요, 섬김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에서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를 하고, 방백이 정의로 다스린다”(사 32:1)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참된 섬김과 겸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섬김과 겸손만이 화평을 가져오고,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는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사 32:17)
요한계시록에서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을 하시리로다.”(계 11:15)라고 말씀하신 것도 결국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세상이 무릎을 꿇는 사건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권위는 세상적 군왕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철저한 사랑과 그 사랑에 의한 대속적 사랑만이 참된 겸손이며 섬김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