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욘 3:1-10, 행 16:6-15, 마 28:16-20
똑똑한 평화, 손해 없이 실속 챙기는 화해는 찾을 수 없습니다. 화해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하고, 평화를 이루려면 마음속을 끝없이 비워야 합니다. 잠시 낭만적인 연애는 있을지 몰라도 평생 로맨틱하게 사는 부부는 없습니다. 매순간 자신을 죽여야 평생 해로하며 삽니다. 평화는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싫어도 하는 것입니다. 화해는 이득을 보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약 없이 희생하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는 바보 같은 사람이 하는 것이요 화해는 가장 미련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6.25 73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우리 교단이 한국전쟁을 기념하는 주일을 민족화해주일로 지키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입니다.
우리나라 산에 가장 많이 서식하는 나무는 소나무와 참나무(도토리, 상수리나무)입니다. 어릴 때, 식목일이 되면 사람들은 산에 소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그래서 소나무가 많습니다. 그런데 참나무는 놀랍게도 다람쥐가 심었습니다. 우리나라 온 땅 구석구석에 심겨진 참나무는 다람쥐의 공로 때문입니다. 겨울이 다가오면 다람쥐는 겨울준비를 하려고 도토리를 주워 입속 양 볼에 가득 찔러 넣습니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땅 속에 숨겨둡니다. 낙엽 속에 숨기면 썩으니까 낙엽을 걷어내고 땅을 파서 한 알씩 저장합니다. 그런데 다람쥐는 영리하게 생긴 모습과는 달리 머리가 나빠요! 그래서 10개를 저장하면 하나밖에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봄이 되면 온 산에 다람쥐가 숨겨두고 찾지 못한 90%의 도토리에서 싹이 나고 잎이 돋아나서 온 산마다 참나무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바보 다람쥐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산 반쯤은 벌거숭이 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통해 선교하시는 하나님(욘3:1-10)
오늘 구약 본문 욘3:1-10은 선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똑똑한 의인, 말짱한 정신을 가진 사람을 부르지 않고 말도 안 되는 하나님 나라의 뜻에 어쩔 수 없이 순종하는 정신 나간 사람을 통해 이루어 가십니다. 스스로 의로운 자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걸으며 결국 자신의 왕국을 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제정신을 포기하고 스스로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복종시키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 가십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요나를 부르셔서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내리시지만(욘3:1-10),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반대 방향에 있는 다시스로 갑니다. 원수들을 살려내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들이 망해야 우리가 살고 우리가 살려면 그들이 망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것이 말짱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의 길을 막으십니다. 큰 풍랑이 일어나 그가 탄 배가 좌초될 위기에 빠지게 하고, 스올같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하셔서 3일 동안 죽음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돌이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니느웨에 회개를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선교는 이 길이 맞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는 길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통해 행하십니다.
누가는 베드로가 주님의 제자가 된 결정적인 계기가 베드로의 실패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임을 증언합니다(눅5:1-11). 그날, 평생 갈릴리바다에서 뼈가 굵어온 베드로가 밤새 물질을 했지만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날은 밝았고, 고기들이 이동하는 골든타임이 한참 지났을 때, 베드로는 그날 조업을 접었습니다. 배를 대고 그물을 씻었습니다. 상황 끝! 이제 빈손으로 집에 가야할 그때, 예수께서 해변에 모인 수많은 군중들을 가르치기 위해 베드로의 빈 배에 오르셨고 가르치신 후,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 지금은 고기이동이 없는 시간이며, 손으로 던지는 조그만 투망을 넓고 깊은 곳에 던지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놀라운 결심을 합니다. 그 말이 합당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말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그동안 어부로서의 경험과 능력을 다 포기하고 한 번 저분의 말씀대로 다시 던져보자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정신 줄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내 앞에 계신 분에게 인생 전부를 걸었습니다. 저분에게 한 번 미쳐보자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우리가 옳다는 여기는 일을 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 저분의 말씀을 따라 바보 같은 삶을 살아보자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말씀을 따라 시작하는 순간 그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목도합니다. 날이 밝은 환한 아침인데도, 깊은 바다인데도, 밤새 그물질을 한 바로 그곳인데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한 그곳에는 전혀 다른 새 세상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무릎을 꿇었고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스승 문익환 목사의 시를 소리 내어 읽어보고 싶습니다.
“역사를 산다는 건,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 이렇게 주장 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미련한 자를 통해 선교하시는 하나님(행16:6-15)
하나님이 주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보다 험하고 낮은 곳으로 나가기 위해 장벽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안전하고 편안한 울타리를 뛰어넘어 더 낮은 곳으로 험한 곳으로 가지 못하면 하나님의 선교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저 영광스런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의 장벽을 넘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셨다면 선교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의 장벽을 뛰어넘어 죄인에게로 다가오시기 위해 친히 죄인처럼 되어주셨습니다.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떠났을 때(행16:6-15), 자기의 고향이 있는 소아시아 지역, 그리고 1차 선교여행으로 복음의 뿌리가 있는 소아시아지역으로 가서 그들의 신앙을 굳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돌연히 그들의 방향을 돌이켜 마케도니아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생소한 곳, 연고가 없고 의지할 사람이 전혀 없는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아무 대책이 없습니다. 얼마나 미련한 일입니까? 그러나 미련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할 때 길이 없던 곳에 새 길이 열릴 것입니다.
북한과의 화해는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들이 옳아서 정당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하며 지속적으로 평화의 손을 내밀어야 조금씩 바르고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손해 보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화해의 손짓을 거두지 않아야, 어느 날 손잡고 싶은 날이 올 때 함께 마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한반도에 있어서 사랑과 평화는 사명을 넘은 생존의 문제입니다. 북한은 결코 핵을 포기안합니다. 핵 외에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부유한 나라들은 핵을 가져도 쏠 수가 없습니다. 서로 잃어버릴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북한은 못 버릴 게 없습니다. 북한이 다소 미숙하고 거칠게 대응한다고 같이 화내고 다투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가장 멍청한 일입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피차에 멸망에 이르는 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신실한 자를 통해 선교하시는 하나님(마28:16-20)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선교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엑수시아)로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말씀 마28:18에서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승천하시는 예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온 우주적인 통치의 권세를 주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19-20)” 할 때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선교는 우리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교사명을 감당하는 교회에게 모든 장벽을 뛰어넘도록 그의 권능을 주십니다. 이 권능은 권세, 권위(엑수시아)이며, 정확히 말하면 권한입니다.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일정한 한도 내에서 정해진 목적에 합당하게 쓸 수 있는 능력인 것입니다. 회사에서 그 회사 책임자에게 법인카드를 줍니다. 책임자에게 위임된 일에 맞도록 사용할 수 있는 카드입니다. 마음대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에 맞게 그에게 부여한 권한 안에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카드로 얼마나 많은 부정한 일들이 벌어집니까? 하나님께 받은 온 우주를 통지할 수 있는 이 놀라운 권세와 능력을 예수님께 주셨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선교의 사명을 위해 그 권한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아 이 권세는 크고 놀라운 권세입니다. 감옥 문을 열고 착고를 풀 수 있는 권세입니다. 큰 풍랑 중에도 배를 지켜주시는 권세입니다. 독사가 물어도 멀쩡하게 살아나게 하시는 권세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이 권세를 통해 병도 낫고 문이 열리고 자녀들이 뻗어 나가고 건강을 얻으며 놀라운 기적과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내 맘대로, 임의로 할 수 있는 권세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교하라고 주시는 권세요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라고 주신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권한으로 내 욕망대로 교회 크게 짓고, 은혜 받아 잘 먹고 잘 살고, 내 마음 껏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실하고 정직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한 달란트처럼 작은 권세라도 바르고 성실하게 사용하는 사람에게 더 큰 은사와 권한을 부여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첫 추수공동체인 교회에게 주신 지상명령은 “제자 삼으라”는 명령입니다. 전도는 제자삼기 위한 첫 단계일 뿐입니다. 제자는 단순히 교회에 나오는 교인이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권위에 순종하는 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 세상에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 지배를 받는 자가 아니라 다스리는 자, 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입니다. 아! 예수님을 따라다는 무리들은 인산 인해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다 흩어졌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제자공동체만 성령 받고 죽도록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 화해를 이 땅에 실현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