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행 16:6~15, 마 28:16-20, 욘 3:1-10
1. 오래전 목회하던 교회에서 비행기조종사 교육을 받던 집사님이 계셨는데, 그 집사님으로부터 경비행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때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큰 비행기도 그렇지만, 작은 비행기들도 요즘은 계기비행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계기비행(instrument flight rule)이라고 하는 것은 활주로를 이륙할 때부터 관제소의 지시에 따르고, 관제시스템(control system)의 통제를 받아 비행하는 것입니다. 아무 곳이나 비행하고 싶은 곳을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도 비행기들이 다니는 길들이 있다고 합니다.
2. 계기비행이 있다고 하면, 또 하나는 시계비행(visual flight rules)이 있다고 합니다. 주위를 돌아보고 날씨가 좋고, 시야가 좋으면 수동으로 하고, 비행 중에 자신의 시야에 의존해서 비행하는 방식입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좋긴 한데, 날씨가 좋아 지나가는 비행기들을 볼 수 있으면 좋은데, 사고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3. 특히 악천후를 만났을 때, 계기비행을 해야 하는데, 많은 아마추어가 시계비행을 선택하기 때문에 사고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시각 능력이 제한되어 있고, 상황과 환경에 따라 잘못보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것을 무시하고 비행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자신을 믿고, 자신의 판단을 옳다고 너무 믿으면 사고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항공전문가들은 많은 소형 비행기들이 먹구름이나 악천후의 위험 속에 있을 때, 단지 마이크를 들고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라고 말하면 추락사고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조종사들은 자신의 능력과 경험을 믿고 시계비행을 한다고 합니다.
4. 이 이야기는 비행기 조종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옳고,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인생을 시계비행을 하다보면 올바른 목적지까지 못갈 수 있습니다.
5.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판단에 따라 시계비행을 하며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요나입니다.
6. 요나는 하나님께서 “큰 성 니느웨 성에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주님의 얼굴을 피하여 스페인으로 도망가려고 욥바에 내려가 배를 타게 됩니다.
7. 요나 생각에 그 니느웨 성에 말씀을 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니느웨는 이방민족,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니느웨는 많은 죄를 지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 민족이 심판을 받고, 벌을 받아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8. 하나님께서 그에게 니느웨 땅에 가서,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하라고 하셨음에도, 요나는 자신의 판단을 더 확신하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니느웨 반대편인 스페인으로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9. 오래전 어느 사진을 보니,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그들이 누구인가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누구인가를 정의하는 것이다. (Judging a person does not define who they are, it defines who you are.) 상대방 때문에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으로 상대방을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10.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과 판단을 했고, 그들은 결과적으로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위의 말로 한다면, 요나는 그들이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죄인들이 죽어야 한다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11.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게 하시고, 물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런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수중영적수련회, 부흥회를 갖게 됩니다. 그곳에서 자신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요나는 물고기에 의해서 뱉어지게 됩니다.
12. 그리고나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또 다시 요나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 그 성읍에 외쳐라.”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는 것이고, 요나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외치라고 합니다.
13.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여러 인식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교회 혹은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완고함입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교회와 기독교의 삶은 절대 완고함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기준 혹은 가치의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는 공동체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14. 가치의 기준을 떠나서, 윤리 혹은 죄에 관계없이 진정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자비함이 없는,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 서보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완고한 마음, 좁은 마음을 가진 공동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공동체 중심주의 차원에서 교회의 세련된 십자가 탑은 올라가고 있지만, 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내려가는 마음 아픈 우리의 현실입니다.
15. 이런 상황 속에서 세상은 교회에 대한 희망을 잃기 시작했고,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입니다.
16.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시기 전 말씀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19, 막 16:15, 눅 24:36, 요 20:19) 그리고 승천하시기 전 선교의 명령, 위대한 도전을 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17. 이 위대한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제자들에게와 초대교회에게 주신 말씀이자,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시대의 교회들에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는 주님의 위대한 사명과 명령 앞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여 왔는지에 대한 증언과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18.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에서, 위대한 선교사였던 사도 바울의 또 다른 세상인 마케도냐 사역에 대한 증언과, 구약의 예언자요 주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교사(대언자) 요나에 대한 역사입니다. 이 두 선교사의 증언과 기록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 우리 삶의 현실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며, 어떤 선교적인 삶을 구현해야 할지를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선교의 구체적인 유형을 설명해 주면서 우리의 선택과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19. 구약의 요나와 신약의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공통점은 자신들의 삶의 현실과 전혀 다른 공간과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삶의 현실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믿음에서 가지고 있었던 관점에서 가고 싶지 않았던 지역에서, 자신이 정죄했었던 사람들에게 찾아가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선교적인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20. 주님께서는 요나에게 이방 민족, 자기 원수 국가인 앗시리아의 니느웨 성에 가서 회개를 촉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큰 성 니느웨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에 대해서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고 전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21.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에 회개를 촉구하는 것에 대하여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방민족은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자비가 주어져서는 안되는 이방민족인데, 도저히 회개의 말씀을 전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멀리 다시스로 갑니다.
22. 자신의 판단과 기준으로 이방민족을 정죄했었던 요나는 두 아들의 아버지(눅 15:11-32)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큰 아들의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완고한 큰 아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삶과 생각이 다른 두 아들을 품은 아버지의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우리 생각과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부르신 분의 마음과 뜻을 깊이 헤아려 전하고 섬겨야 합니다.
23. 자신의 삶과 완전히 달랐던 공간과 역사에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은 요나와 달리 두 아들을 품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주님은 만나 영접하기 전까지는 전형적인 요나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24. 이방인들은 절대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는, 하나님의 은총안에 있을 수 없다고 하는 투철한 신앙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총과 오래전부터 사도 바울을 통해 이루시려는 큰 뜻 가운데 주님을 만나 구원자 그리스도로 믿기 시작했을 때, 그는 전통적인 유대교(traditional Judaism)에서 우주적 유대교(universal Judaism)로 사고의 큰 전환을 합니다. 스승 가말리엘로부터 배웠던 우주적 유대교를 그의 삶에서 실현한 것입니다.
25. 사도 바울은 광풍 유라굴로와 같은 여정을 겪으면서 끝내 세상의 끝(행 1:8)으로 생각했던 로마에 입성합니다. 그는 주님의 약속(행 27:24)이 있었기에 그는 흔들리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담대함으로 마지막 영적 전쟁터와 같은 로마에 들어온 것입니다.
26. 주님께서 선교의 역사와 비젼을 선포하신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이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우리 선교의 비젼입니다.
27. 주님의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은 사도행전의 역사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한 선교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선교적인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삶에서 나에게 있어 예루살렘, 내가 감당해야 하는 온 유대, 사역을 펼쳐야 하는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을 기도하며 찾아,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할 거룩한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28. 이 주님의 말씀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 공동체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땅 끝에서부터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지로 허락해 주신 지금 여기의 땅을 예루살렘으로 받아들이고, 온 유대땅으로 받아들여 우리가 감당해야 할 복음의 사역을, 주님의 몸됨 교회를 세워나가는 헌신을, 힘들고 어렵지만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길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9. 이 시대와 역사에 부름받은 믿음의 일꾼들은 사도 바울이 경험하지 않았던 다른 문화와 삶에 들어가 담대히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 시대의 그런 다른 삶의 문화에 들어가야 합니다. 믿는 자들의 모임에만 집중했던 우리 자신과 교회가 이제 주님을 모르는 세상, 주님을 외면하는 세상, 교회를 비웃고 손가락질 하는 세상에 들어가, 그 세상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복음의 삶을 구현하는 선교사의 삶이 필요한 때입니다.
30. 우리의 땅은 복음의 일꾼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 새로운 땅인 사이버(온라인) 공간으로, 기후위기와 코로나 19와 같은 자연의 역습으로 다급해진 생명생태선교의 현장에, 인내 가운데 감당해야 할 북한과 남한 민족의 평화와 통일현장에, 각 삶의 현장을 바꾸어 나는 시민운동에, 그리고 선교지와 목회지로 부름받은 지역에 담대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지 않고 작은 촛불을 켜는 우리의 세상에 대한 섬김이 있을 때, 이 세상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31. 이제 주님은 이 시대와 이 땅에서 우리로 하여금 사도행전 29장을 증언하도록 인도하시고 힘주시며 도와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