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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2-2) - " 주의 사람 " / 이혜숙 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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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강림후(12-2) - " 주의 사람 " / 이혜숙 목사

관리자 2022-08-27 (토) 16:32 2년전 941  

본무) 고전 9:19~27, 5:27~37, 16:1~9 

  

며칠 사이에 날씨가 변해서 지낼 만 합니다.

알람을 맞춰놓고 시간에 따라 일을 하는 현대인들도 매일 아침이면 뜨고 저녁이면 지는 해와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나 건물 안에서 일을 하는 동안이나 밤에도 전기에 의지해 지내며 해와 달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흘러갑니다.

도시에서 봄은 여인들의 옷자락에서부터 온다고 하지요.

농촌지역에서는 눈을 감고 살지 않는 이상, 매일매일 변하는 나무들의 변화를 보면서 계절의 변화를 감지합니다. 특히나 봄에는 때를 맞춰 심은 씨앗들이 언제 눈이 틔여서 땅 위로 올라오는 지 보기 위해서라도 풀꽃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아야 하기 때문에 봄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잡풀이 먼저 나오네!” 조금 다르게 말하면, “이름 모를 꽃들이 피었네!” 여기에 한 마디 더 얹는다면, “심지도 않고 가꾸지도 않고 환영도 못 받으면서 뭘 그렇게 질기게 사냐?”

이 말을 전라도에서는 징허다야!” 단 한마디로 끝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정해진 때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르면 배나무가 사과 열매를 맺을 수는 없지만, 사람은 감자와 토마토를 한 나무에서 수확을 한다는 말을 들은 지가 벌써 수십 년 전인 것 같습니다.

사람의 능력이 하나님의 질서를 넘어서는 지경에 다다른 것일까요?

 

고린도서에서 바울이 더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하는 자기 삶의 형식을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을 잘 모르는 어떤 사람이 바울이 사는 모습을 보면 이해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자기를 나타냅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과 만나면 율법을 철저히 지킵니다. 율법을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굴레를 벗습니다. 약한 사람을 만나면 자기의 약함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그 사람의 종이 되어서라도 사람을 얻고 싶습니다.

사람을 얻어서 무엇에 씁니까?

바울은 지금 만나는 사람이 꼭 알고 찾게 되기를 바라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판이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례들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정치가들은 선거 때가 되면 사람을 얻으려고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절을 하기도 합니다. 절을 받는 상대가 누구이든 상관치 않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행사하는 투표권 하나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자기를 불살라 바쳐서 표 하나를 얻고, 당선 된 다음에 길거리에서 절하는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존심이니 자존감이니 따지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합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나는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 사람의 종이라도 되겠다!”

바울이 이방인과 만날 때에 율법에 철저한 유대인들의 눈에는 바울이 부정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어떠한 편견에도 꺾이지 않고 꿋꿋하게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우리들이 만나는 말씀은 간음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는 두가지 큰 주제입니다.

네가 배우자 외에 다른 사람을 취하는 것 말고, 너의 배우자를 버리는 것이 간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버림받은 사람이 속한 공동체에 섞여서 살려면 매우 어려운 지경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혼율이 올라가는 원인 중 하나를 여자들이 경제력을 가지게 된 것에서 찾습니다. 그만큼 여자들에게 경제생활을 할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여자들이 경제활동을 할 수 없도록 하면 이혼율이 낮아질까요? 현대는 그렇게 뒤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을 얻었으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과 나눌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얻은 사람을 버렸다는 것은 그 몸이 갈라지고 생명이 끝난 것과 같습니다. 버린 사람이나 버림받은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 몸을 쳐서 복종하는 것은 내가 사람을 얻은 후에 버림을 받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바울의 목적은 한가지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일입니다.

바울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주님의 신실하심과 사랑하심과 선하심을 알려줍니다. 바울은 오직, 주의 구원하심을 알려주기 위해 유대인이면서도 이방인처럼, 율법에서 벗어나는 데에 거리낌이 없으나 때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사람이 한 번 경험한 것은 잘 잊지 않습니다. 경험했다는 것은 몸이 익혔다는 것입니다. 처음 자전거를 탈 때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넘어지는 반대쪽으로 기를 써서 몸을 기울이지만 여지없이 넘어집니다. 그러다가 넘어지는 쪽으로 몸을 같이 움직였더니 넘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앞으로 나아갔던 경험을 한 사람은 자전거를 타는 데에 재미를 붙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믿는 이들을 박해했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을 한 이후에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16:1)는 말씀을 바울이 온 몸으로 살아냈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나쁜 짓을 해야겠다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못된 짓을 하는 사람도 자기 생각 안에서는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계획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된다고 자신을 속입니다.

사람의 계획은 언제나 자신에게는 최선이지만 주님께도 그럴지는 잘 모릅니다.

 

정치인은 표를 하나 얻기 위해 땅바닥에 엎드리고,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종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하나를 얻으려고 당신의 독생자를 사람 가운데로 보내셨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의 독생자 예수께서는 한 사람의 생명과 자기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맞바꿨습니다.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을 얻으려고 온 세계를 움직이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당신의 생명조차도 내어주며 섬기시는 분이 주님입니다.

 

그 한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러 가는 길에서 부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을 예배하려고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우리는 우리라는 공동체인 동시에 라는 독립인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부르셨듯이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듯이 나도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람이 된 나의 계획과 결정은 주님께 맡겨도 좋을 일입니다. 바울사도가 마지막까지 복음에 참여하기 위하여 달려가듯이 우리도 그렇게 달려갑시다. 끝까지 나를 부르시고 선택하시고 당신의 생명 안에 나의 생명을 초청하시고 하나가 되신 주님의 사랑을 믿고 주님과 화목한 성도가 되십시오.

배우자를 버리는 행위를 간음이라고 하였듯이 주님을 등지고 돌아서는 이는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헤어질 수 없는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봄이 되어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니 봄이라고 합니다. 주께 속한 사람은 주님을 보아야 봄입니다. 한 여름에 뜨겁게 주님을 만나십시오.

만나서 다시는 헤어질 수 없도록 주가 내 안에 내가 주안에 거하는 한 몸이 되십시오.

내가, 우리가, 주님과 화목함으로 이웃과 화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은총 안에서 기쁨누리는 주의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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