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해] 강림후(9-1) - " 믿음에서 믿음으로 " / 김은승 목사본문) 사 1:1-8, 롬 1:8-17, 마 8:1-13
다음 주일은 우리 교단이 평화 통일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운데에는 실제로 일제 시대를 사셨던 분들이 계셔서 그 때의 삶이 어떠했는지 잘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우리 말 대신 일본 말을 배워야 했던 때에, 우리말을 썼다고 칼을 찬 선생님에게서 매를 맞았다는 이야기는 제 어머니에게서 들었습니다. 전쟁의 막바지에는 모든 물자를 수탈당하고 젊은이들 마저 전장으로 끌려가 죽음을 당해야 했던 아픈 과거는 아직 우리 기억 속에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제주도를 비롯한 우리 영토 곳곳에 상흔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해방을 위해서 기독교인들이 가장 일선에서 일했던 것을 여러 역사적 자료를 통해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 고난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해방의 약속을 신뢰하면서 그렇게 헌신한 결과로 오늘 우리는 이 평화의 세월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역사의 산 증인이 오늘 이 자리에 함께 계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소리, 하늘의 소리를 듣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베풀어 주신 이 은혜를 늘 기억하고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찢어진 한반도, 갈라진 우리 민족의 현실을 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합력해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인하고, 이 민족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을 평화 통일주일로 정하고, 이 일을 위하여 간절한 심정으로 마음 합하려 합니다. 반드시 이루게 하실 통일의 내일과 평화의 이 땅을 위해 늘 소망 가운데 기도하고 힘쓰는 우리 민족, 우리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배당에 왔을 때 내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으면 순간 당혹스럽습니다. 말은 안해도 서로 누가 어디에 앉는지는 다 아는데, 이를 모르는 처음 오시는 분이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조금 당황하게 됩니다. 그럼 어디에 가서 앉을까 하고 찾게 되는데, 도통 마음에 딱 드는 편안한 자리가 없습니다. 그만큼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이든 심정적이든 사람의 마음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미국의 한 목사님이 자기가 만났던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한 사람은 뉴욕 거리의 bag woman이라 불리는 거지였습니다. 대개 거지들이 쇼핑백을 들고 다니는데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이 여인은 정해진 거처가 없어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거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스페인의 한 성당에서 만난 할머니였습니다. 그 분은 정해진 시간에 예배당에 나와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함께 나온 할머니와 화음을 맞추어 일정 시간을 찬양한 다음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은 예배당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봉사활동이었습니다. 거지 여인은 어디에도 정을 붙일 수가 없었던 반면, 스페인 할머니는 이 예배당에서 삶의 의미와 평화를 회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1] 사실 이 땅에서의 물리적 공간이 하늘과 통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도 다 다릅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의미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자기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깨닫고 어거스틴 수도사들의 수도원을 찾아갔습니다. 하늘에서의 자기 자리를 보장해 줄 이 땅의 장소를 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루터는 그 곳에서 마음의 안식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을 찾아 떠나갔습니다. 반면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이라는 분은 “나는 하나님께 속해 있는데, 세상에서 이곳이든 저 곳이든 다를 바가 무엇인가?” 하고 말하면서, 수도원 생활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어떤 특정 장소가 하나님의 현존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믿음의 자리를 찾지 못하면, 우리는 거지 여인처럼, 또 한 때의 루터처럼 영적인 방랑자가 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시작된 곳은 어디입니까?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의 그 빈 무덤과 제자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던 갈릴리 바닷가, 그리고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달려가다 예수님을 만났던 다메섹 도상을 믿음이 시작했던 장소로 꼽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자리는 교회 예배당의 뒷자리 일수도 있겠고, 병실, 교실, 기도하던 다락방일 수도 있겠습니다. 야곱이 가장 불안에 휩싸였던 시기에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이 그 후로도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가는 장소가 되었던 것처럼(창35:3), 여러분 또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소통하는 그런 공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은 심리적인 문제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특정 장소에서 모든 사람들이 같은 체험을 한다면 그 장소의 영적 의미를 인정할 수 있겠지만, 사람마다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은 개인의 심정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세계는 허구적인 심리의 세계가 아닙니다. 분명 영적 각성이 일어나고, 변화가 생기는 공간입니다. 세계관이 달라지고, 영적 에너지가 충만해져서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공간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논리적으로 이해시킬 수 없어도, 우리는 신앙의 놀라운 능력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 또한 이 믿음의 세계에 대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말로 밖에는 설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서기 250년 경에 활동했던 랍비 심라이(Simlai)는 이렇게 말했습니다[2]. “모세는 613개의 율법을, 다윗은 열 개의 율법, 이사야는 두 개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었는데, 하박국은 1개의 율법을 주었다. 그것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하박국2:4)’ 하는 이것이다.” 오늘 본문의 바울 사도 역시 이 말씀을 가리키면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선지자와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환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심정적인 것도 아니고, 자기 합리화도 아닙니다. 이 믿음은 우리 삶 속으로 들어와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현실화 되고, 그래서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현실적으로 지배할 뿐만 아니라 더욱 강력한 에너지로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두 가지 차원에 대해 살펴 보십시다. 첫째로, 믿음은 신뢰입니다. 이것은 내 안에서부터 하나님을 지향하여 나아가는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셨다는 데에까지 이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거짓이 없다는 것과 그래서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 때에 참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늘 지켜보시고 고난 가운데에서 구원하여 주실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것도 우리는 믿습니다. 이런 개별적인 믿음의 내용을 수 만 가지로 열거할 때에 그 근저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신뢰를 바탕으로 교제가 시작됩니다. 사랑도 시작됩니다. 마치 부모는 아이가 제 자식인 줄 알아도, 아이는 부모가 자신의 친 부모인지 알 수 없음에도, 아무런 의심 없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이 출발점이 흔들리면 그 관계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아니 첫 출발부터 모든 것이 와해되고 맙니다. 어릴 적에 친부모를 찾아가겠다고 울면서 집을 나갔던 것은 한 편으로는 농담거리이지만, 이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 출발점인지를 잘 알려주는 이야기 입니다. 루터가 그토록 찾았던 그 신뢰의 출발점이 여러분에게 확고하게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특정 공간이나 특정 시점에 내 믿음을 한정시키는 것은 지극히 옳지 못한 일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만남을 고백하고 그 믿음의 여행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루터의 멘토라 할 Staupitz 라는 분은 루터에게 ‘남들은 다 이곳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데 너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거룩한 삶(justification)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외부적인 요소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라고 질책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깨달음과 결단이 의미없는 일로 제한 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직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평화로운 믿음의 삶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은 응답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 때에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사람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확신이 없는 사람은 갈등의 순간에 우왕좌왕 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로운 길, 사랑의 길이 앞에 놓여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쁜 응답입니다. 구체적인 순종의 삶으로 응답할 때 성도는 이미 믿음이 도착점에 서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성도들이 이미 하늘나라의 주인이 되었다는 믿음의 선포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능력은 이 말씀을 신뢰하는 자들로 하여금 이미 하늘나라의 주인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더이상 세상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구제의 손길이 이미 뻗어있는 사람입니다. 소외된 자들을 향한 발걸음을 이미 내딛은 사람입니다. 용서의 아름다운 언어가 이미 그 입술을 떠난 사람입니다. 이와같이 삶의 실천적 행위로 응답하는 자들을 통해 복음은 그 능력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로우심이 역사합니다. 이렇게 믿음의 경주는 신뢰에서 출발하여 응답의 결승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서 믿음을 시작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아는 것일 뿐입니다. 아는 것은 그 사실 자체로 끝이지만, 믿음은 그 때부터 시작입니다. 그 믿음의 역동적 힘을 이렇게 비유해 볼까요? 기원전 5세기 경 제욱시스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은 실물과 너무도 똑같아서 사람들이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파라시오스라는 화가와 누가 더 뛰어난 그림을 그리는 지 내기가 벌어졌습니다. 결전의 날에 제욱시스가 그린 그림을 펼치자 실물보다 정교한 포도 그림이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새들이 날아와 포도를 쪼아먹으려다 그림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제욱시스는 의기양양 했습니다. 그러자 파라시오스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펼쳤습니다. 그림에는 베일이 쳐 있었습니다. 그러자 제욱시스가 말했습니다. ‘이제 그 베일을 걷어서 당신의 그림을 보여주시오.’ 그러나 파라시오스가 그린 것은 베일 그 자체를 그림으로 그려논 것이었습니다. 제욱시스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습니다.[3]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제욱시스의 포도그림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파라시오스의 저 베일 뒤에 감추어진 제욱시스의 것보다 더 훌륭한 포도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말할 수 없는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고, 역동적으로 살아 숨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난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가장 힘들었을 때 위로해 주셨던 그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가장 외로웠을 때에 말 없이 곁에 계셔주셨던 그 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시는 내일을 향해 발을 내디뎌 보십시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리라](요한복음 8:31)” 하신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사랑하고, 인내하십시오. 용서하고 축복하십시오. 의로운 분노로 눈물도 흘리십시오. 그렇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여러분의 여정에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