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32:1-4. 16-18; 계 11:15-19; 눅 22:24-30
왜 하필이면
何必曰利? 왜, 어찌하여, 하필이면, 이익을 구하십니까? 맹자가 양혜왕에게 한 말입니다. 양혜왕은 어떻게 해야 나라에 큰 이득이 될지 맹자의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도자라면 모름지기 나라에 이익을 가져와야지, 손해를 끼치면 안 되지요. 어떻게 해야 손해 보지 않고 이익을 많이 낼까, 무엇을 해야 망하지 않고 흥할 수 있을까, 지도자는 늘 노심초사하지요. 그런데 맹자는 왜 하필 ‘利’를 말하느냐고 되묻고는, 다만 仁과 義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도자는, 왕은 마땅히 이익이 아니라 仁義를 좇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왕이 이익을 구하면 대신들도 이익을 구하고, 대신들이 이익을 도모하면 하급 관리들도 이익을 도모하고, 관리들이 이익을 탐하면 백성들도 모두 이익을 밝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게 아니라 큰 해악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지요.
요즘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세계가 혼란스럽습니다. 그런데 특히 미국이 완전히 헤매고 있지요. 일본도 말 그대로 엉망입니다. 그런데 왜 세계 최강이라는 나라들이 그렇게 작은 바이러스 앞에서 속수무책일까요? 대통령부터 참모들까지 이건 완전히 봉숭아학당보다 더하지 않습니까. 마스크 하나도 제대로 못 쓰는 지도자에게서 무슨 대책이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그 지도자들은 모두 (맹구에게는 참 미안하지만) 맹구들이라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그 사람들 모두 자신들이 전문가라고, 다 해봐서 안다는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그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 이익에는 계산이 똑 부러지는 무서운 사람들이지요. 자기 이익을 시쳇말로 ‘동물적 감각’으로 찾아내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정치적으로 잘 포장해서 ‘자국우선주의’라고 선전하고, 다른 말로 경제가 지고선이라고 강변하지요. 그들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내 나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한다며 속여서 표를 모으고, 국민은 내 이익만은 지켜줄 것이라 기대하면서 표를 주지요. 그렇게 해서 자기 권력과 자기 돈을 공고하게 구축하고 확대재생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익을 흠모하는 우상숭배는 허망하게 무너지고야 맙니다. 맹자가 이들을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할까요?
의의 열매는 평화
이사야는 참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예언자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참담한 시절입니다. 나라가 풍전등화처럼 위태한 때에, 코로나 못지않은 난제가 쌓여 있는데, 어떤 지도자가 나와야 할까요? 이사야는 그 고난의 시대를 헤쳐 나갈 지도자를 구했습니다. 이사야가 바라는 지도자는 백성에게 광풍과 폭우를 피할 수 있는 안식처 같은 지도자입니다. 광풍과 폭우가 무섭게 몰아치는데, 피할 수 있는 안식처가 있다면 얼마나 다행입니까? 또 이사야는 거친 광야에 흐르는 시냇물 같은 지도자, 백성에게 평안을 주는 지도자를 꿈꾸었습니다. 백성의 지독한 갈증을 풀어주고 평안하게 하는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사야는 뜨겁고 광막한 사막에서 그늘이 되어주는 시원한 바위 그늘 같은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광풍과 폭우를 피할 안식처요, 사막에 흐르는 시냇물이요, 이글거리는 햇볕을 막아주는 바위 그늘 같은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런 지도자일까요? 강력한 힘을 지닌 영웅, 삼손 같은 사람이 나와야 할까요? 백성을 광야 40년 동안 이끌었던 모세 같은 전무후무한 지도자면 될까요? 신출귀몰한 전략 전술을 구가하는 제갈공명 같은 모사가 절실할까요?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꿰차고, 첨단 기술을 섭렵하고, 영안이 밝아서 천문까지 읽어낼 수 있는 신선 도인이 필요할까요? 아예 신이 직접 내려오면 될까요? 위기에는 그런 초인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절체절명의 때에 이사야가 받은 말씀은 좀 의외입니다. “장차 한 왕이 나와서 공의로 통치하고, 통치자들이 공평으로 다스릴 것이다.”(1절) “의의 열매는 평화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17절) 고난의 시대에 이사야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우리가 마음에 새기고 품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혼돈과 고난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지도자는, 무엇보다 ‘공의’로 통치하는 지도자라는 말입니다. 가장 필요한 지도자, 우리가 세워야 하는 지도자는 ‘공의’로 다스리는 지도자, ‘공평’으로 다스리는 지도자입니다. 사실 이사야뿐 아니라 고난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거의 모든 예언자가 받은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는, 왕은 공의로워야 합니다.
그런데 ‘공의’로 다스리는 지도자는 또 어떤 사람일까요? 백성을 보는 눈이 멀지 않고, 백성의 소리를 듣는 귀가 먹지 않은 지도자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시고, 백성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신 것처럼, 지도자도 백성을 보고 백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서에서 ‘의’란 굶주리고 고통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듣는 데서 나옵니다. 성서는 이렇게 ‘보고 듣는 마음’을 곧 지혜라고도 합니다. 맹자가 말한 ‘의’도 ‘인’을 실천하는 ‘마땅한 삶의 길’을 말하지요.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긍휼한 사랑’을 실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음하는 히브리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출애굽 사건은, 곧 하나님의 의가 실현된 사건이지요. 세상의 의란 힘 있는 자들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만, 하나님의 의는 가난한 자들의 호소를 들으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평화는 다만 의의 열매입니다.
너희는 그렇지 않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말씀은 모두 잘 아는 이야기지만, 그러나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만찬을 나누었을 때 일입니다. 유월절 식사 민족의 해방을 기리는 식사지요.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각자 꿈이, 꿍꿍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메시아의 자리에 오르시면, 그때 자기들도 자리 하나쯤은 차지하리라는 기대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왕위에 오른다면, 과연 누가 가장 큰 자리에 앉게 될까요? 정말 궁금하지요. 예수님이 왕이 되신다면, 그 오른쪽과 왼쪽에는 누가 앉게 될까요? 왼쪽이 높을까요, 아니면 오른쪽이 더 높을까요? 이거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오늘 본문 후반부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왕권을 약속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내게 왕권을 주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에게 왕권을 준다고, 확실하게 말씀하셨지요. 우리 예수님은 한번 준다면 반드시 주시는 분 아닙니까?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왕권을 주신다니, 얼마나 시쳇말로 대박 사건입니까? 실제로 신천지에서는 치열한 경쟁을 물리치고 ‘왕권’을 따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그 왕권도 아주 구체적인 것이어서, 자신이 프랑스 파리를 다스려야 할지 이탈리아 로마가 좋을지, 심각하게 고민한다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 그 왕권이 뭔지 알기나 하는 걸까요? 예수님이 주시는 왕권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서로 높은 자리를 다투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신 차리고 잘 들어봅시다. 25절입니다. “뭇 민족들의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한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다.” 무슨 말씀입니까? 세상의 왕권은 위에 군림하고 행세하는 왕권이라는 거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권이란, 높은 자리에 앉아서 군림하고 지배하고 행세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군림하고 지배하고 행세하고 싶어서 권력을 탐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너희는,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왕권은, 예수님이 주시는 왕권은, 그런 세상의 왕권과 다르고, 달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지금까지 저 세상의 군림하는 왕권에 군침 흘리며 예수님을 따라온 거라면, 애먼 데다가 헛발질하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이거 정신 바짝 차려야겠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시는 왕권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하나님께 받으셨고, 또 제자들에게 주시는 왕권이란 어떤 것입니까? 26절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너무도 분명하고 직설적인 말씀을 굳이 해석하고 너절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예수님이 주시는 왕권이란, 가장 어린 사람 같이 되는 것, 가장 작은 사람 같이 되는 것,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가장 어린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참으로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왕권은 ‘군림하는 왕권’이 아니라, ‘섬기는 왕권’입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자들에게 쐐기를 박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27절이지요. “누가 더 높으냐? 밥상에 앉은 사람이냐, 시중드는 사람이냐?” 참 너무 어려운 질문인가요? 누가 더 높을까요? 세상에서는 누가 더 높다고 말합니까? 당근, 밥상에 앉아 있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그렇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시중드는 사람을 가장 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가장 낮은 졸개로 얕보는 것이다, 그 말이지요. 가장 작은 사람을 무시하고, 군림하고 지배하고 행세하려 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 가운데 섬기는 이로 계신 예수님에게 갑질을 하는 것입니다. 밥상에 앉아서 거들먹거릴 일 아니지요. 시중드는 사람에게, 함부로 할 일 아닙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은 실제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주시고, 잔을 나누어 주시고, 밥상 시중을 드시고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만 하신 게 아니라 실제로 제자들의 밥상에서 시중드셨고, 또한 우리의 밥상에서도 시중드는 분으로 계십니다.
예수님은 함께 시련을 겪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주시겠다고 하셨지요. 본문 30절입니다. “옥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하겠다.” 요한계시록에서도 그리스도가 권능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비전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계시록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통치는 무엇보다 ‘심판하는’ 통치입니다. 누구를 심판할까요?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계 12:18)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이 서는 날은 땅을 황폐케 하는 세상의 왕권이 심판받는 날입니다. 군림하고 지배하고 행세하는 왕권이 무너지는 날입니다. 교만하고 뻔뻔한 통치자가 쫓겨나는 날입니다. 일찍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이렇게 노래했지요.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눅 1:51-52)
함께 왕 노릇 합시다
일찍이 이사야는 고단한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공의로 다스리는 왕을 보내주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혼돈과 고통의 때에는 공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는 왕이 필요합니다. 지도자는 이익을 말하기보다 의를 말해야 합니다. 평화는 의의 열매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안전과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의로운 왕은 백성의 고통을 볼 줄 알고, 백성의 신음을 들을 줄 아는 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누구실까요? 밥상머리에서 하시는 행색으로 보면, 영락없는 우리의 식모, 집사 아닐까요? 아니지요? 이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왕의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저 세상의 거짓 왕이 아니라 진정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군림하고 지배하고 행세하지 않으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시는 왕, 함께 아파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는 왕이시지요. 우리가 고통스러워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어느새 우리 곁에 함께하시는 왕이십니다. 우리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밥상머리에서 떡을 떼어주시고 잔을 채워주시며 시중을 드는 왕, 설거지도 잘하시는 왕이십니다. 아니, 우리에게 빵을 떼어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당신의 살과 피, 당신의 온몸을, 당신의 온 생명을, 우리를 위해 찢기시고 내어주신 왕이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요람이 아니라 구유에 나신 왕이 아닙니까? 위압적인 군마가 아니라 새끼 나귀를 타신 왕이 아닙니까? 황제의 면류관이 아니라 가시 면류관을 쓰신 왕이 아닙니까? 그리고 옥좌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셔서, 마침내 카이저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의’를 이루신 왕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분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이분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에게 다른 왕은 없습니다. 도무지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참으로 놀랍고 또 두렵게도, 예수님께서는 이 진정한 왕권을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저 땅을 멸망시키는, 세상을 혼란케 하고 황폐케 하는 사탄의 왕권이 아닙니다. 땅을 살리고, 작은 풀꽃을 살리고, 지렁이도 살리고 땅강아지도 살리고 이름 모를 작은 풀벌레도 살리는,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온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왕권을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아야 할 왕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과 함께, 그리고 우리 모두 함께 왕 노릇을 하자고, 진짜 왕 노릇 한번 제대로 하자고 부르십니다. 의로운 왕, 섬기는 왕의 샘솟는 기쁨과 가슴 벅찬 행복을 함께 맘껏 누리자고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왕권이 다스리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그리스도가 다스리도록, 아니 그리스도가 섬기도록, 고요히 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