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2 3:10~4:11, 막 16:15~20, 행 28:11~31
1. 우리와 우리교회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않았던 코로나 19의 상황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류의 삶의 방식이 얼마나 문제가 있었는지를 깨닫게 해주고 고민하게 합니다. 인간탐욕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경고 앞에 우리 믿는 자들이 어떤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하며, 어떤 희생과 결단을 해야 할지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2. 주님의 뜻을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구현하려고 하는 목회자로서 이런 우리의 상황 속에서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의 사명과 사역 그리고 선교가 무엇인지, 그럴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진정 어떤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할지를 스스로 질문하고 고민하며, 더불어 세상의 쓴소리와 교회에 대한 진실한 애정을 품고 있는 지혜자들의 마음을 들으며 묵상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3. 위기의 상황이 되면 삶이 분명하게 보이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지 선명해집니다. 코로나 19라고 하는 거대한 구조적인 위기 속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와 세상이 생각하는 교회가 확연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목회자로서 부끄러움과 한없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여러 가지 감염의 중심이 되면서 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점점 떨어지는 우리의 현실이 마음 아픕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런 우리의 교회들에 대해서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보면 평상시 교회에 대한 세상의 인식이 어떠한지를 체감하게 됩니다.
4.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여러 인식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교회 혹은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완고함입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교회와 기독교의 삶은 절대 완고함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기준 혹은 가치의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는 공동체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가치의 기준을 떠나서, 윤리 혹은 죄와 관계없이 진정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자비함이 없는,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 서보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완고한 마음, 좁은 마음을 가진 공동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공동체 중심주의 차원에서 교회의 세련된 십자가 탑은 올라가고 있지만, 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내려가는 마음 아픈 우리의 현실입니다.
5. 이런 상황 속에서 세상은 교회에 대한 희망을 잃기 시작했고,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입니다. 2020년도 코로나 상황을 뚫고 지나가는 교회의 현실입니다.
6.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시기 전 말씀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19, 막 16:15, 눅 24:36, 요 20:19) 그리고 승천하시기 전 선교의 명령, 위대한 도전을 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7. 이 위대한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초대교회에 주신 말씀이자,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시대의 교회들에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는 주님의 위대한 사명과 명령 앞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한 증언과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8.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이자, 위대한 선교사였던 사도 바울의 마지막 사역에 대한 증언과, 구약의 예언자요 주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교사(대언자) 요나에 대한 역사입니다. 이 두 선교사의 증언과 기록은 우리가 지금 우리 삶의 현실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며, 어떤 선교적인 삶을 구현해야 할지를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선교의 구체적인 유형을 설명해주면서 우리의 선택과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9. 구약의 요나와 신약의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공통점은 자신들의 삶의 현실과 전혀 다른 공간과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삶의 현실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믿음에서 가지고 있었던 관점에서 가고 싶지 않았던 지역에서, 자신이 정죄했었던 사람들에게 찾아가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선교적인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10. 주님께서는 요나에게 이방 민족, 자기 원수 국가인 앗시리아의 니느웨 성에 가서 회개를 촉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큰 성 니느웨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에 대해서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고 전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에 회개를 촉구하는 것에 대하여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방 민족은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자비가 주어져서는 안 되는 이방 민족인데, 도저히 회개의 말씀을 전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멀리 다시스로 갑니다.
11.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중단되거나 포기되지 않습니다. 유대인 중심에서 니느웨성 사람들은 이방인이지만, 그들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이기에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해주시고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는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 주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회개의 촉구 없이 심판하시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12. 요나는 이런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아들의 마음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모르는 종의 마음이었습니다. 유연한 하나님과 완고한 그의 종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13. 배타적 민족주의를 가지고 있는 요나는 큰 성 니느웨에서 회개를 외친 후, 왕을 포함한 모든 성의 사람들이 금식하며 회개를 했을 때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음을 보게 됩니다.
14. 자신의 판단과 기준으로 이방 민족을 정죄했었던 요나는 두 아들의 아버지(눅 15:11-32)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큰아들의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완고한 큰아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삶과 생각이 다른 두 아들을 품은 아버지의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우리 생각과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부르신 분의 마음과 뜻을 깊이 헤아려 전하고 섬겨야 합니다.
15. 자신의 삶과 완전히 달랐던 공간과 역사에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은 요나와 달리 두 아들을 품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주님은 만나 영접하기 전까지는 전형적인 요나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16. 이방인들은 절대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을 수 없다고 하는 투철한 신앙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총과 오래전부터 사도 바울을 통해 이루시려는 큰 뜻 가운데 주님을 만나 구원자 그리스도로 믿기 시작했을 때, 그는 전통적인 유대교(traditional Judaism)에서 우주적 유대교(universal Judaism)로 사고의 큰 전환을 합니다. 스승 가말리엘로부터 배웠던 우주적 유대교를 그의 삶에서 실현한 것입니다.
17. 사도 바울은 광풍 유라굴로와 같은 여정을 겪으면서 끝내 세상의 끝(행 1:8)으로 생각했던 로마에 입성합니다. 그는 주님의 약속(행 27:24)이 있었기에 그는 흔들리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담대함으로 마지막 영적 전쟁터와 같은 로마에 들어온 것입니다.
18. 사도 바울은 세계의 수도인 로마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기회가 부여되었습니다. 실로 역사적인 무대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상황의 자유함 속에서, 복음의 자유함 가운데 주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전했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전했습니다. 이미 로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진 상태였습니다. 멀리 유대 땅에서 뿌려졌던 복음의 씨앗이 생명력이 있어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로마에까지 전해졌던 것입니다. 고넬료와 같은 이방인 크리스천의 거룩한 역할이 있었을 것입니다.
19.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전했을 때, 그 복음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완고한 유대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선포되며,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중심이 되어 진정한 온 세상, 땅끝에 전하는 선교가 이루어졌다는 위대한 선교의 역사를 증언합니다.
20. 주님께서 선교의 역사와 비전을 선포하신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말씀은 이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우리 선교의 비전입니다.
21. 주님의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은 사도행전의 역사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한 선교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선교적인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삶에서 나에게 있어 예루살렘, 내가 감당해야 하는 온 유대, 사역을 펼쳐야 하는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을 기도하며 찾아,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할 거룩한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22. 이 주님의 말씀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 공동체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땅끝에서부터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지로 허락해 주신 지금 여기의 땅을 예루살렘으로 받아들이고, 온 유대 땅으로 받아들여 우리가 감당해야 할 복음의 사역을, 주님의 몸 됨 교회를 세워나가는 헌신을, 힘들고 어렵지만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길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3. 이 시대와 역사에 부름받은 믿음의 일꾼들은 사도 바울이 경험하지 않았던 다른 문화와 삶에 들어가 담대히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 시대의 그런 다른 삶의 문화에 들어가야 합니다. 믿는 자들의 모임에만 집중했던 우리 자신과 교회가 이제 주님을 모르는 세상, 주님을 외면하는 세상, 교회를 비웃고 손가락질하는 세상에 들어가, 그 세상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복음의 삶을 구현하는 선교사의 삶이 필요한 땝니다.
24. 우리의 땅은 복음의 일꾼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 새로운 땅인 사이번(온라인) 공간으로, 코로나 19와 같은 자연의 역습으로 다급해진 생명생태선교의 현장에, 인내 가운데 감당해야 할 북한과 남한 민족의 통일 현장에, 각 삶의 현장을 바꾸어 나는 시민운동에, 우리의 역사를 바꾸어 나가는 검찰개혁과 사법개혁 그리고 정치개혁, 경제개혁에, 그리고 선교지와 목회지로 부름을 받은 지역에 담대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지 않고 작은 촛불을 켜는 우리의 세상에 대한 섬김이 있을 때, 이 세상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25. 이제 주님은 이 시대와 이 땅에서 우리가 사도행전 29장을 증언하도록 인도하시고 힘주시며 도와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