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욘 3:10-4:11, 행28:11-31, 막 16:15-20
2020년 들어 한숨 쉴 일들이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현재 세계적인 전염병의 만연과 함께 드러나는 혐오를 들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나아가 다른 것은 잘못된 것 없어져야 할 것이라는 혐오는 전염병과 함께 공동체성을 무너뜨립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을 쇠사슬로 묶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에 대해서 유대 밖 유대인들의 높은 사람들은 ‘어디에서든지 반대를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어디에서나 반대를 받는 사람의 말을 들어주려고 날짜를 정하고 모여 앉았습니다. 참 고마운 일입니다. 그 중 어떤 이는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증언과 예수에 대해 권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믿습니다. 물론 믿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이들의 뒤통수에 대고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으로 호통을 칩니다. <이 백성의 마음이 우둔하여 져서 듣지도 보지도 못하니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진 것을 알아라. 그들은 그것을 들을 것이다.> 바울은 죄수로 잡혀온 로마에서 여전히 죄수인 채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합니다. 바울에게 하나님 나라는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입니다. 그가 미련 없다고 했던 육체를 입고 있든, 그 육체를 벗었든 상관없이 바울에게 자유로운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을 누리는 곳입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않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곳’(고전15:53)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동행할 사람을 찾지만 오히려 그의 혈족들은 바울의 썩어지고 죽을 육체를 억압합니다.
묻고 싶습니다. 동족을, 이웃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아 죽음으로 내 몰면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런 질문조차가 어리석은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요나는 정말 싫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앗수르의 중심에 가서 하나님의 구원을 담보한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시는지. 요나가 그만큼 거부했으면 놓아두실 일이지 물고기 뱃속에서도 살아나게 하시는 하나님은 스토커를 방불케 합니다.
요나가 사흘 동안 해야 할 일을 하루만 했는데도 니느웨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났습니다. 이런 니느웨 사람들의 행동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돌이키시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돌이킴(ובשׁ)과 하나님의 돌이킴(נחם)은 다릅니다.
사람들의 돌이킴(ובשׁ)은 주로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는 표현에 주로 사용됩니다. 한편 하나님의 돌이킴(נחם)은 ‘미안하다, 위로하다, 참회하다, 뉘우치다’ 등 깊은 숨을 몰아쉬게 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사십일이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니느웨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보시고는 당신의 결정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들에게 내리기로 하셨던 재앙을 거두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변치 않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신앙생활을 했으나 하나님을 감동하시도록 하는 상황에서는 하나님도 마음을 돌리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미안해하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를 일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그 은혜가 싫습니다. 망할 나라는 망해야지. 지난 세월 이스라엘이 겪었던 고통을 잊는다면 이스라엘인이라고 할 수 없을 같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가기 싫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고 있다고 고백하는 우리의 삶은 요나의 생각과 얼마나 다를까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고, 해서는 안 될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럴까요?
하나님의 은혜는 있다가 사라지는 박넝쿨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니느웨 동편 언덕에 앉아서 하나님의 일을 감시하려던 요나에게 박넝쿨은 참 요긴했습니다. 언제까지나 앉아 있을 줄 알았는데 박넝쿨이 시들고 그늘이 걷히고 나니 태양은 먼저보다 더 뜨겁습니다. 요나는 말합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낫습니다.”
그렇습니다. 편안함을 경험하기 전보다 경험한 후에 느끼는 불편함은 더 큽니다. 박넝쿨을 줬다 빼앗은 하나님께서는 어느 개인의 필요가 아닌 함께 사는 공동체의 필요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사람.’ 그들은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니느웨를 멸망시킬 계획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요나의 목소리를 듣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쓰고 금식하겠다고 결단한 그 각각의 사람 뿐 아닙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방지축의 어린아이들을 때문에, 돈벌이를 위해 사고 팔리는 짐승들 때문에 니느웨를 멸망시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창6:6) 이 한탄하다가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돌이키다와 같은 단어(נחם)입니다.
하나님의 한숨 소리, 하나님의 깊은 숨소리를 지금도 들어야 하겠습니다. 민족과 민족 혈족과 혈족 사이에 갈등과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을 촉발시킨 중국인들을 향한 혐오는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로 변질되어갑니다. 그 뿐 아니라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요나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기로 작정한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박넝쿨을 거둔 것이 잘못된 일이라며 하나님께 따지고 드는 요나의 모습과 같아 보입니다.
그런 교회의 높은 담벼락 너머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נחם) 전달되어야 합니다.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그들, 그러나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위로를 선포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쇠사슬에 묶이더라도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는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신 사건을 통해 이미 알게 되었습니다. 배타적 복음은 복음일 수 없습니다. 전염병에 시달리는 전 세계인들을 향해, 사람 때문에 생명이 사위어가는 피조물을 향해, 어쩌면 내 생명을 지키느라 타인을 혐오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그들을 향해 또 폭력 앞에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약자들에게 하나님의 한숨소리, 미안해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져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의 구원을 전하기 위해 오늘날의 새 십자가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는 <세례>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형식에 얽매인 세례만이 아닐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옛적에는 새 방언을 말했지만, 이 시대에는 혐오의 말을 거두고 포용과 협력의 말을 해야 합니다.
뱀을 집어 올리던 그 능력의 손을 폭력을 무력화시키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병든 사람을 치료하던 그 손으로 숨어서 숨죽이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니느웨에 선포되었던 <사십일 후면 망하리라>는 긴박한 경고가 울려 퍼져야 할 곳이 많습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누리고 있는 주의 성도들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돌이키심을 선포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