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행 17:16-34, 욥 28:12~28, 요 8:31-38
사도 바울은 2차 선교여행에서 그리스 북부지역인 마케도니아를 거쳐 서기 50년 경 아테네에 도착하였습니다. 바울은 당시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였던 학문과 문화의 도시인 아테네의 아고라에서 예수님과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 아고라인 시장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아테네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를 전하는 사람 중의 하나 정도로 생각하였습니다. 아테네 철학자들은 차츰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고 마침내 바울은 아레오파고스에서 하느님에 대하여 말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바울을 아레오파고스로 불러서 그의 말을 듣기로 합니다. 아레오파고스는 “아레스 신의 언덕 또는 화성의 언덕”이란 의미이고,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 사이에 있는 해발 115m 정도의 언덕에 있습니다. 아레오파고스는 원래 아마조네스들이 살던 곳으로 현재는 아크로폴리스처럼 바위로만 이루어진 불모의 언덕이지만 한때는 고대 그리스의 원시의회와 법원 등이 들어서 있던 귀족들의 세력거점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철학자들의 쉼터로 유명하였는데, 제논은 그곳에서 토론을 하거나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하여 그의 후계자들은 “스토아 철학자”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아레오바고스는 그 언덕에서 소집되었던 아테네 공회의 명칭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재판관들은 재판을 진행하고, 교사 후보자들을 심사하여 임명하기도 하였습니다.
바울이 그곳에서 하느님을 전한 결과로 판사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부인을 비롯하여 몇 명이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돌무더기처럼 보이는 곳에 동판 하나가 보이는데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했던 바울을 기념하고자 사도행전 17:22-31절의 말씀이 헬라어로 새겨져 있습니다. 현재 그리스는 현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로서 예외적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있는데, 동방정교회에 속하는 희랍정교회입니다.
바울은 그리스 사람들이 종교심이 많다고 하면서 수많은 신상들과 제단들 사이에 “알려지지 않는 신들”을 위한 제단을 예로 들면서 하느님을 설명합니다. BCE 2세기에 살았던 역사가이자 지리학자인 파우사니아스는 올림피아에 “알려지지 않은 신들을 위한 제단”이 있다고 기술했습니다. 웅변가이자 철학자인 필로스트라토스에 의하면, 아테네에는 “알려지지 않은 신들에게도 영예를 돌리는 제단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기원 3세기에 살았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라는 저술가는 “이름 없는 제단들”의 기원을 밝혀 주는 한 가지 전승을 기록했습니다. 기원전 6세기나 7세기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그 전승은 에피메니데스라는 사람이 아테네에서 역병을 멈추게 한 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에피메니데스]는 양들을 몰고 ··· 아레오바고로 갔다. 거기에서 양들이 어디든 갈 수 있게 풀어 놓고, 사람들에게 양들을 따라가서 양이 멈추어 앉은 자리를 표시한 다음 그 각각의 지점을 관장하는 신에게 희생을 바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역병이 멈췄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아티카 곳곳에서 아무 이름도 새겨지지 않은 제단들이 발견된다.”
사람들이 알려지지 않은 신들을 위해 제단을 세운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앵커 성서 사전」(The Anchor Bible Dictionary)에서는 그렇게 한 이유가 “알려지지 않은 신이나 여신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그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하거나 분노를 사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스와 로마 신화는 유럽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신들의 이야기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전통문화에도 일상의 모든 것을 신과 연결시켜 이해하고 자기의 행동을 조심하고 삼가 했습니다.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신이었습니다.
조령신 : 제석오가리라는 오지그릇 항아리를 종손이나 장남의 집 안방 또는 마루에 모시는데, 그 안에는 추수한 햅쌀을 넣습니다. 제석오가리는 조상 전체를 포괄하는 조령의 상징인 셈입니다. 제석오가리는 부루단지 또는 조상단지라고도 부르며, 몸오가리는 신주단지라고도 부릅니다. 이것에 대한 제사는 명절이나 가족의 생일 등에 행하며, 차린 음식을 먼저 이 제석오가리와 몸오가리에 바쳤다가 물리는데, 농사가 잘되고 집안이 무고하며 자손들이 번영하게 해달라고 빕니다.
삼신 : 이것은 삼신(三神)이 아니라 태신(胎神), 즉 산신(産神)입니다. 남아가 잉태되기를 바라는 기자신앙(祈子信仰)에서부터 안산(安産)과 양육을 비는 신앙입니다. 안방 윗목의 선반 또는 시렁 위에 삼신단지 안에는 쌀을 넣고 한지로 덮은 다음 왼새끼(외로 꼰 새끼)로 묶어놓는데, 단지 대신 바가지를 사용하기도 하며, 또 평소에는 아무 형태도 없이 이른바 ‘건궁삼신’으로 마음속으로만 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건궁삼신으로 모시다가 산전·산후 기간에만 새로이 삼신단지를 마련하기도 하며, 이때 금줄을 치고 외부사람의 출입을 금하는데, 이것도 어린 생명의 출생과 성장에 부정한 일이 없도록 조심하려는 마음의 다짐을 종교적으로 강화하려는 징표로 볼 수 있습니다.
성주신 : 성주는 가옥의 수호신이며, ‘성조(成造)’라고도 합니다. 성주는 마루에 모시는 것이 원칙이지만, 마루가 없으면 안방에 모십니다. 한지를 신체로 삼는 경우에는 대들보나 안방 문 위 대공(들보 위에 세워 마룻보를 받치는 짧은 기둥)에 가로 세로 각 30㎝, 40㎝ 정도의 크기로 접어서 붙입니다. 다른 가신신앙과 마찬가지로 대개 부인들이 가족의 생일이나 명절에 마련한 음식을 조상들과 함께 성주에게도 먼저 바치고 집안의 평안과 풍농을 빕니다. 성주는 봄가을의 안택(安宅:무당이 집안에 탈이 없도록 터주를 위로하는 일)이나 고사에서도 다른 가신들과 함께 모셔지지만, 상량식이나 낙성식, 또는 이사의 경우 등 새로운 가옥이 마련되거나 새 가정이 형성되었을 때에는 흔히 단독으로 모셔지기도 합니다. 성주는 언제나 집 중앙에 위치하고 어느 집에서나 대개 모시는 신이기 때문에 가신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중시되는 존재입니다.
조왕신 : 조왕은 본래 불의 신으로, 조왕은 부엌에 위치하는 존재이고, 따라서 여성, 특히 주부의 신앙처럼 된 일면이 있습니다. 부뚜막 위에 작은 물그릇을 고정시키고 매일 또는 며칠에 한번씩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그 앞에서 손을 비비며 치성을 드립니다. 가족의 생일이나 명절에는 음식을 바치며, 주로 자손의 안녕함을 기원하므로 마치 소박한 모성애의 상징으로 보이는 면도 있습니다. 최근까지 이사할 때 우선 연탄이나 난로 등 불을 먼저 들여놓는다거나 이사 문안에 성냥을 사가는 것도 모두 불의 신인 조왕과 관련된 유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주도 서사무가에서 조왕할망은 문전신(門前神) 남선비의 본처이고, 첩인 변소귀신과는 원수이기 때문에 부엌과 변소 사이에서는 검부러기 하나라도 내왕하면 큰 동티(動土 : 공연히 생기게 되는 걱정이나 피해)가 난다고 해서 조심하는 위생관념의 작용도 볼 수 있습니다.
터주와 업 : 터주는 택지신(宅地神)입니다. 그 신체는 대개 항아리에 쌀이나 벼 또는 콩·팥을 같이 넣어서 짚주저리(볏짚으로 우산처럼 만들어서 터주, 업의항 들을 가리워 덮는 물건)를 씌우고 뒤뜰 장독대 근처에 놓아둡니다. 지신밟기도 터주관 관련이 있습니다. 업은 재신(財神)으로, 구렁이·족제비·두꺼비 등을 그 실체라고 여기면서, 이 업이 나가면 집안이 망한다고 합니다.
문신과 측신 : 문신은 문을 지키는 신으로, 처용(處容)의 형상을 대문에 붙여 잡귀를 쫓았다고 합니다. 변소귀신은 신경질적인 젊은 여신으로서 관념되며, 헛기침을 하지 않고 변소에 들어가면 화를 내 탈을 일으키고 그 탈은 굿을 해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공포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집수리를 잘못했을 때에도 변소동티가 특히 무섭다고 여깁니다. 측신의 이러한 성격은 변소가 본채와 멀리 떨어져 후미진 곳에 있어서, 특히 밤에는 출입하기가 두렵게 되어 있는 전통적인 가옥구조와도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제는 문신과 함께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정월 열나흗날에 우물물을 모두 퍼내고 제상을 차려 기원하였습니다. 장독대 곁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의 평안과 장수를 기원하는 칠성신앙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 유일신론, 일신론, 다신론, 범신론, 범재신론, 무신론 등으로 구분합니다. 신의 범위와 존재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각자 신앙의 양태에 따라서 신에 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이 가진 신에 대한 이해가 신앙이든 신념이든 한 가지 이론으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이론의 대략은 이렇습니다.
무신론(atheism)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신념 / 불가지론(agnosticism)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신의 존재 유무를 확실히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적 신념 / 유신론(theism)에는 많은 신들의 존재를 믿는 신앙인 다신론(polytheism) /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그 중에 어느 하나의 신을 최고의 신으로 숭배하는 신앙인 일신론(monolatry)혹은 단일신론(henotheism) / 모든 우주 만물 안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신앙인 범신론(pantheism) / 태초에 이 세상을 스스로의 법칙에 의해 운행 되도록 창조하신 신은 더 이상 자연 세계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는 신이라는 신념인 이신론(deism) / 이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신은 오직 한 분이라는 신앙인 유일신론(monotheism) 등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물신숭배, 자연숭배, 토테미즘, 샤머니즘, 신인동형동성설도 있습니다.
이처럼 신에 대한 개념들이 다양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신관은 유일신론이라고 합니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유일신론이라고 하는데, 모두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주범들이 여기에 모여 있습니다. 또한 사찰에 가서 찬송을 부른다든가, 땅밟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배타적이고 폐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기독교인들도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유대교 이전의 야훼신앙은 일신론에 해당합니다. 더 현실적이고 궁극적으로 생각할 것은 신론이 아니라 어떤 신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신을 부정하기도 하지만, 현실 종교에 대한 강한 비판일 때도 있습니다. 신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신을 믿는 사람들이 신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신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표출하는 사람들이 무신론자들입니다. 그들의 논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장1.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 그러므로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장2. 하느님은 인간의 투사물일 뿐이다. - 이 투사물의 실체가 밝혀진다면, 인간은 등을 돌릴 것이다. 주장3. 인간은 동물계로부터 발전한 존재다. - 그러므로 그는 창조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주장4. 선함은 진화로부터 쉽게 설명된다. - 그러므로 선하게 살기 위해 반드시 하느님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주장5. 세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 이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를 보여준다. 주장6. 종교는 세상에 폭력을 가져왔다. - 그러므로 종교는 매우 위험하다. 주장7.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은 원시적일뿐만 아니라 혐오감을 자아낸다. - 그러므로 이 하느님 상으로 아이들을 세뇌하는 행위를 막아야 한다. 주장8.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마취제일 뿐이다. -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개념을 말하다 보면 각자가 믿는 하느님의 모습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각자가 믿는 신의 모습이 다양하거나 서로 다른 이유는 하느님을 믿게 된 동기나 특별한 경험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추구하고 바라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개인적인 신을 만들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들 아래에서 우리는 우리들만의 신을 만들어 냅니다. 초월적인 것으로 위협하지 않는 신들, 복잡한 세상에서 유익을 주는 신들, 개인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신들, 현실적인 삶보다는 내세의 구원을 보장하는 신들 등을 만들어 내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하느님을 믿고 있는지는 기도할 때 잘 드러납니다. 자기가 믿는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서 기도하는 내용이 다릅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님은 기도의 진정한 의미를 말하면서 인간 욕구가 투영된 종교의 모습을 잘 설명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사람이 말하고 하느님이 대답하는 형식이 아니냐? 하고 물어볼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참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시작된 것이요, 사람의 욕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기도는 하느님이 말씀하신 때 내가 그 말씀에 대답한다. 그 대답이 옳게 여겨지는 때 하느님이 또한 내 요청에 대한 대답이 돼 주신다. 그러므로 이 근본질서를 전복시켜 하느님을 내게 접근시켜서 대가 유익을 보겠다, 내가 외롭지 않게 되었다 하는 식의 실리주의적 종교신앙은 결국 인간의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어서 인간 욕구의 투영이며 인간형의 영상인 것이다. 따라서 오래가는 동안에는 온전히 이교적인 자식을 번식시키고 만다.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교도 그 대부분이 이런 토대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자기 욕망에 현혹되어 무당종교로 전락하고 있다.”<장공 김재준의 『하느님만 믿고 모험하라』“고독과 死 신앙”>
사람들마다 믿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들 중에는 분명히 옳은 것도 있고 그른 것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먼저 하느님이 누구신지 성서에서 증언하는 바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설명합니다. “24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25 또 하느님께서는,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6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며, 그들이 살 시기와 거주할 지역의 경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27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8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어떤 이들도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이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29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신을,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새겨서 만든 것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30 하느님께서는 무지했던 시대에는 눈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31 그것은, 하느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한 말은 하느님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손으로 만든 각종 우상을 섬기고 있는데 진짜 신은 그런 곳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성전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서 제사장들이 제사를 지냈고, 많은 타락한 이방 신전에는 창녀들이 사제를 하면서 성전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바울은 창조주 하느님은 사람이 만든 성전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전, 성직자 중심의 교회는 교직자, 교회 혹은 교회 건물이 우상화되기 쉽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저주의 신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에게 잘못 보이면 큰 벌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이런 신은 사람에게 정성과 사랑을 받아서 그것을 먹고 사는 신입니다. 신도 외롭습니다. 무엇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인간의 것까지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가 아는 여호와 하느님은 이런 분이 아니시고 오히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입니다(25절).
바울은 하느님의 존재가 그렇게 먼 것이 아니고 우리 생활을 주관하는 분이며 그것을 인정하면 곧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힘입어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일상의 삶 속에서 오늘도 하느님으로 인해 내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이것을 안다면 그리스도인이고, 이것을 삶 속에서 자주 느낀다면 좋은 그리스도인이고, 매 순간마다 느낀다면 고도의 영성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바울의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시고, 이것이 다른 종교가 믿는 신과 어떻게 다른지를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은 창조주이시고, 온 세상을 지금도 주관하시는 주님으로서 홀로 만족하시고 베푸시지, 어떤 인간의 정성에 의해서 삶을 사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감동시킬 수도 만족시킬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분이 주시는 사랑을 받아 누리고, 은혜에 감격하여 이웃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다는 평범하지만 놀라운 진리입니다. 은혜에 대한 깨달음은 바로 그것입니다. 내 생애가 하느님의 은혜 가운데 순간순간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여기서 깨닫는 중요한 진리는 이제 성전, 성직, 성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바울이 말한 아테네 사람들의 신에 대한 이해와 비슷하게 하느님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스스로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인간이 만든 어떤 건물이나, 의식에 따라 거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직 마음으로 하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했던 말의 뜻은 성서의 곳곳에서도 드러납니다. 욥은 지혜와 슬기로 요한은 말씀과 진리로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고난당하고 있는 욥을 찾아와서 하느님에 대하여 각자의 이해를 말하면서 욥이 잘못을 인정하라고 압박합니다. 하느님이 무조건 옳다는 주장은 신학적으로는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이러한 주장 속에 갇힌 하느님은 너무나 멀게만 느껴집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지 늘 감시하다가 사소한 실수라도 범하면 ‘사랑의 매’란 이름으로 벌하시는 무서운 감시자처럼 보입니다. 욥은 무서운 감시자이자 틀에 박힌 정형화된 하느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몸짓이 때로는 하느님께 대적하고, 그 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학적, 신학적 신을 거부하고 진지한 물음을 던질 때 새로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듣고 배운 도식적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소통하시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욥이 “그렇다면 지혜는 어디에서 오며, 슬기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져 있고, 공중의 새에게도 감추어져 있다.”라고 말한 것은 사람이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사람의 머리로 하느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 속에 자기를 드러내시는 하느님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함께 하신 하느님의 역사를 체험함으로써 하느님을 깨달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요, 악을 멀리하는 것이 슬기다.”
예수님이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한 것입니다. 요한복은 8장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바울이 만난 아테네 사람들과 공통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직접 체험한 생생한 신앙보다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굳어진 신앙의 모습이 하느님의 말씀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하고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규정이 되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자기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진리를 알고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 때 체험한 생생한 깨달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의 본 뜻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의 종교는 희랍정교회입니다. 정교회의 교회에는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성인들의 모습이 돔형의 천장에 그려져 있습니다. 그 그림들 중에서 눈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터어키인들이 침략했을 때에 유명한 성당에 있는 성화의 눈을 파거나 지워버렸습니다. 그리스 신앙인들은 아침에 나갈 때나 일을 마치고 들어올 때에 교회에 들려서 기도를 합니다. 그것은 내가 성화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성화에 있는 예수님과 신앙의 선배들에게 나의 모습을 보이러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나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속에 나만의 신을 만들지 말고 성서 속에서 계시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삶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을 살 것입니다.
이번 주일은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맥추절은 히브리인들의 3대 절기(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중 하나로서 유월절 다음으로 중요한 절기입니다. 밀이나 보리를 수확한 후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리는 추수 감사 절기입니다(출 23:16). 특히 이날은 유월절이 지난 지 7주째 지켜졌다고 해서 ‘칠칠절’(七七節, 출 34:22; 신 16:10)이라 불렀습니다. 추수의 첫 부분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은 단순한 감사의 예물이라는 의미보다는 하느님의 소유권 곧 하느님이 삶의 근원이 되신다는 신앙 고백적 차원이 있습니다. 헬라어를 사용하던 유대인들은 이 축제를 ‘오순절’(五旬節)이라고 불렀는데, 유월절 이후 50일 째 되는 날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사건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리기 위해 지켰습니다.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동료 인간들과 함께 바르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가르침이며 삶의 기준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은 올해의 절반 동안에 주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서 남은 반년을 거룩하게 살겠다는 다짐을 하는 때입니다. 감사의 가장 좋은 표현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올해도 벌써 절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조심스럽고 많은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교회공동체 이름으로 이렇게 모여서 하느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친교를 나눌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한 주간도 그럭저럭 일상 속에서 큰 탈이 없이 지낸 사람들이 얼굴 마주보며 웃으면서 만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세상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믿으며 감사를 드립니다. 서로 손 잡아주면서 평안을 염려하며 인사할 수 있는 형제자매들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아픔과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따뜻한 시선으로 건강을 기원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행복과 기쁨을 나누며 위로와 용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공동체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의 희망을 품고 한걸음씩 나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세상이 조금씩 이라도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작은 몸을 움직여 함께 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교회를 통하여 생명의 소중함과 세상의 평화를 생각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감사할 조건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내일에 이루어질 모든 일에 미리 감사함으로써 감사의 조건을 이루며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