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 28:16~20, 욘 3:1-10, 행 16:6-15
오늘 마태복음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세 마디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1.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나에게 주셨다
마지막 첫 번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권세’라는 말에 사용된 ‘엑수시아’의 본래 뜻은 어떤 행동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엑수시아’가 ‘권능’이라고 해석되기도 하는 것(마 10:1, 9:6, 8, 막 6:7, 눅 10:19, 행 8:19, 계 11:6)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엑수시아’가 갖는 중요한 신앙적 의미는 그 능력을 부여한 분이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권세를 넘겨받으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뜻에서 시작되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지와 관계없이 단독적으로 행하신 일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하나님 나라의 선포, 가르치심과 치유하심, 십자가의 고난, 부활과 승천, 이 모든 일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과 의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권세를 넘겨받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 되심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용어 중의 하나가 ‘아버지’입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아버지’는 단지 가족관계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호칭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 되심을 나타내는 거룩한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넘겨받으셨다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삶 속에서 우리가 나타내야 하는 일 역시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권능이 드러나지 않는 말씀과 사역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증거하려고 하는 권능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가, 오늘 우리가 하는 계획과 모든 프로그램은 과연 하나님의 의지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오늘 우리가 행하려는 모든 선포와 사역은 과연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으로 이루어지는 것인가를 우리는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라는 성을 구원하시고자 한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의 죄가 너무나 크고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 싫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회피하지만, 결국 바다 깊은 곳, 죽_음의 심연까지 이르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하게 됩니다.
고래 뱃속에서 나온 요나는 결국 “여호와의 말씀대로”(욘 3:3)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 많던 니느웨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요나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명자의 개인적인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리고 사명자 개개인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 앞에서 철저하게 부정되고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2.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주신 두 번째 말씀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19절과 20절에서 직접 명령에 해당되는 말씀은 “제자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제자 삼으라”는 명령 전후의 말씀들, 즉 “가서”와 “세례를 베풀고”, 그리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들은 “제자 삼으라”는 핵심 명령의 내용을 이룹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를 길러내시는 일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셨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실제로 복음서의 많은 부분이 제자들을 가르치신 내용이며, 제자들과 나눈 대화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의 모든 증언은 제자들과 관련된 내용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명하신 말씀들도 모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은 열한 제자들이 갈릴리에 가서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렀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마지막으로 기록합니다. 마가복음은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며 마지막 명령을 주신 것으로 증언합니다. 누가복음은 열한 제자들과 함께 하는 이들이 모여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성령이 임할 때까지 예루살렘 성에 머물라는 마지막 말씀을 하신 것으로 증언합니다. 요한복음도 마지막 21장은 모두 제자들과의 대화에 대한 것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마지막 말씀도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22)는 것입니다.
“제자로 삼으라”는 말씀은 우리의 증언과 선교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잘 말해 줍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자기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출발점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제자 공동체였다는 점,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할 교회의 모습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공동체라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3.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주신 세 번째 말씀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임마누엘, 마 1:23)라는 주제는 마태복음을 관통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바로 왕에게 보내시면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보다 더욱 생생한 말씀으로 바꾸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은 ‘미래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은 ‘현재형’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나 ‘함께 하심’에 있어서 현재형이나 미래형이라고 하는 시간 표현은 큰 의미가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함께) 있으리라”는 의지를 미래형으로 말씀하신 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함께) 있으리라”는 뜻을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과 본질상의 차이가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모세에게는 앞으로 실현될 약속으로 주어진 것에 반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지금 실현된 약속으로 주어지고 있음을 복음서는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이 철저하게 예수님과의 동행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고백합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 할 때 성령께서 막으셨을 뿐 아니라, ‘무시아’라는 지역 가까이 이르러 ‘비두니아’라는 곳으로 건너가려 할 때에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다(행 16:7)고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들과 함께 하셨다는 고백은 계속 이어집니다. 바울이 디모데와 함께 빌립보에 이르러 몇 날을 보낸 후, 안식일을 맞이하여 기도 처소가 없어서 강가로 나갔을 때 앉아서 모인 여자들을 발견하게 하시고 말씀을 전할 때, 그 중에서 루디아라고 하는 한 여인의 마음을 열어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심(행 16:14)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나타나심’과 ‘함께 하심’은 언제 어디서나 체험되어져야 하는 현재적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도, 예수님의 제자를 세워나가시는데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사역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시작되고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