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 14:1~11 , 약 2:1~13, 사 57:14~19
오늘 말씀 누가복음 14장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셨다”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식이 끝나면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는 전통이 있는데, 그 자리에 예수님을 초청한 것입니다. 식사 자리에 사람을 초청할 때에는 존경하는 경우이거나 친교를 나누고 싶을 때이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예수님을 초청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절 뒤에 보면 “그들이 엿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엿보고 있었다’(파라테레오)는 말은 ‘바로 옆’(파라)이라는 말과 ‘본다’(테레오)는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예수님 바로 옆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행동 하나하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감시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초청해놓고 한 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예수님을 옆에서 감시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수종병 들린 사람을 미리 데려다 놓고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그를 치유함으로써 안식일법을 어기는지를 감시한 것입니다. 미리 함정을 파고 기다린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안식일에 병을 고친 이야기가 세 번 나옵니다. 맨 처음은 오른 손 마른 사람을 고친 이야기인데, 누가복음 6장에 나옵니다. 두 번째는 18년 동안 허리가 꼬부라져 고생하던 여인을 고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13장에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왼손보다 오른손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축복을 할 때에는 반드시 오른손으로 하기 때문에 오른 손 마른 사람도 심각한 병입니다. 하지만, 허리가 꼬부라진 사람은 더 심각합니다. 이 사람은 먹는 것도 불편하고 사는 것이 다 불편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오른손 마른 사람보다 허리가 꼬부라진 사람은 더 심각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손이 마르거나 허리가 꼬부라진 사람의 경우,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이 일 때문에 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수종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놓아두면 죽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앞에 이전보다 더 심각한 병으로 앓고 있는 수종병자를 데려다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수종병자를 고치심으로써 안식일법을 어겼다는 증거를 확보하려 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종병자를 고치시기로 작정하셨고, 단번에 그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종병자를 불쌍히 여기셨고,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 예수님의 사랑 방식을 잘 나타내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4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사랑 방식을 나타내는 첫 번째 말은 “데려다가”라는 말입니다. 우리 말로는 “데려다가”라고 표현했지만, 성경 원문의 뜻은 “꽉 붙잡다, 아주 단단하게 붙잡다”(에필람바노)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종병자를 꽉 잡았다는 것은 소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종병자의 아픔과 고통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수종병자의 삶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수종병자와 삶을 함께 하시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으로 들어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고통스러워할 때, 우리가 슬퍼하거나 절망에 빠졌을 때, 때로 두려움에 떨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 방식은 멀리서 쳐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상처를 감싸 안으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신음하는 우리를 꽉 잡으시고 놓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야보고서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성도간의 나뉠 수 없는 관계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방식을 나타내는 두 번째 표현도 4절에 나옵니다. 그 말씀은 “고친다”(이아오마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데려다가 ‘고쳐’ 보내셨습니다. 고치신다는 것은 치료한다는 뜻도 있고, 회복시킨다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사역 중의 하나가 고치시는 일입니다. 치료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료하신다는 것은 단지 의학적으로 낫게 하신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 그대로의 모습대로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후에 “참 좋다”고 하신 피조물의 원래 모습과 상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주셨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욕심과 죄 때문에 굳어지고, 막히고, 변질된 우리의 영과 삶이 본래의 모습대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치유의 결과는 위로와 평강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 그를 고쳐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사 57:18, 19) 하나님의 치유는 단지 육신적 범위에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 영적 차원의 치유까지 확대되며, 나아가 그 공동체의 평화에까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사랑의 방식을 나타낸 세 번째 표현도 4절에 나옵니다. 그 말씀은 “보내신다”(아폴뤼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데려다가 고쳐 ‘보내셨습니다.’ 본문에서 보낸다는 말의 원뜻에는 “풀어준다”는 뜻도 있습니다.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을 자유롭게 해서 보낸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종병자를 보내시는데 그냥 보내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수종병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질병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정죄와 비난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시고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방식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과거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과거의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얽어매는 지난날의 모든 잘못된 행동과 습관으로부터 우리를 풀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오늘 누가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 방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종병에 걸린 사람을 사랑의 팔로 “붙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어가는 수종병자를 “고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질병에 붙들리고 매여서 사는 수종병자를 “풀어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얽매는 세상의 헛된 것들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세상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를 풀어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