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벧전 2:11~17, 잠 8:1~21, 마 6:19~24
미국의 제 33대 대통령 트루먼은 그의 서재에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라는 말을 적어 놓고 대통령의 집무를 수행했다고 합니다. 지도자는 조직의 최종 책임자로서 막중한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대통령 취임 선서문이 있습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 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이는 한 나라의 최고의 지도자로써 대통령이라는 영광을 얻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공무원 선서문입니다. “나는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 헌법과 법령을 준수하고, 국가를 수호하며,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마찬가지로, 공무원으로써 맡겨진 책임을 다짐하는 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회 구성원들이라면, 누구든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치고, 원리이며,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매 주일마다 교회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써 책임과 의무를 배우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이 매우 소중한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책임을 가진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강림 후 여덟째주일인 오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어떤 책임과 의무를 말씀하시는지, 귀기울이고,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신서인 베드로전서부터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지근거리에서 3년의 세월을 보낸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하고 가르치며 치유하시는 사역을 하실 때마다, 베드로는 열심히 보고 배우고 따랐습니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을 때도 있었고, 무서운 책망을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비겁하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당시에 두려움 속에서도 고초를 당하는 예수님 곁을 떠날 수 없었던 베드로의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갈릴리에서의 두 번째 부르심 이후에 승천하시며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받아 예루살렘 초대교회 공동체를 이끌어간 주역이었습니다.
이러한 굵직한 배경을 지닌 베드로가, 누구에게, 왜 편지를 썼습니까?
바울의 편지가 주로 각 교회를 상대로 기록한 것이라면, 베드로의 이 편지는 광범위하게 전체 교회를 상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당시 교회는 유대교의 엄청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또한 로마 제국의 박해도 극심했습니다. 이런 박해 속에 고생하는 소아시아의 여러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믿음과 용기를 북돋워 주고 소망을 주기 위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인 2장 11절부터 4장 11절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까?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을 거류민이나 나그네로 비유하는데, 이는 정처 없이 떠도는 거류민이나 나그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향을 믿고, 본향을 소망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특히나 갖은 박해 속에서 물질적인 피해를 입고, 손해를 보며, 심지어는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에서 본향에 대한 믿음과 소망은 확고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본향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졌기에, 그저 거류민이요 나그네처럼 살지 않으려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문화가 만연해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의 정욕을 멀리해야 하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들이 악행을 저지른다고 모함하는 이방인들의 비방이 있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이 끝까지 행실을 선하게 해야 하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 혹은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려는 지도자들의 지시에 순종하는 일에도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자녀의 삶이 곧 부모의 자랑과 영광이듯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곧 하나님의 자랑이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행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는 자들로써, 자신의 행실에 책임지며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말이 아닌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며 살았습니다. 온갖 사치와 향락, 퇴폐 문화가 극을 달리며 정신적으로 부패한 로마에서 남녀 그리스도인들은 순결한 성 윤리를 지켰습니다. 세네카는 로마를 향해서 “여자들은 이혼하기 위해 결혼하고 결혼하기 위해 이혼했다”라고 했는데, 유일하게 가정의 순결을 지켜내는 여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부인들이었습니다. 로마에 거주하는 다섯 사람 중에 한 명은 노예였었는데, 유일하게 노예들을 사람으로 받아줄 뿐만 아니라 극진하게 대접해주는 곳은 교회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약 250여년에 걸친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책임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삶의 기준을 하나님으로 삼고 빼앗으며 빼앗기고, 때리면 맞고, 죽이면 숭고하게 죽어가며 어리석은 박해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는 기독교를 더 이상 핍박하거나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이와같은 기독교 역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누구든 공경하고, 누구든 사랑하고, 누구든 존대하며 오직 선행으로 일관하라고.
오늘 우리에게 주신 잠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선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지혜와 명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지혜와 명철이 무엇인가? 의인화하면서까지 극찬한 잠언서의 표현을 살펴봅시다.
6절~8절에서, 지혜와 명철의 입은 가장 선하고, 정직하고, 진리와 의로운 말만 합니다. 또 지혜와 명철의 가치는 정금, 은, 진주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계략과 참 지식이 있고, 능력도 있습니다.
15절~21절에서, 지혜와 명철로 왕들과 관리들이 치리하고 공의를 세우고, 재판관들이 의로운 판결을 내리기도 합니다. 부귀와 장구한 재물과 공의가 모두 지혜와 명철의 것입니다. 정의롭고 공의로운 길 가운데로 다니며, 지혜와 명철을 사랑하는 자가 재물을 얻습니다.
그야말로 지혜와 명철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것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에게 이런 지혜와 명철이 꼭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인들이 지혜와 명철을 얻어야 할까요?
그것은 지혜와 명철이 최고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믿고 그렇게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가치를 나의 가치로,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믿고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가장 크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크신 하나님의 자녀들이기에, 최고의 지혜와 명철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면모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책임을 진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최고의 가치인 지혜와 명철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전제 하에, 다시 잠언서를 읽어 봅시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선한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직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은이나 정금이나 진주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지도자들은 계략과 참 지식과 능력을 얻는대로 공의롭게 치리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재판관이 있다면 그 무엇에도 판결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귀와 장구한 재물을 쫓아가지 않고, 오히려 지혜와 명철로 말미암아 따라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롭고 공의로운 길로만 다닐 뿐입니다.
여기에 한가지만 더 추가합니다. 7절에서 지혜와 명철은 악을 미워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곧 지혜와 명철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명철입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선한 말, 정직한 말, 진리를 말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각종 은이나 정금이나 진주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도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아가려고 하는 이유도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가장 선명한 기준이요,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최고의 가치입니다.
비록 거류민과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지만, 한걸음 한걸음이 최고의 흔적을 남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마지막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특히나 재물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살면서, 철이 들면서, 세상에 눈을 떠가면서, 세상의 일들에 시달리면서, 점점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돈의 힘입니다. 돈 모으기가 생각처럼 되지 않고, 돈이면 대부분이 되고, 돈 때문에 온갖 문제가 생깁니다.
기독교는 초월의 종교가 아닙니다. 가난을 포기하거나 초월하지 말고 정면으로 대처하며 근본적으로 해결하라고 가르칩니다. 어떤 자세로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물을 좀과 동록과 도둑이 있는 땅에 쌓지 말고,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십니다. 돈을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헌금을 많이 하라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자선 사업을 많이 하라는 말씀일까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돈을 버는 게 더 어려울까요? 돈을 쓰는 게 더 어려울까요?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인데, 하나님의 뜻에 맞게 쓰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큰 돈을 버는 사람은 많지만 큰 돈을 바르게 쓰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돈을 바르게 쓴다고 생각하여, 자기 자신 보다 사회를 위해서 사회사업 내지는 장학기금으로 쓰는 이들이 있습니다. 백 번, 천 번 바르게 썼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최선은 아닙니다. 최선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쓰는 것인데, 이는 버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돈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내가 가진 돈으로 가난한 자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입장에서 보면 돈은 가지고 있는 만큼 책임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가 네게 준 재능, 성품, 환경,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썼느냐”라고 반드시 물으십니다. 큰 돈을 가지고 있거나 버는 재간을 가진 사람은 그만큼 큰 책임이 있다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의 재물의 씀씀이가 어때야 하는지 새겨듣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주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재물의 지배를 받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욕심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서 부정한 거래, 뇌물 수수가 뒤따르는데, 이는 분명히 돈에 지배받는 것입니다. 쉽지 않겠지만, 끊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보물에 지배받지 않고, 보물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내게 있는 것으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세 본문 말씀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써 세상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어떤 경우에도 악을 미워하고 선한 일을 행하여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드러내며,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세상의 가장 큰 가치인 지혜와 명철을 얻으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돈의 노예가 되어, 세상을 어둡고 악하게 만드는 일에 앞장서지 말고, 주어지는대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행실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행실은 곧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디 그 열매가 풍성하여져서, 나 뿐 아니라, 이웃도 먹여 살릴 수 있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