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미가 4:1-4, 계 19:1-10, 마 25:31-46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습니다. 1920년대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에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 그 원작입니다. 1차 세계대전으로 땅은 황폐화되고 사람들은 절망의 늪에 빠져 있을 때, 평생 도토리를 심고 가꾸어 황무지를 거대한 생명 숲으로 가꾼 농부 이야기입니다.
예언자 미가도 전쟁의 땅에 평화 나무를 심은 평화 농부였습니다. 미가 시대, 기존 강대국 이집트와 신흥 강대국 앗수르의 패권 다툼이 시작되고 앗수르는 굶주린 사자처럼 주변 나라 먹이 사냥하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을 삼키고 남 유다마저 삼키려고 달려오는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에서 미가는 예언활동을 하였습니다. 이사야와 동시대였습니다. 예언의 메시지도 비슷했습니다. 평화의 이중창을 불렀습니다. 이사야가 예루살렘 배경의 예언자라면 미가는 배경은 농촌이었습니다.
미가서 본문(4:1-4)의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이 이루실 종말론적 평화’입니다. 지금 들리는 소문은 온통 전쟁 이야기뿐이었고 지금 보이는 광경도 온통 전쟁 풍경뿐이었지만 미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로서 종말론적 평화였습니다. 세상은 전쟁 통이지만 그 너머에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새 역사, 평화의 하나님 나라 계시를 보고 그는 목청껏 선포했습니다.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천하대란의 시대,, 미가와 이사야는 함께 종말론적 평화의 계시를 보고 함께 평화를 선포하고 듀엣으로 평화의 노래를 불렀습니다(미가4:3, 이사야2:4) 오늘 다른 본문(계19:1-10, 마25:31-46)도 같은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종말론적 평화, 하나님 나라 이야기입니다. 예언자 미가와 사도 요한과 마태는 시대와 상황은 달랐지만 전쟁 통 세상에서 종말론적 평화, 하나님 나라의 묵시(黙示)를 보고 선포했습니다. 오늘 전쟁 통 세상, 사람들은 전쟁만 보고 염려하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보아야 합니다. 바로 전쟁 통에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평화의 묵시를 보고 평화의 꽃씨를 심고 가꾸어야 합니다. 천하대란의 전쟁 시대, 온갖 위기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습니다. 역병 보건 위기, 기후 환경 위기, 식량 에너지 위기....그러나 우리는 그 상황만 보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그 너머, 하나님의 종말론적 평화를 보고 종말론적 희망을 선포하고 가꾸어야 할 때입니다. 사도 요한도 마태도 그랬습니다. 종말론적 평화 묵시를 보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로마 도미티안(AD 81-96) 황제의 기독교 대 박해 때 지중해 밧모섬에 유배되어 강제노역을 하였습니다. 박해로 교회가 풍비박산 되는 상황에서 그는 종말론적 평화의 계시를 보았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로 옷을 입도록 허락하였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19:6-8) 베드로와 야고보와 바울 등 교회 기둥 같은 지도자들은 이미 순교당하고 없었습니다. 요한 자신도 죽음 같은 유배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 절망적 암흑시대 요한이 보았던 종말론적 평화와 하나님 나라, 요한 계시록입니다. 본문의 어린 양의 혼인잔치 이야기는 바로 짐승 같은 세상 권세를 이긴 하나님의 어린 양이 다스리는 나라, 종말론적 평화 이야기입니다.
마태는 세리 출신이었습니다. 갈릴리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를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 제자가 됩니다(마9:9). 유대인들, 특히 자칭 의인이었던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정죄하고 혐오, 경멸했습니다. 세리 마태, 바리새인 등 유대인들로서 얼마나 많은 차별을 당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은 전혀 달랐습니다. 마태의 겉 사람은 세리였지만 그 중심은 하나님 나라 열망을 간직한 갈릴리 불꽃 청년이었습니다. 마태의 본명이 고상한(?) 이름, 레위였던 것을 보면 어쩌면 그의 근본은 세리가 아니었는지 모릅니다(막2:14, 눅5:27). 저항의 땅 갈릴리에서 격동의 시대를 살며 자신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 마태로 개명을 하고 위장취업이라도 하였는지 모릅니다. 갈릴리는 반란의 땅이었습니다(요세푸스 유대사). 갈릴리 유다 반란(反亂)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행5:37). 반란은 진압되었습니다. 유다 민중의 희망이었던 세례 요한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청년 마태는 목자 잃은 양처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오셔서 부르셨습니다. 마태는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가 이미 예수의 소문을 듣고 학수고대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마태의 이력을 알 때 오늘 본문 마태 25:31-46이 더 잘 이해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무엇이 의(義)이며 누가 의인입니까? 마태의 물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는 바리새인이나 로마의 의와 다릅니다. 세상 강자에 의한 선택적 공의, 공의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는 세상과 전혀 다릅니다. 오늘의 천하대란 시대, 새로운 표준(New Moral)이 요청됩니다. 인간의 표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표준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양과 염소를 편 가르시고 다시 줄을 세우십니다. 종말론적 의와 평화, 하나님 나라 기준의 의와 평화가 필요합니다. 강대국 중심의 평화, 강자의 논리로서 공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져야 합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31-40)
오늘의 세계, 전쟁 통 세계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단순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두 나라의 전쟁이 아닙니다. 혹자는 제3차 세계 대전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전쟁은 또 다른 글로벌 갈등과 위기를 낳습니다. 식량위기, 에너지 위기, 세계 경제 위기에다가 역병 보건위기, 기후 환경 위기 등 전대미문의 위기 시대입니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위기가 추가됩니다.
올해 분단 77주년, 정전 협정 69 주년입니다. 평화의 길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전쟁의 소문만 높아가고 있습니다. 종말론적 절망이 엄습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위기 상황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대응 전략도 물론 중요합니다. 숯한 대책회의도 하고 국제적 기구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나빠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위기, 그 본질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과학, 이성적 지혜를 동원한 분석과 대책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영적인 문제입니다. 지금은 이 시대의 징조를 보고 하나님의 종말론적 묵시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제국의 논리, 패권의 논리로 살아왔던 세계, 이제 마침내 이루실 종말론적 하나님의 평화계시를 보아야 합니다. 세상만 보고 절망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종말론적 묵시와 종말론적 희망을 볼 때입니다. 그 종말론은 미래의 종말론이 아닙니다. 현재적 종말론입니다. 미래적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 현재적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어떻게 이 전쟁통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을까요? 성령 안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 수 있습니다. 지금은 환난의 때이고 전쟁의 시대이지만 지금은 도리어 은혜의 때이고 지금은 구원의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계시를 보고 평화를 선포할 때입니다. 사람들이 전쟁 이야기만 하고 위기만 말하고 있습니다.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은 종말론적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종말론적 희망을 선포할 때입니다. 미가가 그랬습니다. 사도 요한과 마태도 전쟁과 박해의 때에 하나님의 묵시를 보고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선포하였습니다.
성령강림절(성령강림 후 일곱째 주일)입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 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 욜2:28). 위기의 시대인 말세, 성령을 받을 때이고 은혜의 시대입니다. 성령은 말세에 남종이나 여종이나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