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 32:22-32, 엡3:14-21, 마13:44-52
성령강림 후 세 번째 주일입니다. 성령의 강림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새 공동체인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새롭게 창조하신 새 사람, 하나님 나라의 새 인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을 때 생령(네페쉬, 살아있는 존재)이 되었듯이 예수께서 3년 동안 제자들을 빚어 양육하시고 오순절에 급하고 강한 성령의 바람(생기)을 불어 넣으셔서 세상을 이기고 모든 대적을 이기는 새 인류가 되게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창조하신 새 인류는 어떤 존재일까요?
전적으로 순종하는 새 인류 야곱(창32:22-32)
첫 인류인 아담과 하와는 교만과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에덴동산은 아름다운 나무와 먹기에도 보기에도 좋은 열매가 가득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도 있었습니다. 부족함이 없었고 풍성했습니다. 무엇보다 무엇이든지 “임의”로 먹을 수 있는 “자유”와 모든 동물들의 이름을 부여함으로 그것들을 다스리는 권한과, 온 땅을 경작할 수 있는 능력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자유와 평화, 풍성함과 아름다움, 만물을 다스리는 권한, 창조적 능력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계명”이 지켜져야 했습니다. 그것은 오직 인간을 영광스럽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을 인정하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계명”을 기쁨으로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족함 없이 영광스럽고 존귀한 삶이 교만을 불렀고 자신이 온 만물의 주권자의 반열에 오르고 싶은 욕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풍성하고 아름답고 놀라운 권능을 부여받은 사람은 항상 자신의 정수리를 향해있는 “다모클레스의 검(The Sword of Damocles)”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모클레스(Damocles)는 주전 4세기 시칠리아 시라쿠사(Siracusa)의 참주(僭主) 디오니시우스(Dionysius) 2세의 신하로 주군(主君)이 가진 권세와 능력을 찬양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어느 날 디오니시우스는 다모클레스에게 하루만 그의 왕좌에 앉도록 했습니다. 감격한 다모클레스가 왕좌에 앉는 순간, 한 올의 말총에 매달린 칼이 왕좌에 앉은 자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풍요와, 능력과, 힘을 갖는 순간 인간은 “다모클레스의 검”의 위험 앞에 서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많이 가지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순간 우리를 파멸시키는 교만과 불순종에 빠지게 됩니다. 이 죄악에 빠지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천지창조는 7일 만에 이루어졌다면, 교만과 불순종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을 만드시는 일은 창세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오직 하나님의 “그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새 인류의 모형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앞선 두 족장들과는 그 성향이 다릅니다. 처음 태어날 때부터 순리(順理)를 거스릅니다. “먼저 난 큰 자”가 “나중 된 어린 자”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순리입니다.(창25:23) 그러나 싹이 노랗습니다. 날 때부터 형을 제치고 나오려고 합니다. 그래서 “야곱”(뒤꿈치를 잡다, 넘어뜨리다)입니다. 결국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습니다. 밧단 아람, 외삼촌 집에서 20년 일한 삯은 받지 못했지만, 결국 유전적인 가능성이 희박한 “변종 새끼”를 받는 조건을 내걸고 품삯을 받아냅니다. 그의 사기행각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법적으로 완벽한 합법을 가장하여 외삼촌의 가축을 자신의 소유로 삼습니다. 그리고 야반도주를 합니다. 부창부수입니다. 라헬은 아버지집의 수호신을 빼내어 감춥니다. 이 부부를 어쩌면 좋습니까? 그런데 오랫동안 기다리시던 하나님이 드디어 야곱의 인생을 향해 칼을 뽑으십니다. 얍복강에서요! 형 에서가 “400명의 장정(창33:1)”을 거느리고 옵니다. 야곱을 환영하여 맞으러 오는 게 아니라 집에 있는 장정, “사병(私兵)” 수준의 군대를 거느리고 보복하고 대항하러 오는 것입니다. 다시 라반의 집으로 되돌아 갈 수도 없습니다. 서로 경계를 정하고 그 경계를 넘어서지 말 것을 맹세했기 때문입니다.(창31:52) 사방이 막혔습니다. 야곱의 잔꾀로 통할 일이 아닙니다. 비로소 야곱이 모든 것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합니다. 이길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씨름입니다. 천사는 남자의 힘의 근원인 야곱의 허벅지관절(환도뼈)을 치셨지만 야곱은 밤이 새면 다시 돌아가야 할 천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않겠나이다(창32:26)” 사실 야곱의 힘이 아니라 이 말, 이 믿음이 천사로 야곱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것은 “벧엘 언약(창28:13-15)”을 반드시 축복해(이루어) 주시라는 강청(强請)이었습니다. 축복은 “힘을 넘겨주는 것”, “약속이 성취되게 하는 것”입니다. 비로소 야곱은 그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고, 아브라함이 받았던 그 하나님의 언약(창 12:2, 믿음의 큰 민족을 이루는)이 야곱 자신을 통해 성취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자신의 전 삶을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일에 바친 것입니다. 이로써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새 인류의 길을 걸었습니다.
무릎 꿇고 빌어서 충만하게 채우는 새 인류, 교회(엡3:14-21)
새 사람 새 인류 공동체는 하나님께 무릎 꿇고 빌어서 그 심령에 성령의 능력과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우주보다 더 큰 공간이 있습니다. 이 공간은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창조 주 하나님이 오실 때 비로소 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셔서 그의 나라를 세우려 하셨습니다. 성경은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묘사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땅은 지리적(Geography)으로 광야와 황무지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땅입니다. 유대광야는 사막(사33:8-9), 메마른 땅(사35:1-2), 짐승의 부르짖는 땅(신32:10)입니다. 물 흐르는 시내나 개울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며 물의 근원을 찾기 어려운 땅입니다. 그 땅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과 보호하심이 없이는 생존하기 어려운 땅입니다. 지정학적(Geopolitics)으로는 강대국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서 시시때때로 전쟁이 휩쓸리고 끊임없는 강대국들의 침략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막아주시고 지켜주지 않으면 나라의 존립이 어려운 땅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의 명령을 따르며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며 기도할 때 나라는 강성해졌고 풍요로웠으며,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속사람의 강건함과 풍성함”으로 넘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출세와 성공이 아닙니다. 내 욕망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첫 번째 기도는 성도의 속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자는 자기의 능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전쟁 중에도 평안합니다. 두 번째 기도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계시는 것입니다. 나그네처럼 잠시 거주하는paroikeo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서 항구적으로 정착해야katoikeo 합니다. 그분이 계시는데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항상 계시는데 무서울 것 없습니다. 아예 우리 안에 계시는데 걱정할 일 없습니다. 세 번째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에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의 사랑에 우리의 생각뿐이 아니라 우리 의지까지 뿌리박혀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깁니다. 두려움을 이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은 우리 교단에 바른 신학, 올곧은 양심, 진실한 믿음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를 더 많이 배워야 합니다. 양심적으로 목회하고 정의롭고 바르게 목회하는데 정말 어렵고 힘든 교회들이 많습니다. 반면에 아는 게 별로 없고 내세울 것 없는 것 같지만 기도하는 이웃 교회들 중에서 놀라운 일이 많이 일어나는 걸 봅니다. 솔직히 왜 저런 놀라운 일들이 저런 교회에서 일어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출애굽기를 읽는 중 어떤 깨달음이 왔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출애굽한지 한 달이 지났을 때 신 광야에 이르렀고 양식은 떨어졌습니다.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 원망을 들으시고 아침마다 만나를 주셨습니다.(출16:1-4) 이번에는 백성들이 고기가 없다고 불평합니다.(출16:8)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저녁에는 고기(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시니라”(출16:1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뿐 아니라 그들의 불평마저도 들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왜 무식할 만큼 밤새우며, 금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다 하나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많이 얻어 가는데 어떤 교회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메추라기들을 얻지 못하는지를 알 것 같았습니다. 목회는 전략이 아니고 기도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가 아니라 머리되시는 주님으로부터 부어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됩니다. 우리 교단에게 허락하신 바른 신학, 올곧은 양심, 진실한 믿음 위에 무릎 꿇고 엎드려 기도하는 일을 더한다면 우리 교회는 얼마나 하나님 나라의 일을 더 능력 있게 실현해 갈 수 있을까요?
팔고, 버리는 삶을 사는 새 인류(마13:44-52)
마13:44-52은 하나님 나라의 3가지 비유입니다. 땅에 묻힌 보화, 진주장사, 그물의 비유입니다. 땅에 묻힌 보화와 진주의 비유는 그 내용이 동일합니다. 값진 보화를 발견한 가난한 소작농부는 자기 소유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크고 놀라운 가치를 발견합니다.(44절, 46절)합니다. 눈이 떠졌습니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가치, 새로운 미래를 발견한 사람은 그동안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기꺼이 팔아서 그것을 삽니다. 그 보화를 소유하기 위해서요!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아낌없이 바쳤고, 자신의 생명까지 드려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특별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놀라운 하나님 나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의와 공의, 사랑과 평화가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난의 길도 걸어가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재산과 물질과 재능을 하나님께 바쳐드리는 일도 함께 힘써야 합니다. 자칫 정의와 평화의 목소리는 크고 높은데 조용히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놓는 일(행4:36-37)을 소홀히 하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야 되지 않을까요?
그물의 비유를 보면 그물에 들어온 고기 중에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48절, 먹을 수 없는 부정한 것, 먹기에 미숙한 것)은 버립니다. 그물에 들어온 것 중에서 나쁜 것을 골라내지 않으면 다 함께 먹을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물 안에 있다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닙니다. 온전한 고기만 그릇에 담깁니다. 그물 안에 있었으나 못된 고기는 결국 버림을 받습니다. 우리는 교인이 될 뿐 아니라 잘못된 우리의 삶을 버리고 갈라내는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그물 안에 존재하지만 그물 안에 있다고 다 하나님 나라백성은 아닙니다. 많은 것을 소유했으나 사람들에게 유익하지 않고 해를 끼치는 “못된 것(48절)”은 버려지고, 좋은 고기, 즉 우리의 삶이 사람들을 살리는 좋은 먹거리가 되는 고기는 구별된 그릇에 담길 것입니다. 복음은 땅 끝까지 전해져야 하지만 큰 교회가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거룩한 교회, 성결한 교회(엡1:4)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