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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2-1) - " 죄의 종, 하나님의 종 " / 6.25민족화해주일 / 김거성 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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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강림후(2-1) - " 죄의 종, 하나님의 종 " / 6.25민족화해주일 / 김거성 목사

관리자 2022-06-17 (금) 14:03 2년전 975  

본문) 사 54:1-8; 롬 6:15-23; 눅 19:1-10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 함께 예배드리는 교우 여러분의 삶에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두 차례의 선거 이후, 마치 우리 사회에 미래가 없고 암담해진 것처럼 절망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서의 말씀들을 통해 위로와 희망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1. 십일조와 부패


벌써 몇 십 년 전입니다. 부흥회에 강사로 오셨던 분이 아이가 셋 있는 어떤 하사관 부부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지금은 부사관이라고 합니다만, 당시에는 그 급여 수준이 열악해서 그 가정에 계속 빚이 늘어가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빠짐없이 온전히 십일조를 바쳐야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설교를 들은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차피 당장 사람들에게 진 빚은 갚기 어려우니, 하나님께라도 빚지고 살지 맙시다.” 그 말에 부인도 동의했고, 그달부터 부부는 십일조를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는데 그가 부대 인사계로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장교들조차 그에게 잘 보이려 하는 상황이 되었고, 그는 2년 동안 이전에 빚진 것을 다 갚고도 집을 두 채나 사게 되었습니다. 일생동안 놀면서도 먹고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네 축복이 그만하면 족하지 않느냐며 다시 다른 보직으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온전하게 십일조를 바치면 이처럼 축복을 받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오.”라는 부흥사의 말에 교인들은 당연히 ‘아멘!’이라고 응답했습니다. 나이어린 한 신학생은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뇌물도 축복인가?’


마찬가지로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어떤 평신도 지도자가 수뢰 혐의로 검찰에 불려갔습니다. 2천만원을 뇌물로 받은 것을 시인한 그에게 그 돈 어디에 썼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고 합니다: “먼저 2백만원은 교회에 십일조로 바쳤습니다.”


분명한 것은 탐욕과 신앙은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탐욕에 절어 있는 상태로 신앙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삶 전체가 송두리째 바뀌는 생활신앙이어야 합니다. 오늘 누가복음서 본문에는 예수께서 여리고 지역을 들어가 지나가실 때 만난 삭개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오늘은 삭개오의 변화를 통해 함께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죄의 종

 

누가복음서 19장에 나오는 삭개오란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키가 작아서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공동번역은 ‘돌무화과나무’라고 번역했는데,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나무로 미라 케이스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삭개란 이름은 느 7:14에도 등장하는데, 히브리어로 밝다, 깨끗하다, 순수하다 등의 뜻을 가진 ‘자카크’(זָכַךְ)에서 나온 것이 바로 삭개, 자카이(זַכַּי)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삭개오가 그곳 세무서장이었고 부자였다는 점입니다(2절). 사람들이 “보아라, 저 사람은 먹보요, 술꾼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구나”(눅 7:34)라고 예수를 비난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처럼 예수 당시에 유대 사회에서 세리라는 표현은 죄인의 대명사처럼, 죄인과 동의어로 쓰였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이중적인 문제를 가졌기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먼저 그들은 더 많은 돈을 거둬 착복하고, 또 권력을 남용하여 강제로 빼앗기도 했던 부패한 관료들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로마의 대리인이 되어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여 로마에 바치는 반민족행위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표현으로 한다면 삭개오는 탐욕에 젖어 식민지에서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동시에 부패한 관료였다 할 것입니다.


그런 삭개오에게 뽕나무 위에서 예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 가장 ‘궁극적인 삶의 관심’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저 동족에게서 많은 돈을 거두어 식민 종주국 로마에 바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부를 쌓는 것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깨끗하고 순수하다는 삭개라는 이름 뜻과는 반대로,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사람들에게서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던 사람이었습니다(눅 19:7).


3. 의의 종


로마서 분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죄의 종’이 바로 삭개오의 모습을 정확하게 꿰뚫는 표현이 될 것입니다. 뽕나무 위에 올라갔던 그런 죄의 종을 예수께서 부르셨습니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5절)


앞서 소개한 십일조 이야기들에 나오는 것처럼 뇌물수수나 토색질하는 것, 또는 삭개오의 부유한 살림... 그 모두 결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삭개오가 이제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의 집에 예수를 모셔 들였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눅 19:8).


물론 이 말을 근거로 계산해보면 삭개오가 토색질을 한 총액이 자신의 재산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청렴무구한 공직자는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로마의 식민통치에 앞잡이로 나선 형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께서 삭개오를 특별히 선택하셨는지 그 까닭은 알 수 없습니다. 이름을 부르신 것을 보면 이전부터 아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세리 출신 예수의 제자인 마태(마 9:9)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먼저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90장 찬송 가사처럼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결코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것은 온전히 은혜일뿐입니다.

 

그런 삭개오가 단지 그의 집에 예수를 모셨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셔 들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궁극적 관심의 총체적 변화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삭개오는 더 이상 탐욕에 절어 있는 물질의 노예가 아닙니다. 드디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문익환, <꿈을 비는 마음>) 것입니다. 그처럼 정의롭게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이 소유의 절반을 내놓고 빼앗은 것을 네 배로 갚아주는 그러한 실천의 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제 죄의 종이었던 삭개오가 오늘 의의 종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보시고,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눅 19:9).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 죄에서 해방을 받아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롬 6:17-18).


4.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이사야 40-55장을 제2이사야라고 부릅니다. 바빌론 식민지 시대에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대언한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마치 바벨론 포로기처럼 지난 두 차례의 선거 이후, 마치 우리 사회에 미래가 없고 암담해졌다고 절망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2이사야 본문에서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다시 불러들이겠다. 나의 영원한 사랑으로 너에게 긍휼을 베풀겠다”(사 54:7-8).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얼굴을 가렸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대신 영원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베풀어 주시는 긍휼, 사랑(헤세드, חֶ֥סֶד)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가 탐욕으로 얼룩진 모습을 지워야 하겠습니다. 이전의 삭개오처럼 물질에 대한 욕심에 눈이 멀어 죄의 종이 되어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삭개오처럼 “전해 받은 교훈의 본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써, 죄에서 해방을 받아서 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눅 6:17b-18).


눈앞의 이익, 풍요, 물질에 대한 탐욕, 부패와 비리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진실된 이웃 사랑에 바탕을 두어 정의를 세우며, 평화를 일구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 바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삭개오의 변화를 통해 깨닫는 우리 모든 교우들이 함께 지향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또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입니다. 그런 궁극적인 변화가 없이는 희망도 없습니다. 삭개오처럼 바뀐 삶, 그것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으로 살아가도록 힘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 사회에, 나아가 이 세계에 그런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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