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약 5:13-20, 왕하 5:1-14, 막 5:1-12
강림 후 열 넷째 주일이다. 이번 성령강림절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다. 코로나19의 기세가 여전하지만, 그래도 우리 지구촌에 백신을 개발하고 보급하게 해주셔서, 치명적인 위기를 넘어가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런데 지난 주간은 아프카니스탄 소식이 뉴스의 중심이라고 본다. 미군의 전격적인 철수로, 그간 쫓기던 무장 테러조직인 탈레반이 수도 카불까지 무혈점령하여 나라를 접수하는 진풍경이 발생한 것이다. 그들은 워낙 잔인하게 사람들을 학살하던 테러집단의 집권이라서, 이제 그곳을 떠나려는 수많은 난민들로 인한 대혼란은 이제 세계인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여성과 아이,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기독교인(基督敎人)들의 생존문제가 큰 기도제목이 되었다.
그런 중에, 우리나라 군용기가 그곳에 들어가, 그곳 아프칸 국민 390여명을 전격적으로 우리나라의 충북 진천으로 데려오는 소위 ‘미러클’ 작전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우리 국민들이 아프칸에서 일할 때, 여러 분야에서 우리에게 협력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기에, 얼마 후 텔레반 정권이 수색하면, 그들의 생명이 매우 위험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는 판단에서, 우리 정부가 그들의 동의를 얻어서, 그들을 빼내어 '특별 공로자'란 이름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실로 어느 나라도 못하는 일에, 세계인의 찬사가 잇고 있다. 이번 일은 코로나19로 인한 K-방역에 이은, 또 다른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인 쾌거로 평가될 것이다.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스위스처럼 영세중립국가가 되면 좋은 처지이다. 세계 4대 강대국들(미일중러) 틈새에서 자존(自尊)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위치를 재정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안겨주셨다. 바로 코로나19란 판데믹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세계 최강대국들이 휘청거리며 퇴행적인 모습을 보여 준 동안에, 우리 대한민국에게 K-방역 모범국가로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우월한 국가의 수준을 드높이는 계기를 안겨 주셨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우리는 최근 개발도상국가들의 모임인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의 추천을 받고, 미국을 비롯한 G-7국가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선진국(先進國) 대열의 일원으로 진입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 바람에 우리는 강대국의 ‘의존(依存)국가’가 아닌, 자주 역량을 갖춘 ‘조율(調律)국가’라는 매우 특별한 위치에 들어서게 되었다(원장코너.강림후(7) 참조). 그 근거는 이것이다.
우리를 선진국으로 추천한 개발도상 국가들의 요청이 중요했다. 한국이 이제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서, 자기들과 선진국들 사이에 교량 역할을 잘 해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한국이 세계의 이곳과 저곳의 형편을 잘 살펴서, 세계를 하나 되고 균형 있는 공동체로 만들 수 있는 역할을 하는 나라가 되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런 점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세계의 변방의 하나가 아니라, 역할에서 중심국가가 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곧 특정 강대국에 의존하고 사는 나라가 아니라 세계의 다양한 나라들 가운데에서, ‘모퉁이 머릿돌’이 되어달라는 것이다!
이런 우리의 입장을 대변하듯, 최근 우리 대통령의 외국 정상들과 나누는 인사 속에는 그 정신이 잘 드러난다. 그는 우리의 기술 역량을 선진국들과 나누기도 하겠지만, 그들과 함께 도움이 필요한 약소국(弱小國)들을 지원하자고 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같은 위기에, 자기들만 살기에도 힘들어하는 시대에-, 힘들고 고통 하는 이웃(국가)들에게도 협력과 도움을 주겠다는 개방적인 발언을 계속 한다.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 하고 있다-!
우리 예수님을 다시 본다. 성서의 모든 기자들은 예수님을 단순한 구세주란 공식적인 호칭 이외에도, ‘모통이 머릿돌’이라고도 입을 모은다. 그것은 예수님이야말로 서로 갈라져서 도저히 인간적으로 화합하고 하나 될 수 없는 두 계층의 틈새에 들어가셔서, 당신의 십자가의 몸으로 양쪽이 서로 교통하고, 왕래하게 하며, 하나 되게 하는 디딤돌이요 다리가 되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양측 사이의 높은 담들을 허무셨기 때문이다.
우리 대한민국의 설 자리가 어딘가? 변방이 아닌 세계의 중심 민족으로 존재하려면, 군사력이나 경제력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제사장적 위치를 취하는 자세와 마음이다.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서, 축복할 자 축복하고 격려할 자 격려하며, 저들 모두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가는 따뜻한 가슴과 품을 소유한 민족이 되는 것이다. 방탄소년단(BTS)이 그런 지혜를 잘 발산하고 있더라.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이 우리 교회들부터 세상과 이웃에 ‘공감(共感)하는 능력을 가진 공동체’가 될 것을 요구하신다. 무엇으로 공감하나? 기도(祈禱)와 찬송(讚頌)으로 한다. 서신서 첫 절을 보자. -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13절).
사실 코로나 이후의 교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어떤 시련과 역경이 와도, 여전히 일어나 빛을 발할 교회들은 분명히 있다. 대체 어떤 교회가 생존하게 될까? 바로 하나님과 세상 인간들을 향한 공감 능력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들이다. 오늘 본문들은 그런 측면에서, 생존 가능한 교회 공동체와 생존이 불가능한 교회 공동체를 함께 소개한다.
o 기도(祈禱)의 힘을 보유한 공동체
먼저 야고보서 본문 13-18절까지를 주목해 달라. 어떤 용어(用語)가 가장 빈번하게 나오나? 바로 ‘기도하라’는 말이다! 무려 8번이나 강조되고 있다. 본문은 특히 고난당하는 자(13절), 병든 자(14절), 불의로 고통 하는 세상(17-18절)들을 중보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강조점은 기도의 힘은 크다는 점이며, 교회 공동체인 의인들이 간구하는 힘은 크다고 역설한다(17절). 심지어 기도는 자연재해를 좌우할 정도라 말한다(18절).
그 중, <병든 자를 위한 기도>는 가장 관심을 가져야할 대목이다. 예수께서는 평소 제자들에게 ‘병자들 치유를 위탁하셨다(마10:1,8 막6:13, 눅10:9). 사도 바울은 치유활동이야말로 교회에 부여된 은사 중 하나임을 증언했다(고전12:9,28절). 야고보는 병자들이 건강을 회복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교회 장로가 감당할 일이라 말해주었다(14절).
☞ 여기의 병은 분명히 육체적인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질병들도 당연히 포함한다. 질병 치유를 위한 기도는 교회 목양의 드높은 과제이다. 병을 보는 시야가 필요하다. 병자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머무는 존재이고, 나약한 영혼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존재다. 특히 그들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도들의 경험들이 잘 축적(蓄積)된 교회와 개인들은 결코 무너지지 아니한다.
o 지속가능한 교회의 좋은 사례 – 나아만 공동체 (나아만 교회)
아람(시리아)의 국방장관인 나아만은 나라의 대단한 용장으로서, 여호와의 은혜를 입어 전쟁에서 나라를 건지기도 했던 인물이었다(1절,상). 하지만 그는 나병 환자였다(1절,하). 학자들은 그의 상태를 악성 피부병인 마른버짐으로 본다. 그것은 그가 직접 왕을 찾아갈 정도였기 때문이다. 본래 나병환자는 외출해서 사람 만남이 불가능했다. 그가 왕을 찾아가 외출을 허락을 받는 모습은 그 정도였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결국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의 도움으로, 그 더러운 병을 치유 받는다(14절).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나아만 자신보다도, 나아만 주위의 인물들의 적극적인 협력들, 곧 나아만이 치유받기를 원하는 주변의 공감대가 결집되면서 얻어낸 작품이었다, 적어도 다음의 세 사람들이 그의 치유에 결정적 역할을 감당했다.
1) 나아만 아내의 수종을 들던 어린 여종이다(2-3절). 그가 나아만의 치유에 결정적인 정보를 주었다(3절). 나아만을 살리는 복음을 제공한 것이다! 이 여종은 누군가? 그의 부하들이 이스라엘 침공 시에 포로로 잡아온 소녀였다. 그 바람에 그 소녀는 강제로 가족과 헤어지고, 그 집의 몸종이 되었다. 가슴에 한(恨)을 품고 살고 있었던 자였다. 그런 그가 자기 원수일 수 있는 집 주인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고 그 소식을 주었다.
2) 왕(王)의 협력이다(5절). 왕도 자기의 충성스러운 신하인 나아만의 아픔에 깊이 공감(共感)하면서, 그의 치유의 방안을 듣자마자 크게 기뻐하면서, 적극 협력하고 나왔다.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는 친서(親書) 한 통과, 필요한 재물(예물)들을(은 10달란트/금 6,000개/의복 열 벌)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긴장 속에 이스라엘로 떠나는 병든 신하를 나라의 왕까지 기꺼이 응원한 것이다.
3) 그와 동행하였던 보좌관들이었다(13절). 그들은 그곳의 선지자 엘리사가 찾아온 나아만에게, 집밖으로 나와 보지도 않은 체, ‘요단강에 몸을 7번 씻으라’라는 말만 전하는 등의 문전박대(薄待)를 당하자, 거기에 자존심이 상하여 격분(激忿)한 나아만이 ‘다시 뒤돌아가겠다’며 강경대응을 하자(11-12절)-, 그런 주인을 적극 만류했던 인물들이다. 그들은 상관에게 ‘선지자의 말대로 해보시고, 퇴각을 결정하시라’고 강권하였다. 결국 나아만은 고집을 꺾고, 요단강에서 선지자의 지시대로 7번을 씻고 나면서, 그 피부가 깨끗해졌다(17절).
☞ 만일 보좌관들의 저지가 없었다면, 나아만의 회복이나 행복은 불가능했다. 나아만은 엘리사와의 대면(對面)이나 사례(謝禮)도 못한 체, 다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인물이 되어 귀국했다. 몸과 영혼 모두를 치유만 받고 돌아간 것이다-.
☞ 진정한 복은 이렇게 주변의 공감자-협력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데에 있다. 우리 교회도 이런 마음과 마음이 엮어진 공동체들을 이루어야 한다. 예수께서도 이 나아만의 믿음을 칭찬하셨던 바를 함께 기억해 두자(눅4:27절).
o 지속 불가능한 나쁜 사례 – 거라사 공동체 (거라사교회)
거라사(일명-데가볼리/마8:23)는 이방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서, 갈릴리 호수의 동남쪽 60km 에 위치한 곳이다. 그곳에서는 더러운 귀신 들려서, 밤낮 무덤이나 산에서 살던 사람 하나가 있었는데, 그 사람 안에 들었던 귀신은 그를 묶어둔 쇠사슬과 고랑을 깨뜨릴 정도로 초 강력하여, 누구도 그를 제어하지 못했다(4절). 그러면서 자신의 몸은 돌로 해치며 자해(自害)하던 괴인(怪人)이었다. 얼마나 온 마을 전체에 큰 부담스런 존재였을까!
1) 그런 그가 마침 그곳을 찾아오신 예수를 만난다(2절). 예수를 알아본 그는 이미 떨고 있었다. 예수께 엎드려 자기를 괴롭히지 말아달라며 빌었다(6-7절). 하지만 주님은 그런 귀신의 종노릇하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즉시 그 귀신에게,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라고 명하셨다(8절). 사실 그 귀신은 ‘군대(軍隊-레기온)’이란 이름을 가진, 로마군 약 6,000명의 병력의 수준의 힘을 가진 센 귀신이었다(9절).
2) 그 귀신은 예수께 간청했다. 처음엔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말아달라’고 했다가 통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자기들을 방목 중인 돼지 떼(약2,000마리)에게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빌었다. 결국 그에게서 쫓겨난 귀신은 그 돼지 떼에 들어갔고, 그 바람에 미쳐 날뛰기 시작한 돼지들이 바다에 뛰어 들어가 몰살(沒殺)되었다(11-13절).
3) 문제는 그 소식을 접한 여러 읍내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들은 정신이 온전해 진 자와 그를 그 잔인한 귀신에게서 살려낸 예수를 축하하거나 환영하지를 못했다. 오히려 두려움에 휩싸여서, 예수께 찾아와 이렇게 간청하였다 -‘우리 마을을 떠나 주십시오’(14-17절 참조). 그 바람에 그 마을들은 구원 받을 천재일우의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예수를 좇고 싶어한 자는, 치유 받았던 바로 그 한 사람뿐이었다(18절). 비극이었다!
4) 왜 그랬을까? 그 거라사 공동체는 고통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고, 웃는 자와 함께 웃을 수 있는 공감(共感)능력이 없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송할 공감대가 전무했다. 모든 것이 물질 중심적으로 손익(損益)계산만 하며 살았다. 그러기에 생명의 구원자 예수가 오셔서, 최대의 숙원인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는데도, 그들은 예수께 자기들을 떠나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게 바로 거라사 공동체의 현실이었다. 이런 공동체에 어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겠는가?
☞ 그런 모습은 저 나아만 공동체와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를 보인 것이다.
o 교훈이 정말 크다. 우리는 지금 온갖 질병들과 싸우며 살아간다. 개인-가정-국가 모두가 그렇다. 그 싸움에서 누구는 이겨내고, 누구는 패망한다. 어떻게 극복해낼까? 공동체적인 대용에 눈이 떠야만 하겠다. 개인만 잘한다고 공동체가 다 사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가 함께 살아나야 한다. 공감력을 결집할 리더십을 갖춘 이들이 필요하다
여종과 왕과 측근들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구원하려는 공감대가 살아있던 나아만 공동체가 우리의 모델이다. 명심하자. 물질이나 탐욕이 지배한 거라사 공동체로는 백전백패다. 그 대신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라는 아프리카 반투족의 우분트(Ubuntu) 정신으로 살면 된다. 이게 우리 민족과 교회와 가족과 개인들이 살고 승리할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