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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3-2) - " 새 눈이 열리는 구원 " / 김진수 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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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강림후(13-2) - " 새 눈이 열리는 구원 " / 김진수 목사

관리자 2021-08-20 (금) 09:22 3년전 1094  

본문) 사 42:14-16, 행 21:39-22:16, 막 10:46-52


아주 어렸을 때, 늘 놀러 다니던 친구 집에서 친구 누나의 소지품이 분실된 일이 있었습니다. 성격이 좀 까칠했던 그 누나에게 그 날 놀러갔던 아이들 전부가 호출 당했습니다. 내 물건 가져간 애가 있으면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반응이 없자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거기에는 이불로 무엇인가를 덮어놓았는데 이불 속에는 쌀을 담은 말(斗)이 있고 거기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이면 누가 그 물건을 가져갔는지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긴장이 됩니다. 모두 이불을 뒤집어쓰게 하고, 깜깜한 이불 속에서 초에 불을 붙였습니다. 갑자기 흰 쌀을 담은 말속이 환해졌고 정말 뭔가 보일 것 같았습니다. 그 누나가 엄숙하게 말합니다. “저기 누군가 보이지! 보이잖아!” 그러자 한 아이가 “응! 뭔가 보여”그럽니다. 제 눈에는 안 보이는데 아이들은 하나씩 뭐가 보이는 것 같다고 합니다. 누나의 눈이 저를 향했습니다. 너는? 아! 저도 그만 뭔가 보인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그 누나가 단호하게 “누가 가져갔는지를 알았으니 빨리 가져오면 용서해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물건을 찾았는지는 기억이 없는데 그 후로부터 그 누나가 내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는 것 같아 피해 다녔던 기억은 남아있습니다.


눈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합니다.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산과 강, 하늘과 구름, 형형색색의 꽃들과 아름다움을 봅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의 시력도 중요하지만 심미적인 안목도 중요합니다. 마음의 눈이 닫히면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아름다움, 내게 주어진 풍성함에 대한 감사, 이웃들을 향한 기쁨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 시력입니다. 영적 시력을 상실한 사람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새 세상을 바라보는 눈(사42:14-16)


유다는 영적 시력을 상실했던 백성입니다. 육체의 눈에 보이는 것들만 보고, 믿고 신뢰했습니다. 군대와 무기를 신뢰하고 눈에 보이는 부귀영화와 쾌락을 사모했습니다. 모든 것의 주가 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고 떠났으며 결국 바벨론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 사42:18 말씀에서 하나님은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맹인들아 밝히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42:14-16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을 떠나 잘못된 길로 걸어가는 이스라엘을 그냥두지 않으시고 그들을 건져내십니다. 그냥 유다의 대적들을 물리치셔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하시고 그들의 영적시력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셔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마치 아이를 출산하는 산모가 큰 고통을 참아가며 아이를 낳듯이(14절),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포로생활의 큰 고통 속에서 비로소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음성을 듣는 새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심청전에는 아버지 심 봉사의 개안(開眼)을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후 심청은 용궁에 들어가 후한 대접을 받고 죽은 어머니 곽씨 부인을 만나고 연꽃 속에 들어가 환생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 아버지가 눈을 뜹니다. 감격스럽지요! 그런데 그 다음 어떻게 되었나요? 심봉사 가족만 잘되고 잘 먹고 잘 삽니다. 그것이 결론입니다. 심봉사가 눈은 떴는데 겨우 나만 보이고 우리 집 식구만 보입니다. 다른 시각장애인들의 고통도 보이고 모든 가난한 자들의 아픔이 보이고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정의와 평화와 사랑이 가득한 새로운 나라의 꿈이, 비전이 안보입니다. 좀 아쉽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바벨론 포로에서 건져내실 때 그들에게 새 눈이 열리게 하사 그래서 과거에 알지 못한 전혀 새로운 길, 방황하는 길이 아닌 지름 길, 어두운 곳이 아닌 광명한 곳으로 인도하고,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눈을 열어 예루살렘! 온 세상이 참 평화와 평강을 누리는 나라, 우리 가족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새 하늘 새 땅, 새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15-16절).


“내가 산들과 언덕들을 황폐하게 하며 그 모든 초목들을 마르게 하며 강들이 섬이 되게 하며 못들을 마르게 할 것이며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어둠의 세상을 비추는 빛(막10:46-52)


복음서의 말씀 막10:46-52은 바디메오가 예수를 만남으로 날 때부터 보지 못했던 시력이 밝아진 이야기입니다. 바디메오는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없었고 스스로 먹고 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버지의(디메오) 아들로만(바 디메오) 불렸습니다. 그가 여러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에 관한 소문을 들었고 그 주님이 오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듣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주님이 계신 방향을 몰라 소리를 지르며 나아갑니다(47절). 사람들이 꾸짖어도 포기하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주님을 부릅니다(48절). 마침내 예수님이 그를 부르신다는 소리를 들었고(49절) 맹인의 생계수단인 겉옷마저 벗어버리고 달려갑니다(50절).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신뢰하며 나아간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는 놀랍게도 단순히 “눈 뜨는 것”이 아니라 “보기를 원한다(51절, αναβλέπω, to look upwards, recover sight)”고 했습니다. 단순히 눈만 떠서 평생 가난에 찌들었던 비참한 모습만 보는 것만이 아니라 참으로 바르게 “보는 것”, “바른 시야, 통찰력”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눈을 떴습니다. 그가 본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만 비참한 현실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 천한 맹인의 소리를 들으시고 눈을 열어주시는 분이 누구신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참 구원자, 새 나라, 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주실 분, 가장 영광스러운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눈을 뜨자마자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눈은 빛을 통해 사물을 봅니다. 우리가 눈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사실은 그 사물에서 반사하는 빛을 보는 것입니다. 빛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 눈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눈을 떠도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빛이신 예수,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원자 예수를 보아야 비로소 우리의 존재의 목적,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율법의 목적이 바로보이고 성전의 존재 이유와 의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역사의 주인이 보이고 우리 삶에 들어 온 많은 사건들이 왜 들어왔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비로소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을 보고 그를 따르게 됩니다.


새 눈이 열린 사울(행21:39-22:16)


서신서 본문 행21:39-22:16은 사도바울의 회심에 대한 증언입니다. 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매우 왜곡된 시각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신실한 율법준수(율법의 의)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이성적으로나 철학적으로 결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의 의를 거부하고 은혜로 받는 구원을 외치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에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있는 사울에게 주님은 정오의 태양보다 더 큰 빛으로 오셔서 그의 주위를 비추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물리적인 태양빛 아래서 참된 진리를 바로 보지 못했던 사울에게 더 큰 빛으로 비쳐주실 때, 그동안 잘못 보았던 그의 눈은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과거의 시력을 잃은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빛만 보였고 그동안 그가 보아왔던 시력은 상실한 것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옳다고 여긴 것, 소중하다고 여겼던 것이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것들이 쓰레기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새 눈이 열렸습니다. 진정한 이 역사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 핍박했던 그리스도 예수인 것이 보였습니다. 그분이 참 메시야요 하나님이요 구원자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나니야의 안수를 받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눈의 비늘이 벗겨지며 참 진리를 보는 눈,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보는 눈,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는 새로운 시력을 얻었습니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지옥 같은 세상에서 저 천국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눈이 새롭게 열리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지, 누가 온 세상의 통치자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인지, 영원한 삶에 대한 시야가 열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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