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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2-2) - " 기쁜 소식을 누리고 전하는 아름다운 발걸음 " / 신솔문 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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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강림후(12-2) - " 기쁜 소식을 누리고 전하는 아름다운 발걸음 " / 신솔문 목사

관리자 2021-08-13 (금) 15:07 3년전 1323  

본문: 사 42:18~43:7, 롬 10:5~17, 막 7:31~37


1.


못 보고 못 듣고, 말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졌던 헬렌 켈러의 수필에 이런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나는 두 눈이 멀쩡한 친구들에게 무엇을 보았는지 묻곤 합니다. 최근에도 친한 친구 하나가 숲 속으로 긴 산책을 갔다가 나를 찾아왔기에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특별한 것은 없었어”라는 답을 들었지요. 그녀의 말을 쉬이 받아들인 것은 내가 이미 그러한 반응에 익숙하며, 이미 오래전부터 눈으로 본다는 것은 사실 아주 적은 것을 볼 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시간이나 숲 속을 걷고서도 특별히 관심 가질 것을 찾지 못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보지 못하는 나는 그저 만지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것을 수백 가지나 찾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우리나라 속담에도 ‘눈 뜬 맹인’이 있는데요. 여유로운 산책에서도 이렇게 놓치는 일이 많으니 일상생활에서는 이런 일이 더 많겠지요. 이렇게 건성으로 사는 사람들이니 인생에 대해서는 놓치는 일이 더더욱 많을 것입니다. 


‘그땐 왜 몰랐을까’ -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사람들이 흔히 중얼거리는 말입니다. 이 중얼거림을 제목으로 한 시(詩)도 있습니다(동화작가 정채봉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 행복이었던 것을 / 그땐 왜 몰랐을까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 내 세상이었던 것을 / 그땐 왜 몰랐을까 

절대 보낼 수 없다고 / 붙들었어야 했던 것을 / 그땐 왜 몰랐을까


하지만 ‘그땐 왜 몰랐을까’와 같은 회한(悔恨)은, 그나마 다행(多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생 자기가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는 사람이 태반이니 말입니다. 출애굽기의 이집트왕 같은 자들입니다. 이러한 인생의 결과는 불행(不幸)입니다. 최악은 자기 성찰을 모르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집단입니다. 결국 모두가 불행해지지요.


오늘 이사야서(42:18~25) 말씀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이 그런 집단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보았으나 마음에 새기지 않고, 귀가 열렸으나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20절). 하나님 말씀과 그 실천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21절, 24절). 이러한 잘못을 알아차리도록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알지 못했습니다(25절). 세상에 대한 감각은 예민하나 하나님의 뜻과 영적 진리에는 이토록 둔감한 사람들이 애석하게도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아니, 우리 인간들입니다. 이러한 인생의 곤경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요?



2.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리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르는(사 35:5~6) 회복의 역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야(그리스도)임을 드러내실 때 강조하셨던 말씀(마 11:5, 눅 7:22)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마가복음 본문도 기본적으로는 예수님의 메시야성을 드러내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가복음 맥락에서, “귀먹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신 오늘 본문은 “눈먼 사람”을 치유하신 벳세다의 기적(8:22~26)과 함께, 심오한 상징적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눈과 귀를 고침 받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게 되는 방법과 과정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과 영적 진리를 못 보고 못 듣는 영적 마비는 예수님께로 나아올 때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영적 마비가 풀리는 것을 하나님 세계에 ‘접속 가능’한 것으로 비유한다면, 마가복음 본문은 하나님과 연결해주는 영적 비밀번호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천기누설’이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현금지급기 이용하다가 비번을 잊어버려 당황하신 적 있으신가요? 세 번인가 틀리면 거래가 정지되고 일이 복잡해집니다. 이런 걱정을 하면서 마지막 비번을 넣었는데 맞았다고 나올 때 통쾌하던데요, 고린도후서 1장 20절은 예수 그리스도 신앙의 소중함과 통쾌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오케이(O.K.) 사인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도 율법 종교에 사로잡혀 예수내구주 신앙의 가치를 못 보는 자들에게 이 진리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9절).


둘째, 영적 마비가 풀려 신앙의 진리를 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신경이 살아나더라도 재활치료가 필요한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신앙의 길에 들어섰다고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길(道)을 가야 합니다. 신앙의 진리를 더 깊게 이해해보고 그 진리를 삶에서 체화해가는 것이 구원의 길, 신앙의 길입니다. 벳세다의 기적에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두 번의 안수를 통해 눈먼 사람을 고치시는데요, 옛날 만화 영화에서 손오공이 둔갑술을 구사할 때 몇 번 실패 후 성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수님의 기적을 이런 경우로 보면 안 됩니다. 단계적인 치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영적 시력 회복의 점진성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구원의 길을 산에 오르듯이 한 단계 한 단계 전진해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또 다른 재미와 보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예수내구주 신앙으로 구원의 길에 들어서고 그 길을 가는 성도들은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가복음의 ‘에바다 기적’이나 벳세다 기적이나, 그 시작은 회복이 필요한 사람을 누군가 예수님께로 인도한 일이었습니다. 스스로 예수님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시사한다는 생각입니다. 맞는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어떻게 예수 믿게 되었습니까? 구도자(求道者)가 아니셨다면 누군가를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 말씀은 그러한 사람들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걸음”(15절)이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3.


오늘은 나라와 민족과 사회를 위해 기도하는 평화통일주일입니다.


많은 것을 보았으나 마음에 새기지 않고 귀가 열렸으나 귀담아 듣지 않고, 하나님 말씀과 그 실천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이사야서 말씀에서 저는 지금의 우리나라 현실이 아른거렸습니다. 이런 세태에 대한 책임에서 우리 신자들이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소금이 되어야 할 신자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내구주 신앙으로 신앙의 길에 들어선 것은 잘된 일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길이 여기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더욱 잘 분별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신앙적 성숙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내구주 신앙과 성도의 성숙한 삶을 주위에 전파하는 실천을 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과 이 사회를 위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지만 우리 성도들이 추구하는 기본은 이 세 가지입니다. 기쁜 소식을 누리고 전하는 아름다운 발걸음을 가진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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