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해] 강림후(12-1) - " 열려라 " / 김거성 목사본문) 사 42:18-43:7; 롬 10:5-17; 막 7:31-37 1. 평화통일주일 안녕하십니까? 성령강림 후 열두째주일이며, 평화통일주일인 오늘, 먼저 교우 여러분께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2. 장애인 복지와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 얼마 전 몇몇 단톡방에 지난 5월 5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학교 가는 길>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44226. 에 대한 상영중지 가처분신청을 막아달라는 긴급한 탄원 요청이 올라왔습니다. 2017년 9월 토론회에서 장애아동 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학교설립을 호소했던 서울 강서구 특수학교인 서진학교 개교 과정을 다룬 다큐인데, 그 상영중지 가처분 취소를 위한 탄원서였습니다. 이를 반대하며 토론했던 분이 10초 정도 모자이크 처리되어 등장하는데, 며칠 전 신문을 보니 그분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은 취하하였고, 대신 그 장면을 삭제해달라는 가처분신청을 새로 냈다고 합니다.
제 주변에도 발달장애로 고통받는 가정들이 있고, 또 경기도교육청에서 장애학생들의 특수교육과 관련한 활동을 조금 했었기에 저는 장애학생들이나 부모들이 겪는 어려움을 아주 약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치매에 대해서와 같이 지금 거의 가족들이 짊어지고 있는 발달장애인에 대한 책임을 국가가 크게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지난 해 후반기 사회복지현장실습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말미암아 실습생을 받아주는 시설들이 거의 없어서 어려움을 겪다가 겨우 아는 분의 아는 분의 소개로 한 발달장애인 거주시설에서 현장실습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실습기간 중 짧지만 장애인 본인들이나 또 그곳에 아들을 보낸 부모나 다른 가족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고자 했지만, 실제 가족이 아닌 상황에서 이런 생각은 애초부터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라는 정책적 과제의 타당성과 시급한 필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던 점 또한 실습생이었던 제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큰 성과였습니다. 3. 장애인의 인권과 복지 히틀러 시대에는 우생학적인 관점에서 장애인들을 세금을 갉아먹는 존재로 비하하였습니다. 나치당 월간지 <새 민족>(Neues Volk)는 표지(위 사진)에 “동족 여러분, 이것도 여러분의 돈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유전병 환자 사진을 싣고, “그에게 일생동안 5만 마르크의 돈이 들어간다”며 ‘반(反) 장애인’ 캠페인을 전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Aktion T-4’이라는 장애인 제거 작전을 실행하여 1939년 9월부터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30만명을 정신병원에서 일산화탄소 가스 등으로 살해했습니다. 우생학, 인종청소, 비용절감 등이 그 이유였다고 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다시는 이런 일들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유엔 인권선언을 제정하게 됩니다. 제1조는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형제애의 정신으로,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에는 마땅히 장애인도 포함됩니다. 이후 2008년 발효된 ‘장애인의 권리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the Rights of Persons with Disabilities) https://www.law.go.kr/조약/장애인의권리에관한협약 참고)도 나왔습니다. 우리나라도 2009년 비준하여 당사국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 협약은 “장애인이 모든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를 완전하고 동등하게 향유하도록 증진, 보호 및 보장하고, 장애인의 천부적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증진하는” 목적을 추구한다. 또한 “천부적인 존엄성, 선택의 자유를 포함한 개인의 자율성 및 자립에 대한 존중, 비차별, 완전하고 효과적인 사회 참여 및 통합, 장애가 갖는 차이에 대한 존중과 인간의 다양성 및 인류의 한 부분으로서의 장애인의 인정, 기회의 균등, 접근성, 남녀의 평등, 장애아동의 점진적 발달능력 및 정체성 유지 권리에 대한 존중”을 일반 원칙으로 채택하고 있다. 우리나라 장애인복지법에 따르면 “장애인이란 신체적ㆍ정신적 장애로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로 정의되어 있으며, 주요 외부 신체 기능의 장애나 내부기관의 장애, 발달장애 또는 정신 질환으로 발생하는 장애를 포괄합니다. 장애인복지법 제2조 장애인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으며,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으며, 국가ㆍ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그 밖의 모든 분야의 활동에 참여할 권리, 또 장애인 관련 정책결정과정에 우선적으로 참여할 권리가 있습니다. 장애인복지법 제4조 장애인의 완전한 사회 참여와 평등을 통하여 사회통합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장애인복지법 제3조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또는 이후 삶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장애를 가지게 된 것만으로도 서러운데 이로 말미암은 2중, 3중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아직도 우리나라 장애인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장애인들에게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라는 2차적인 어려움이 여전하며, 이에 더하여 정신적, 경제적 어려움까지 심각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개최한 ‘혐오표현 진단과 대안마련 토론회’ 자료집에 따르면 청소년들이 혐오표현(hate speech)에 대해 그렇다고 동의하는 정도가 절반 정도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장애인들에 대한 표현과 동의율을 살펴보면 “장애인은 진짜 불쌍하다”(동의율 50.2%), “애자, 정신병자 같다, 왠지 다운증후군 느낌”(52.1%), “장애인은 집에나 있어라”(50.4%) 등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 ‘혐오표현 진단과 대안마련 토론회’ 자료집 집, p. 28. 이러한 차별과 편견으로 말미암은 고통과 상처로 말미암아 삶을 비관하고 비극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4. 장애인 해방선언
예수님 당시의 장애인들에 대한 태도는 요한복음서 9장에 나오는 제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묻습니다: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요 9:2) 장애인들은 죄의 결과로 장애를 갖게 된 것이라는 전제가 이 질문에 깔려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복음서 본문에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막 7:32)이 나옵니다. 요즘 표현으로는 청각장애인이라 하겠습니다. 그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시기를 간청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아마도 가족들이었을 것입니다. 손을 얹어 주시라는 요구였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33절) 요즘의 위생관념, 특히 코로나-19 상황에서 보면 분명히 비정상적 행위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레위기 21:17 이하에는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음식 제물을 바치러 나올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청각장애는 그 명단에 없지만, 당시 유대교 정결례의 관점에서 본다면, 장애인과 함께 하는 것은 꺼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장애인을 만지는 것을 넘어, 그와 자신이 한 몸이라는 것을 강조하듯 행동한 것입니다. 그런 모습 자체가 이미 장애인은 불결하며 죄인이라는 편견으로부터 벗어난 것이고, 그와 공감하는 행동이며, 나아가 그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과 동일시한 행위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시고서 탄식하시고, 그에게 ‘엡파타’(Ἐφφαθά) 하셨습니다.(34절) ‘엡파타’는 이는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그 장애인에 대한 공감과 해방선언입니다. 이로서 그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게 된 것입니다.(35절) 5. 사회와 국제질서에서의 장애
오늘 구약성서 본문에는 “귀가 먹은 자들, 눈이 먼 자들”(사 42:18)이 언급됩니다. 그런데 제2이사야는 장애인 비하는 아니지만, 이를 비유적으로, 또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스라엘이 “많은 것을 보았으나 마음에 새기지 않았다. 귀가 열려 있었으나, 귀담아 듣지 않았다.”(20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이야말로 귀가 먹고 눈이 먼 것입니다. 이처럼 장애를 개인적 차원으로만 국한시키려 하는 우리들에게도 이런 통찰력이 절실합니다.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또 귀가 먹고 눈이 먼 우리 사회와 국제질서의 장애를 향한 깨우침이 요구됩니다. 특히 남과 북으로 분단된 상태에서 서로 더불어 살아가야 할 한 겨레임을 잊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동족을 향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전쟁연습에 몰입하는 한반도를 향한 경고입니다. 이런 비정상을 벗어나도록 구원을 약속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지만 보지 못하고, 말씀을 듣지만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것이 제이사야의 고발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정의는 국제 질서에서도 관철되어야 합니다. 코로나-19 백신을 독과점하고 패권 실현의 수단으로 삼는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세계가 마치 자신들만을 위한 잔치상인 것처럼 국제사회에서 군림하는 패권 세력들이 있습니다. 오늘 예언자의 메시지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6. 기쁜 소식 전하라 예수 구원 하신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만민이 구원에 이른다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만민에는 마땅히 장애우들도 포함해야 합니다. 삶을 괴로워하는 여러 형태의 소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게 하셨던 것처럼 오늘 이 시대에 여러 형태로 힘들고 어렵게 살 수밖에 없는 이웃들을 보살펴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사명입니다. 마찬가지로 만민은 단지 개인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 국제 질서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오늘이 평화통일주일입니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살고 있는 이산가족들이 있습니다. 또 이 겨레 모두가 나뉘어져 살고 있는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이 분단과 적대를 끝내어 이제는 서로서로 위로하고, 드디어 다시 하나가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증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제질서에서도 몇몇 강대국이나 권위주의적 통치자들이 세계에서 정의실현을 가로막고 탐욕에 절어있는 현실 속에서 많은 민중들이 제대로 듣지 못하고 또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을 향해서 우리는 함께 아픔을 나누며, ‘엡파타’, ‘열려라’ 외치며 기쁜 소식을 전하고, ‘예수 구원하신다’ 찬송하며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성도들의 행진을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