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29:12-24, 행 8:4-13, 막 1:21-28
코로나 19 재난 시기에도 변함없이 하나님 은총으로 살아간다. 인생에서 늘 좋은 일만 계속되지 않고 뜻하지 않는 고통의 시기가 있다. 하지만 지금 경험하는 코로나 19의 어려움이 1년 이상 계속되는 것은 말할 것 없고, 온 세계가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이 재난 시기를 타개하는 특별한 방법을 짜내어 비대면 예배를 드리고 있다. 어려울수록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 성령강림절 시기가 주는 교훈이 남다름을 느낀다. 세상이 신음하는 최악의 때에도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도우신다. 이 비상시기의 교회 표어를 ‘일어나 빛을 발하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강조한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출발 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그때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세례받고 물에서 나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 위에 내려오고, 하늘에서 들려준 음성이‘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기뻐하는 아들이다’라는 것이었다. 이 놀라운 사건과 그 경험이 예수님의 전 생애를 관통한다. 예수님은 이 사건 이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고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다. 그 시험 사건을 성령에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셨다고 한다.
이 힘든 시기를 견뎌내는 때, 성령강림후 절기를 의미 깊게 보내고 있다. 성령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게 한다. 기도를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하시면서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 (눅 11:9-13)
1. 구약의 말씀
이사야 29장은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기록하고 있다.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여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슬프겠는가. 그 때문에 ‘슬프다 아리엘이여 다윗의 진 친 성읍이여 연부년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내가 필경 너 아리울을 괴롭게 하리니 네가 슬퍼하며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1~2절) 나라 없는 혓소리를 경험한 나라는 이 처지를 실감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말을 못 하고 자신의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개명하고 살았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징용으로 끌려갔으며 여성들이 정신대로 잡혀가 성 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 그 처지를 표현할 말이 무엇이겠는가. 이사야 29장의 쓰라린 외침 ‘슬프다!’라는 절규가 가슴에 와 닿는다.
한 나라가 서고 그 나라가 패망하는 역사의 과정을 본다. 당하는 쪽에서는 무섭고 슬픈 심판을 의식할 것이고, 이긴 쪽에서는 성공과 승리에 취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현실이 너무 비참하여 ‘사면으로 슬퍼하고 애곡한다’라고 하였다.
지금 우리가 견디기 어려운 코로나 19의 고통을 1년 반이 지나도록 시원한 해법 없이 마스크 착용, 거리 두기, 여행 자제 등등 수많은 불편을 감수한다. 전 국민이 이 재난 극복에 힘을 기우리면서 고통을 감수하고 있다. 이것이 인류에게 주어진 심판처럼 보인다. 국민들이 이동하고 생계를 위해 활동하는 것에 지장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학업을 위해 등교하는 행위 또는 종교활동을 위해 모이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을 직시하면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해야 할 것이다. 심판 같은 현실을 불평하거나 거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긍정적 대응이 필요하다.
이사야 29:13~24은 이런 문제들을 깨닫게 한다. 유다의 위기와 하나님의 구원을 직시하게 하며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에서 큰 교훈을 얻는다. 심판이 저주와 같고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실망에 빠지게만 할 것인가. 거기에서 다시 일어날 수 없는가. 이런 해답을 주는 귀한 말씀이다. 어두운 밑바닥에서는 그 다음에 일어날 기회가 주어진다. 이것을 깨닫는 자가 누구일까. 이 때문에 사람들이 볼 것을 봐야 하고, 참으로 들어야 할 것에 귀 기울여야 한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영화롭게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하고 있다.’라고 탄식하신다. 하나님께서 이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치신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 한번 놀랍고 기이한 일로 이 백성을 놀라게 할 것이다’14절
재난을 당하거나 병 들 때, 실패하여 낙망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한다. ‘왜 나에게 이렇게 합니까?’라고! 이런 의문을 품는 사람들에게 ‘만들어진 물건이 자기를 만든 사람을 두고 “그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 빚어진 것이 자기를 빚은 사람을 두고 “그는 기술이 없어!”라고 말할 수 있느냐?’16절. 불평과 원망 분노와 증오는 불행을 부를 뿐이다. 심판에서 회복을 보고 밑바닥 현실에서 희망을 보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이다. 이런 비전을 품을 때 회복이 이루어지며 새날이 다가올 것이다.
본문에서 ‘그날이 오면 듣지 못하는 사람이 두루마리의 글을 읽는 소리를 듣고 어둠과 흑암에 싸이니 눈먼 사람이 눈을 떠서 볼 것이다. 천한 사람들이 주 안에서 더없이 기뻐하며 사람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19~20절) 이런 깨달음의 자리가 선택받은 사람들의 복된 선물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 같은 선물이기에 ‘혼미하던 사람이 총명해지고 거스르던 사람이 교훈을 받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신다.
2. 서신서 말씀
사도행전은 초대교회가 성령으로 탄생한 역사 기록이다. 박해받아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번성한 모습을 본다. 어떻게 그런 기적 같은 역사가 이루어지는가. 이 현상을 그 어떤 설명으로 가능할 것인가. 박해받을수록 더욱 번창하게 되는 이유 말이다.
행 8:4~13, 사도행전 8장에서 교회가 모진 박해를 받으면서 어떻게 복음이 전해지는 지 그 해답을 말해 준다. 이 산 역사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진 사건이었다. 교회가 박해를 받기 시작하자 그 교회는 다시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져 없어질 것으로 생각했던 박해자들을 놀라게 할 대 역전극이 생긴다. 그 흩어진 자리에서 전파되는 성과가 나타난다. 이것이 사마리아 전도였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19라는 사태로 교회가 타격을 받고 있다. 모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교인 수가 감소하고 있다. 게다가 기독교 신앙을 왜곡한 소수 목사의 불명예스러운 처사가 나타나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비난한다. 밖에서 받는 타격이 큰데, 안에서 생기는 악재가 교회를 아프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성령의 강한 역사를 따라야 한다. 온갖 박해 중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또 다른 길로 나간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를 본받아야 한다. 그는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복음을 사마리아로 가서 전한다. 거기서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악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이것은 그들에게 치유의 사역만을 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 마술하는 시몬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 결과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리는 복음이 전파되었다. 성령이 사람을 변하게 하여 하나님 나라를 살게 한 것이다.
3. 복음서 말씀
막 1:21~28, 4 복음서 가운데 최초로 기록된 마가복음에 주목해야 한다. 마가복음 서두가 더욱 그렇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이 본문이 원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는 제목이다 (1:1). 얼마나 단순하고 장엄한가. 다른 복음서의 서두와 비교해볼 만하다. 이 첫마디 말이 마가가 전하려는 예수의 생애와 활동의 전부이다. 이렇게 확연한 선언에 유의하자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복음이다’라는 선언이다.
그것을 처음부터 확인한 것이 예수님의 세례 사건이다. 거기서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그에게 임하시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 사랑하고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조익표 목사는 이것을 예수님의 전 생애를 이끌어간 <원체험>이라고 하였다. 다시 확실하게 1장 1절의 주제문을 주목하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 그 자체로 복음이라는 것이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 그 자체인데, “사랑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자기 몸으로 구현한 사람 자신”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복음 그 자체라는 선언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그 사람 역시 기쁜 소식, 복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우리 역시 이 땅에서 하나님 아들이라는 최고의 신분을 누리며,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복음이 되라는 것이다. (참조 빌 4:1, 살전 2:20)
오늘날 <복음>이 더 이상 누구에게도 기쁜 소식이 되지 않는 까닭은, 그것이 예수님과 바울의 <복음>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음의 원관념을 무시하고 ‘빈말’로 전락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이 복음의 원관념을 찾아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기쁨으로 충만해야 하겠다. 복음서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제자 넷을 부르신 후 처음으로 더러운 귀신이 들린 사람을 고치신 말씀이다. 가버나움은 예수의 초기 활동 거점이며 거처가 되었던 곳이다. 거기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란다. 그 이유는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어떤 상식보다 더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몰두해 빠져있는 더럽고 추한 삶의 태도를 포함한다. 예수님은 그런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신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말라 하신 예수님! 쟁기를 잡은 농부가 뒤돌아보지 말라는 예수님, 들의 백합화가 솔로몬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시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존재로 사는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진솔하게 살펴보자. 제대로 배우고 깨달은 사회과학자나 정신 심리 분석가가 진단한다면 무엇이라고 할까. 세상이 이렇게 과학적으로 발전하여 기술 문명이 첨단에 이르렀다는데, 뉴스마다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사건들이 연속되고 있으며, 최고의 자살률, 최고의 저출산, 산재 사건 최고, 우울증 사회……. 너무 부정적 예를 들어서 마음 아프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사는 현장 그대로이니 어쩔 것인가.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처음 이적을 행하신 마가복음 말씀에서 <더러운 귀신>을 내쫓으셨다는 본문이 찡한 감동을 준다. 이 같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이 권위가 있고 권세 있는 가르침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이 권위 있는 가르침에 귀 기울여야 하겠다.
시편 104편 24~30
주님 , 주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피조물이 주님만 바라보며, 때를 따라서 먹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주께서 공급하여 주시면 그들은 좋은 것으로 배를 불립니다.
주께서 호흡을 거두어들이시면 그들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주께서 주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께서는 땅의 모습을 새롭게 하십니다.
최고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 아들로 사랑하며 새롭게 살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