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29:13~24, 행 8:4~13, 막 1:21~28
1. 고난의 전복
1) 예수님 부활 승천 후 남겨진 제자들은 모이기에 힘쓰고 성령의 강림에 따라 새로운 선교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곧 예수공동체는 큰 시련에 봉착했고 매서운 핍박에 직면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그 핍박자의 전위에는 후에 바울이 된 청년 사울이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모이던 교회는 사방으로 쫓겨났다. 이 때 교인들은 얼마나 두렵고 또 신앙에 회의가 들었을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목격하면서 각 자 흩어졌던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어렵게 다시 모였다. 열심히 모여 기도하고 찬송하다 보니까 성령 강림을 체험하면서 엄청 뜨거운 열정의 공동체가 되어 목숨 걸고 복음을 전했다. 그러면 강력한 힘을 지닌 로마 제국도 꼼짝 못하고 복음에 걸림돌들이 기적적으로 해체되어 예수 복음이 세상에 충만한 꿈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2) 예루살렘의 현실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다. 전능하신 복음 앞에 어떤 세력도 맥없이 물러날 것이라 기대했지만 현실의 힘은 너무 강력했다. 로마 권력과 유대교 권력이 합작하여 교회를 핍박했다. 초대교회는 결국 모두 쫓겨났다. 어떤 이는 야반도주하고 어떤 교인은 가족도 버리고 몰래 예루살렘을 탈출하는 신앙인들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현실의 고난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헤아리지 못한다. 우리는 당장의 어려움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그 속에 담아놓으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제자들도 예루살렘에서 쫓겨나는 아픔만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겠지만 결과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이 밖으로 축출된 사건은 초대교회가 예루살렘에 갇히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이들을 내쫓은 유대교도 놀랐고 쫓겨난 기독교인들도 놀랐을 것이다.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선교도 뜻하지 않은 결과였다. 전통 유대교는 오랫동안 사마리아를 부정하다 여겼고 죄 많은 사마리아는 멸망의 대상이었지 구원의 대상이 아니었다. 사마리아를 구원의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핍박의 결과로 사마리아까지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
3)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길고 깊은 계획을 실행하신다. 시야가 짧고 얕은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에 당장에 내게 닥친 어려움 앞에서 불평과 원망 또는 서운한 마음을 토로한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깊은 맛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내게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치면 우리가 제일 먼저 할 일은 그 속에 담아 놓으신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찾고 이해하는 것이다.
2. 말씀과 표적
1) 작자 미상, 사마리아 성의 부흥,
사도행전 8장의 중요한 지점은 흩어진 사람들, 정확하게 말하면 핍박 받아 쫓겨난 사람들이 고통의 삶 가운데서도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니 그 성에 기쁨이 충만했다는 것이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행전 8:4,8)
사마리아 성의 중심인물은 빌립이다. 여기 빌립은 사도가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뽑은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다. 빌립은 사도가 아니었음에도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였다.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 성에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사마리아 성 전체에 기쁨이 충만했다.
이 놀라운 역사가 가능했던 것은 온전히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복음 선포와 그 결과인 사마리아 성의 큰 기쁨은 인간의 지혜나 능력보다는 성령이 임재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성령강림절처럼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을 비추고 있다.
그림의 중심에는 빌립이 아니라 이후에 소식을 듣고 달려온 베드로와 요한이 차지하고 있다. 베드로는 왼손에 천국의 열쇠를 들고 말씀을 전하고 있고 그 왼쪽에 요한이 오른 손에 십자가를 들고 무릎 꿇은 여인에게 안수하고 있다. 초대교회 권위 체계 안에서 집사 빌립은 그렇게 중심인물은 아니었다.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사마리아 사람들 개개인에게 성령이 임재하셨다.
세상에는 복음을 사모하는 선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악이야말로 구체적 현실이다. 아마도 화면 왼쪽 윗부분에서 어느 사도가 악의 무리들을 심판하는 것 같다. 구원의 뒷면은 심판이기 때문이다.
화면 오른쪽의 계단과 2층 계단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차례로 세례를 받고 있다. 빌립은 세례를 주는 이들 중 하나였을 것 같다. 이어진 8장 후반부에서 빌립이 에디오피아 고관에게 세례를 베푸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기에 사마리아 성에서의 선교 장면에서도 빌립에게는 세례자의 역할을 맡겼을 것 같다.
어쨌든 큰 틀에서 신앙적으로 버림받은 사마리아 성에 구원의 기쁨이 충만했다. 오 이 기쁨, 우리는 어떻게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3. 큰 기쁨의 삶
1) 버림받은 사마리아 성에 기쁨이 충만했던 것은 사마리아 사람이 빌립의 말씀을 듣고 또 그가 행한 표적(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표적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기적이다.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행전 8:6)
우리의 삶에 기쁨이 충만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구원에 이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안내하는 등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하시는 구원의 말씀이라는 믿음이 중요하다. 이것이 말씀의 권위다.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막 1:21~28)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다. 바리새파나 사두개파 등 그 누구도 주님의 권위에 반기를 들 수 없었다. 오늘의 목회자는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데 이런 권위를 가질 수가 없다. 설교자의 근본적인 고민은 증거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전하는 사람은 여러분과 똑같이 죄 많고 연약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매주 듣는 설교가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야 구원이 임재하고 큰 기쁨이 생기는데 그렇게 되려면 두 가지가 중요하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가 온전한 영적 권위를 갖고자 몸부림을 치면서 준비해야 하고, 또 하나는 그 말씀을 받는 교인들이 설교자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일지라도 적어도 예배 시간에 설교만큼은 지금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고백하며 듣는 것이다. 이 두 자세가 진지하게 설교를 통해 만나지 않으면 설교는 그냥 좋은 말에 머물고 복음이 되지 못하며 복음이 아니면 우리 삶에 큰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없다. 나는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에 부족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동시에 여러분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한 주간 168시간 중에서 딱 한 시간 예배드리는데 그 한 시간 집중하는 게 힘든 걸까. 세상의 모든 잡생각‧핸드폰‧TV‧인터넷 등 모두 단절하고 예배에 집중하기 바란다. 이런 것들은 한 시간 끊는다고 죽지 않지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한 시간 계속 집중하지 못하면 우리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2) 사마리아 성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기적=표적이 나타났다. 표적은 단순하게 놀라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지금도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은 제쳐놓고 기적만 쫓아다니면 안 되지만 현대인의 과학적 사고방식에 치우쳐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부인하거나 폄하해서도 안 된다. 세상에는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많다. 하나님의 기적은 2천 년 전 사마리아에서뿐만 아니라 여전히 우리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단 옛날 사람들은 기적을 보면 바로 하나님의 역사라고 믿었지만 오늘의 현대인들은 기적을 보면서도 기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다.
30년 전 백령도 해병대 군목할 때, 겨울에 포대대가 야외 실전 연습을 한다.
정말 눈물 나게 추운 날씨에 해병들이 벌판에서 차가운 포를 만지며 조준하고 연습하면 나는 뜨거운 커피를 끓여서 부대 본부 앞 교회가 있는 북포리에서 훈련장인 연화리(?)를 방문한다.
교회 승합차 타고 포 훈련장을 방문해서 위문하고 돌아오는데 내 앞에는 대포를 뒤에 실은 4.5톤 트럭 5~6대가 간다. 눈 오는 날 언덕길을 줄지어 올라가는데 우리 교회 승합차도 맨 뒤에 따라갔다. 그 때 이민재장로님이 군종병으로서 승합차를 운전하고 나는 그 옆자리에 탔다. 그런데 눈이 오는 언덕길에서 차들이 올라가지 못하고 헛바퀴를 돌고 있었다. 나는 승합차 앞좌석에 앉아서 저러다가 차 미끄러져 내려오겠다고 농담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정말로 차가 미끄러졌고 차 뒤에 끌고 가던 긴 포신이 교회 승합차 앞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서는 내 가슴 30cm 앞에서 가까스로 멈췄다. 당시에 농담하다가 좀 놀라긴 했는데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그 다음날 포 대대 대위가 교회로 음료수를 사갖고 찾아와서 많이 놀라시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나는 사실 뭐 별로 놀라지도 않았고 후유증도 없어서 그 때는 그냥 지나갔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 가끔 그 장면이 떠오를 때가 있다. 앞에서 뻔히 보고 있는데 포신이 차 앞 유리창을 꿰뚫고 들어와서 바로 내 눈 앞에서 멈춘 모습이다. 생각할수록 뒤늦게 아찔하다. 만약에 차가 조금만 더 미끄러졌으면 나는 그 자리에서 가슴이 뭉개져서 아무 소리 못하고 그냥 사망했을 거다. 그 때는 그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인 것을 모르진 않았지만 처절하게 느끼지는 못했다. 뒤늦게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를 몸서리치게 느끼면서 감사하게 된다.
3) 우리의 삶을 가만히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주신 적이 많다. 문제는 분명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인데 정작 은총을 입은 사람들은 그것이 기적인 줄 잘 모른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한다. 직접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하나님의 손이 내려와서 놀라운 일을 보여주면 기적이고 우리가 일상적인 방법으로 해결이 되면 기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일반적인 방법 속에 주님이 함께 계시고 움직이신 건데도 말이다. 신앙이란 일상적인 것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발견하고 그것이 기적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분명 내 질병은 병원에서 의사가 고친 것이지만 그 의사의 손길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움직이셔서 실수 없이 치료하신 것을 발견하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가 이 믿음의 눈을 가지면 좋겠다.
4) 버림받은 땅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 그것은 빌립을 통해 하나님께서 구원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기적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오늘 내게 구원의 길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내 귀를 최대한 말씀에 집중해야 하고, 내 삶의 구체적인 곳곳마다 베풀어주신 놀라운 기적의 손길을 찾는 이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기쁨이 넘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