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욜 2:1~11, 살전 5:1~11, 막 4:21~34
1. 뜨거운 날씨와 습한 바람 그리고 종종 내리는 비가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아직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곧 장마가 시작될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작년 중부지방 장마는 6월 24일부터 시작해서 54일동안 계속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0년만에 기록을 깼다고 이야기합니다. 기상청에서는 6월말쯤 장마시작을 예상하고 있지만, 올해도 작년처럼 긴 장마, 작년처럼 비가 많이 올 확률이 다소 많다고 하니 여러 분야에서 잘 준비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기상 전문가들은 이제 우리의 기후는 더 좋아질 수 없고, 조금씩, 그리고 빨리 나빠질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2. 주님께서는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인간들이 천지의 기상은 분간하면서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우리의 시대는 천지의 기상을 분석은 하지만, 분간하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3. ‘분간’한다는 말은 사전에 “사물이나 사람의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따위와 그 정체를 구별하거나 가려서 앎.”이라고 합니다. 그 의미에는 지금을 알고 분별해서,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한다는 뜻도 담겨있습니다. 분간하면서, 그 분간한 것을 삶에서 적용하지 못한다면, 삶에서 준비하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요, 미래에 희망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장마가 곧 시작되고, 기후변화로 인하여 작년처럼 폭우가 내릴 수 있는 상황에서(아니면 심각한 폭염), 과학자들과 기상전문가들이 분석과 예측하고 경고를 하는 상황에서 준비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사람이요, 어리석은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종말, 마지막 때가 그렇습니다. 구약에서 언급하는 마지막 심판의 때인 ‘하나님의 날 (Yom Yahweh ,the day of Yahweh)’ 신약에서 말하는 ‘주님의 날’이 우리에게 있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6. 이 마지막 때인 종말, 하나님의 날은 구약의 여러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경고입니다. 이 하나님의 날은 그들이 기대했던 그 때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이후에 지연되고 있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늑대 소년의 ‘늑대가 나타났다’란 허구의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전했던 하나님의 날은 심판의 날이자 구원의 날이었고, 현재적 심판과 구원, 그리고 미래적 심판과 구원이 임할 것이라는 두 의미를 함께 전했습니다.
7. 요엘 선지자는 당시 이스라엘에게 임했던 계속된 가뭄과 극심한 메뚜기 재앙을 보면서 이를 하나님께서 온 누리를 심판하실 조짐으로 보고 사람들에게 영적 각성의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호와의 날이 얼마나 두렵고 피할 수 없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알려줌으로, 궁극적으로는 회개의 선포였습니다. “늦기 전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שֻׁ֥בוּ shub)”는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8. 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주셨던 요엘의 심판의 날에 대한 말씀과 회개의 촉구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간직하고 복음대로 살아가려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도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온전히 회개의 삶을 살지 못하는 어둠의 시대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9. ‘여호와의 날’과 같은 ‘주님의 날’에 대한 말씀을 들은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다른 초대교회와 같이 유대인들의 핍박에 따른 어려움이 있었지만, 성령님께서 교회를 보호하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도우셔서, 마케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될 만큼 성숙해졌습니다. 그들의 신실한 믿음은 각처에 퍼졌습니다.
10.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살전 1:3)로 가득한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입술로는 믿노라고 신앙고백을 하지만, 그들 삶에서는 복음의 능력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리스도로 사는 삶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신앙은 너무나 가볍기만 합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인들이 들은 복음은 그저 말로만 전해지는 복음이 아닌 사도 바울의 삶을 통해 역사하는 “성령과 능력과 큰 확신”으로 전파된 복음이었습니다.
11. 그런 신실한 교회에 신앙적 문제가 있었습니다. 재림의 문제였습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신앙은 주님의 승천과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제자들이 주님의 승천 후에 담대하게 기도하며 주님의 증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곧 오시리라는 재림 신앙이 그들에게 가장 큰 주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일을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으로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라고 예언하셨습니다.
12.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지나치게 재림 신앙에 사로잡혀있었는지 아니면 재림 신앙을 삶 속에서 적용하는 일에 미숙했었는지 모르겠지만, 바울은 재림 신앙에 관한 올바른 인생관과 직업관에 대해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신도들 중에서는 주의 재림이 자기들 생전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생업이나 가업까지도 아예 포기하면서, 오직 오실 주님만 기다리며 살겠다고 하는 무리가 나타난 것이다(살전4:10-12절).
13. 이런 재림의 문제로 영적혼선을 가지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사도 바울은 선명하게 말씀합니다. 그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은 언제 올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은 확실하다. “주님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도둑은 우리가 예측하고 모를 때 오는 것처럼, 주님의 날도 그렇게 올 것이다.
14. 그러나 주님의 날이 오는 그때는 사람들이 평안하다고, 안전하다고, 세상 걱정할 것 없다고 방심하고 여유부릴 때,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질 때 올 것이고, 임신한 여자가 해산의 고통이 갑자기 오듯이, 그 주님의 날은 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5. 그런데 이때 이 주님의 날이 구원의 날이 되는 사람들이 있고, 심판의 날이 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심판의 날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저주와 심판, 두려움이지만, 구원의 날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이요 구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6. 사도 바울은 간절한 마음으로 이런 심판과 구원의 날이 있기 때문에 미래에 이루어질 그날에 붙잡히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며, 오히려 지금 현재적 삶에서 믿음의 길을 걸어갈 것을 촉구하고 회개의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17. 구약의 ‘여호와의 날’과 초대교회 공동체의 ‘주님의 날’에 대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 천국에 대한 말씀을 통하여 현재적 구원과 재림의 복음을 말씀하십니다.
18.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에는 씨앗에 대한 이야기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의 말씀으로 씨앗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신 것입니다.
19. 네가지 땅에 뿌려진 씨앗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인데, 사람들이 씨를 뿌려 놓으면, 밤낮 자고 일어나지만, 그 사람들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한다. 저절로 열매를 맺게 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그 다음에는 알찬 낟알이 되어 추수를 하게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20. 겨자씨의 비유에서는, 겨자씨를 뿌릴 때에는 작고 보잘 것 없어서 세상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지만, 심고 나서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을 정도로 커진다는 말씀이었습니다.
21. 이 모든 말씀의 공통점은, 하나님 나라, 천국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고자 하셨고, 가르치셨고,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나라를 씨앗을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22.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것은 마치 이 땅에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땅에 심을 때에는 작고 연약하고, 살아날 수 있을까 걱정도 하지만, 그리고 지금 당장 나지 않지만, 우리가 심어 놓기만 하면, 그 하나님 나라의 씨앗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장시켜서 내일, 먼 훗날 큰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23. 과일의 씨앗이든지,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든지 심을 때는 작지만,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고, 진심으로 살아있는 씨앗을 심었다면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씨앗은 지금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매를 얻고 먹는다면, 우리는 내일을 위해 그 열매에서 씨를 다음 사람들을 위해 계속해서 뿌려야 한다는 말씀도 묵상하게 됩니다.
24.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첫 번째 말씀이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선포하시는 말씀이고, 이 땅에서 펼칠 주님의 사역을 알리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25.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렸던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왔다는 의미이자, 그들의 전통에 있었던 여호와의 날, 마지막 때가 가까이왔다는 뜻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그런 여호와의 날이 찼기 때문에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하고, 전향적인 삶으로서의 복음의 삶을 살아갈 것을 우리 주님께서는 선포하신 것입니다.
26.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 시대 속에서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그 삶을 살아가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의 구체적 설명이 씨의 비유입니다.
27. 현재적 구원을 통한 미래적 구원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서(here and now)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복음의 씨앗을 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믿음이라는 씨앗을 불신의 세상에 뿌려야 하고, 희망이라는 씨앗을 절망의 세상에 뿌려야 하는 것이고, 사랑이라는 씨앗을 메마른 이 땅에 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 씨앗을 뿌려야 지금이 아니라, 내일, 그리고 미래에 그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열매가 맺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28. 저는 그 가운데 오늘 희망의 씨앗을 여러분에게 강하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희망의 씨앗을 뿌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희망의 씨앗을 뿌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29. 사도바울은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면서 깨달은 것이 바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는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희망, 참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30. 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희망을, 이 희망의 씨앗을 세상에 뿌리자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열매로서 먹지는 못하지만, 내일과 미래를 위해서는 그 희망의 씨, 예수 그리스도라는 씨를 이 세상에 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31. 우리가 그 희망의 씨를 뿌려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은 이 세상의 희망이 깨진 사람들,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더욱 사랑하셨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희망을 주시는 위대한 사역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병으로 인해, 귀신들림으로 인해, 경제적인, 정치적인 문제들에서 나오는 힘듦 때문에 빠져있는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보시고 진정 마음 아파하시고, 눈물을 흘리셨고, 희망 자체이신 예수님을 전해서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화되는 삶을 이루신 것입니다.
32. 그 희망을 전하시는 주님의 사역은 힘들고 어려움의 연속이었고, 끝내는 십자가의 언덕길을 올라가 죽음을 맞이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33. 주님은 희망이 있는 싸움을 하셨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희망이 있는 싸움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믿음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온 세상이 암울한 어둠뿐일때도 우리들은 온 몸 던져 싸우거늘,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희망을 가진 싸움은 행복하여라. 앞길 전혀 보이지 않는 어둠일 때도 우리들은 암흑과 싸우거늘 빛이 보이는 싸움은 얼마나 행복하랴. 희망이 있는 싸움은 얼마나 행복하랴. 새벽을 믿는 싸움은 얼마나 행복하랴.
34. 이제 우리가 희망의 싸움을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교우들이 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