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욜 2:1~11, 살전 5:1~11, 막 4:21~34
오늘은 성령강림 후 다섯째주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창립 35주년 기념주일을 맞습니다. 우리 교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면, 무엇보다 지금까지 우리 양무리교회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 선한 목자이신 삼위일체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또한 지난 35년간, 그리고 여전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오직 겸손과 눈물로 충성과 헌신과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모든 교우들께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후에도 우리 양무리교회의 선한 영향력이 빛과 소금이 필요한 곳곳에 미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처럼 오늘은 우리 교회적으로 매우 뜻깊은 날입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날이 있습니다.
“모든 기독교도는 신앙의 자유가 있다.”
바로 313년에 밀라노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칙령을 내리면서 로마에 기독교를 공인합니다. 그간 온갖 환난과 핍박을 받아왔던 기독교인들이 맘껏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밀라노 칙령에 이후에 기독교에 대한 평가는 신학자들과 역사가들에게 맡기고, 잠시 기독교를 공인했던 콘스탄티누스의 이후의 삶을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337년 질병으로 사망합니다. 분명히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와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그는 죽기 바로 직전까지 세례를 미루었다는 것입니다. 첫째 이유는, 세례를 받아서 교회에 속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교황의 지배하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최대한 늦추고 싶었던 셈입니다. 또 하나 이유는, 세례를 받아 죄사함을 받는다는 교리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리는 세상에서 욕망을 따라 살다가 자기가 편할 때 쉽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허가증이 되었습니다. 괜히 일찍 세례를 받아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하고, 그 뒤부터 육신이 누리고 싶은 것들에 제약을 받는 부담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세례 받은 이후에 지은 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죽기 전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꺼번에 모든 죄를 씻으려는 계산된 의식인 셈입니다.
한 가지 가정을 해봅시다. 여러분이 만일 콘스탄티누스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실컷 죄를 지으며 살다가 죽기 직전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아 구원받는 인생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평생 그리스도인로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따라 살아가고 싶습니까? 어떤 이에게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대답하기 쉬운 질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세 본문 말씀은, 이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주십니다. 서신서의 “주의 날”, 구약의 “여호와의 날”, 복음서의 “추수 때”를 말씀하시면서, 그 때를 맞이하기까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즉 과정에 따른 결과를 말씀하십니다. 우리말 속담으로 표현하자면, “콩 심은데 콩이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입니다.
콩을 수확하고 싶은데, 땅에 팥을 심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콩 심은데 콩이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데,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세계의 이치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콩을 심으면서 팥을 수확하고 싶어하는 많은 이들에게 오늘 말씀은 “그런 일은 없다!”라고 하십니다. 썩은 것을 심으면서 풍성한 수확을 얻으려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그런 일은 없다!”라고 하십니다. 이런 관점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봅시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향합시다. 그리하여 마침내, 겨자 씨 한 알이 땅에 심겨져 자라고, 훗날 큰 가지가 되고, 그 가지의 그늘에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는, 오늘 세 본문이 주시는 말씀의 시작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날은 “주의 날”, “여호와의 날”, “추수 때”로 표현됩니다.
서신서의 표현에는,
3절을 봅시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여전히 평안하고 안전하다며 그 날을 모른척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한들 그 때를 피할 수 없습니다. 마치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갑자기 오듯이, 오히려 멸망이 갑자기 이르고 결코 피할 수 없는 낭패를 당합니다.
구약에서는
1절, 2절을 봅시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됩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남 유다의 요아스 왕 때입니다. 남 유다는 왕부터 시작해서 백성들에게까지 우상 숭배 사상이 만연했습니다. 이 때에 요엘 선지자는 두렵고 무서운 메뚜기 떼의 재앙으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 재앙의 날을 “여호와의 날”로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택함받은 백성들이라고 할지라도 마지막 때와 그 때의 심판은 결코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복음서에서는,
24절을 봅시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주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반드시 너희가 헤아림 받는 당사자가 될 날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이뿐 만 아니라, 씨를 뿌리고 추수할 때와 겨자씨가 큰 가지를 내는 비유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질서와 하나님의 세계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 일이 아니고, 타인의 일이라며 거부하고, 무시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때가 아닙니다. 고스란히 내게 닥칠 일임을 알고 분별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십시오.
자,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임할 주의 날과 여호와의 날과 추수의 때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이 말은 곧, 과정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에 대한 숙제를 우리에게 던져 줍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길라잡이가 됩니다. 가깝게는 가족과 교우들에게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인이요, 새 하늘 새 백성으로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향수를 담을 그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노력하게 합니다.
그리고 대비할 때, 비로소 그 날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별의 순간이니, 점괘이니 하면서 운을 찾기도 하고, 운을 따르기도 한다지만, 하나님의 세계는 운이란 것은 없습니다. 준비하지 않고, 대비하지 않고, 과정을 성실하게 채우지 않으면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주어진 오늘부터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또 하나는, 그러면 당장 오늘부터 어떻게 대비하며 살아야 할까요?
서신서 9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먼저, 우리는 멸망의 대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아야 할 존재들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구원에 있지, 심판에 따른 멸망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있기에 다음의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6절과 8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우리는 구원의 빛의 자녀와 빛이 지배하는 낮의 백성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무지와 나태함과 어둠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낮에 속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아서, 오직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믿음과 하나님의 백성이 보여야 할 사랑과 그 과정의 결과로 얻게 될 하나님 세계의 백성이 되는 소망으로 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살아가는 곳곳에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구약 11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시고 그의 진영은 심히 크고 그의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랴” 앞서 말씀드린대로, 요엘 선지자는 우상을 숭배하는 남 유다 요아스와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고, 반드시 불의 심판이 뒤따를 것을 경고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나님께 먼저 택함을 백성들입니다. 40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지만,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위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옆으로는 12개의 지파가 서로 사랑하며 주변국에 선한 영향력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이랬던 그들이 오늘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습니다. 왜그랬을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향해야 할 방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과정을 그렇게 채우니, 결국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녀들이라는 지위와 위상을 모두 빼앗겨 버릴 위기에 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과거에만 미련을 두며 붙들리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가며, 미래 지향적인 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할 때, ‘여호와의 날’은 심판과 재앙의 차원을 넘어 신실하고 의로운 자들에게는 도리어 구원의 날이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복음서 25절입니다.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씀입니다. 선을 뿌리면 선을 얻을 것이요, 악을 뿌리면 악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타인에게 인정을 받으며 좋은 대우를 받고 싶어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원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큰 가지가 되어 그 그늘에 공중의 새들이 깃드는 인생이 되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을 먼저 인정하고, 타인을 소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씨를 뿌리고 가꾸어야 합니다.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지 않으려면, 그만한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저절로 되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 양무리교회가 창립 35주년을 맞이하는데, 35년 전에 뿌려진 겨자씨 한 알이 이처럼 공중의 새들이 깃들 만큼 큰 가지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립니다. 이후에도 우리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함으로, 더 큰 가지가 되어 더 많은 생명들이 깃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트코인이니 부동산이니, 여기저기에서 일확천금의 광풍이 부는 요즘 세상입니다. 뭔가 풍성한 것으로 채우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일확천금을 얻으려는 세상의 습관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려는 것은 아닐지 안타깝고 우려스럽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들이 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간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준비와 대비가 있어야 합니다.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던 콘스탄티누스의 구원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권한이기에 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해 본 하나님은 도둑같이 이를 마지막 때를 기다리며, 주어진 하루하루를 잠들지 말고 오직 깨어서 정신을 차리라고 하십니다. 이런 인생을 살아가든, 저런 인생을 살아가든 주님 오실 날을 누구나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 때엔 분명히 우리의 삶을 정산하고 심판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깨우치게 해 주십니다. 부디 되는대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씨앗을 뿌리시기를 바랍니다. 덕을 세우는 일에 앞장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날에 하나님께 인정과 칭찬, 그리고 풍성한 수확을 얻기 위해 이 땅에서부터 준비된 인생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