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룻 1:8~18, 갈 3:23~29, 요 4:7~26
오늘은 6.25 한국전쟁 71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우리교단이 한국전쟁기념 주일을 민족화해주일로 지키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화해는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주변상황이 바뀌어도 평화는 오직 누군가 사랑으로 먼저 막힌 장벽을 훌쩍 뛰어 넘어가야 화해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장벽 치는 것’은 쉽지만 한 번 쳐있는 ‘장벽 치우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화해의 시작’은 어렵지만 ‘화해의 결실’은 가을 들녘처럼 어느새 다가옵니다.
오늘 설교는 먼저 남북교류와 화해의 역사를 간단히 언급하고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분단된 조국은 6.25 한국 전쟁이후로는 서로를 주적으로 삼고 원수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경색된 관계를 완화시키고 남북교류의 문을 연 것은 “교회”였습니다. 1972년 미, 중 수교와 함께 세계적인 데탕트시대가 열리고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해외 기독인들’이 남북교류의 물꼬를 트고 직접 북한을 방문하거나 ‘북미주 기독자회’ 모임에 북측교회 대표들을 초청해서 민족화해를 위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는 WCC의 중재로 KNCC와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이 일본의 도잔소와 스위스의 글리온에서 모여 통일을 위한 주제발표와 성만찬, 성경공부를 하며 분단 50년이 되는 1995년을 ‘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하고 매년 8.15 직전 주일을 “남북통일을 위한 기도주일”로 지키기로 합의했습니다. 때마침, 남북교류를 법률로 보장해주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1990. 8)”이 제정되었고, 1994~95년까지 연이어 북한의 전 지역을 휩쓴 자연재해와 북한의 2/3가 침수되는 홍수로 인해 남한교회가 북한의 “조그련”을 창구로 대대적인 인도적 지원을 하게 되면서 북한선교의 장이 크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통해 남북관계가 분단이후 가장 긴밀한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가졌고, 모든 통일 논의가 정치권으로 넘어가면서 그간 교회와 민간에서 열어 온 통일논의와 남북교류는 차츰 소원해졌습니다. 몇 년 전 우리 대통령이 경기장에 모인 15만 북한 주민 앞에서 평화 통일을 외칠 때 금방 통일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정치적으로 잠시 악화된 남북관계로 인해 어렵게 열었던 남북화해와 통일운동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교회와 민간교류까지 닫혀져 있어서 당장 대화의 문을 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경색된 남북관계 앞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세 본문은 모두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사이의 막히고 갈라진 장벽을 넘어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넘어오시는 예수(요4:7-26)
복음서 본문의 앞부분부터 봅시다. 예수께서 유대지역을 떠나 갈릴리로 가시면서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3-4절). 수가마을 입구에 있는 우물에 이르렀어요(5절).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들어갔고 피곤한 예수님은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때는 제일 무더운 제 육시쯤(6절, 12시)이었습니다.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러 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정오부터 후 2시까지 너무 더워서 아무 일도 안 해요. 관공서까지 쉽니다. 이때 우물가에 물 길러 오는 사람은 틀림없이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예수님 그 여인에게 다가 먼저 물을 좀 달라고 청하십니다(7절). 낯선 남자에 대한 경계의 장벽을 넘어갑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하찮은 것 하나를 간절히 요청하는 약자를 경계하지 않으니까요! 민족적인 장벽을 넘어가십니다. 유대인의 접근을 거절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9절)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과 물보다 더 좋은 생수를 구하며 바로 줄 수 있는 존재라고 하십니다(10절). 오랫동안 고달프고 메마른 삶을 살아온 이 여인에게 얼마나 눈이 번쩍 뜨이는 말입니까? 그래서 정말 이분이 그런 능력이 있는 분인지를 곧바로 ‘팩트체크’에 들어갑니다. “물길을 그릇도, 우물은 깊은데 어떻게 생수를 얻겠다는 것입니까?(11절)” “이 우물을 판 야곱보다 당은 더 크신 분입니까?(12절)” 그때 주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니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
처음 본 남자가 자신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두고 있는 갈망을 예리하게 심령 골수를 쪼개듯 꿰뚫어 아십니다. 이 여인은 그동안 자신이 소유하고 싶었던 대상들을 다 소유하며 살아 본 여자입니다. 돈, 권력, 명예, 재능, 그리고 멋있는 남자까지, 대단하지요! 그런데 아니에요! 멋있어 보이지만 같이 살다보면, 잠시는 좋은데 금방 목말라요! 만족이 없어요! 갈증만 나요! 그런데 처음 본 한 남자가 지금 자신이 겉으로는 멋지게 꾸미고 있지만 삶의 참 만족과 기쁨과 행복이 없어 참 생명수를 목말라 찾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채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혼의 장벽을 뚫고 들어와 처음으로 자신에게 갈망하는 것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난 것입니다. 그것은 영생하는 물이었습니다. 가물어도 비가 오지 않아도 갈하지 않는 삶, 고난이 와도 환난이 와도 기쁨이 넘치는 삶, 아무 것 없어도 풍족한 삶, 오늘 죽어도 영생하는 삶에 대한 갈망이 그녀의 심령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그분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돈으로 명예로, 모든 화려하고 놀라운 것으로 장벽을 치며 사는 우리의 겉치장을 뚫고 들어오셔서 죽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과 고독과 불안가운데 사는 우리 영혼의 벌거벗은 모습, 갈하고 주린 영혼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다가오신 영원하신 분을 맞아드리는 순간 우리의 갈망을 채우시고 영원한 생명의 물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생명의 물을 마신 자는 주님을 떠나지 않고 늘 주님과 함께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샘물을 마시며 삽니다.
모든 장벽을 믿음으로 넘는 사람(룻1:8-18)
오늘 구약의 본문 룻1:8-18은 이방의 모압 여인 룻 이야기입니다. 베들레헴 땅에서 온 유대사람, 엘리멜렉 집안의 둘째 아들에게 시집을 왔습니다. 그런데 시아버지의 죽음을 시작으로 그 집안의 두 아들이 잇따라 죽고 세 과부만 남습니다. 어느 날 시모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나를 떠나 새 남편과 너희 동족을 찾아 떠나라”고 말합니다. 나오미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었으니까요? 첫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오미의 거듭된 권면에 동족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 룻은 거듭된 시어머니의 요청에도 요지부동입니다. 룻이 시모에게 고백한 신앙고백이 감동입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17).”
룻은 시댁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여인입니다. 룻은 동서 오르바처럼 예의를 지키며 상식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참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따라 그의 말씀대로 사는 자요, 그에게 이 신앙을 전해준 시어머니를 떠날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어떤 장벽도 하나님과 함께 넘습니다. 민족의 장벽도, 고난의 장벽도, 가난과 질고의 장벽을 넘습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땅, 땅 한 평, 집한 간 없는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그런데 그 낯선 땅에서 “기업 무를 자” 보아스를 만나 새 남편을 얻고 가정이 회복되고 후손을 얻을 뿐 아니라 온 세상의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의의 혈통적 조상이 되고 잠시 누리는 영화가 아니라 영원한 영광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과 함께 모든 것을 희생하고 포기하며 장벽을 넘으며 그보다 더 아름다운 모든 것을 얻습니다.
성령님과 함께 넘어가는 교회(갈3:23-29)
무엇보다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명령, 그가 요구하시는 모든 뜻을 이루며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서신서 본문은 율법의 초등교사 아래 있던 우리를 이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숙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초등교사는 시시콜콜, 코 닦는 것, 손 씻고, 밥 남기지 말고 먹는 것, 시간 늦지 않는 것부터 가르칩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발적으로 스스로 그것을 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24-26)”
믿음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를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주님을 매순간 따르게 하시고 항상 주님과 함께 말씀을 따라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장성한 사람입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처럼 엄마가 깨워야 힘겹게 일어나 세수하고 학교가고 놀고 싶은데 선생님이 내준 숙제라 억지로 책상에 앉아 눈 비비며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가 스스로 일어나고 공부하고 일하고 자원하여 주님을 위해 살도록 도우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의 법을 따라 살 힘을 주시고 순종할 마음을 주십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해야 주님오시는 날까지 믿음의 길, 순종의 길, 거룩한 길을 걸어갑니다.
오늘 우리는 남북이 6.25 한국전쟁 71주년, 민족화해주일로 지킵니다. 진정한 남북화해는 서로 만나고 악수하고 이야기하고 교류하면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남북화해는 모든 장벽을 넘어 우리에게 오셔서 구원의 은총을 주신 주님처럼 모든 가식의 장벽을 뛰어넘고 서로 분노하고 미워하고 아파하는 서로의 상처를 뛰어 넘어 서로의 마음의 깊은 곳에 감추어진 서로를 향한 갈망과 그리움, 하나 됨의 소망이 있는 그 진심을 함께 공감하고 신뢰하며 나누는 자리까지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모든 것을 뛰어 넘어 지금도 우리 분단의 현장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모든 장벽을 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인간의 감정과 불신을 넘어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서로에 대한 약속을 지켜가며 여전 서로에 대한 신뢰를 하나씩 쌓아나가야 합니다.
인간의 구원과 해방의 역사는 빛이신 예수께서 어둠으로 가득한 이 세상으로 건너오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낮이 되었어도 벽으로 막힌 곳에는 여전히 어둠이 있습니다. 그 어둠을 몰아내고 광명의 빛으로 가득한 세상을 만들려면 빛이신 분이 친히 벽을 넘어 어둠 속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직진하는 물리적인 빛, 세상에 속한 빛은 장벽을 뚫지 못합니다. 참 빛, 영원한 빛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빛만이 이 세상의 모든 장벽을 뚫고 어둠을 몰아내십니다. 주님과 함께 작은 일부터 다시 민족화해의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