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호 2:14~23, 눅 14:15~24, 고전 1:18~25
오늘은 우리 교단 총회가 정한 선교주일입니다. 각 지교회 차원에서 할 수 없는 선교사역들을 노회와 총회의 이름으로 감당하기 위하여 특별헌금을 작정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봉헌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몸으로 섬길 수 있는 사역들은 동참하여 하나님의 일에 동역하기도 합니다. 지역-노회 차원에서 풀어야 할 과제들도 있고, 전사회적-총회 차원에서 나서야 할 선교과제들도 있습니다. 개척교회와 미자립교회 선교, 평화통일 선교, 생태환경선교, 사회복지선교, 인권선교, 군선교, 병원선교, 장애인선교, 이주민선교, 농어촌선교, 해외선교, 학원선교 등 다양한 영역들에 걸쳐 귀한 예물이 쓰여집니다. 선교라는 표현을 오늘 본문과 연관시켜 풀어본다면, 하나님나라의 잔치에 초대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잔치는 베푼 이에게는 기쁨이고, 초대받은 이에게는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영광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그 나라 잔치에 먼저 초대된 것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오늘 구약 본문인 호세아서에도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과 위로의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숭배하며 불순종의 삶을 살아가자 그러한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셨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부르셔서 언약을 맺어주실 것을 말씀해 줍니다. 아담과 하와 이래 죄악의 영향력 아래에 살아가던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믿음으로 시작되는 큰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새로운 구원, 새로운 창조를 이루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따르지 않고,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다른 우상들을 숭배했고, 그때마다 선지자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 돌아오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구약 본문의 메신저인 호세아도 그렇게 이스라엘 가운데 보냄받은 선지자 중에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오게 하실 때 다시는 바알을 찾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나의 남편이라고 부를 것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영원한 아내로 맞아들여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로 초대하였고, 자격을 상실해갈 때에도 끊임없이 다시 그들을 돌이키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해 오셨습니다.
3. 하나님 나라 잔치로 초대는 구약을 지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도 계속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외치셨던 메시지가 바로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4:17,막1:15)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거기 모여 있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허락하신 본래의 취지를 벗어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기준과 전통에 따라 지켜지던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되짚어 주셨고, 더불어 그들의 규례를 지킬 수 없었던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 대한 우월감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 눅14:15에서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예수님의 말씀 끝에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왜 그가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는지는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당시 유대인의 문화를 생각하면 그 의도를 알아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복에 그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이들과 이방인들은 참여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고, 반면에 자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민족이자 그렇게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로서 당연히 하나님 나라 잔치에 들어간다는 우월감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의 믿음의 실상을 ‘큰 잔치 비유’를 통해 낱낱이 보여 주셨습니다.
한 사람은 밭을 샀으니까, 다른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사서 시험하러 가야 하니까, 또 다른 사람은 장가 들었으므로 초대받은 큰 잔치에 참여할 수 없으니 양해하라고 응답합니다. 그러자 잔치를 베푼 주인은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고, 길과 산 울타리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그리고 전에 초청하였던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고 비유의 교훈을 맺습니다.
어찌 보면, 그 잔치가 뭐라고 남의 잔치에 내 삶의 중요한 일들을 뒤로 미뤄야 하나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잔치는 뒤로 미룰 수 없는 잔치인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의 복뿐만 아니라 영생을 얻고 누리는 갈림길의 잔치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 잔치가 어떤 자리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4.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서신서 본문의 말씀은 더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가장 먼저 가르쳐주는 내용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여러 분파로 나뉘어져 분쟁을 겪고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바울을 통하여 개종한 바울파, 성경에 능통하고 웅변적인 아볼로를 따르는 아볼로파,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권위를 배경으로 모인 베드로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한 증언을 중시하는 그리스도파..... 나름대로 다 중요하게 보이는 이유로 무리지어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된 교회공동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앞에 차별은 물론이고 모든 차이도 넘어서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복음공동체라는 것을 사도바울은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대 유대인들은 자연법칙을 초월한 신비한 능력을 기대했고, 헬라문화권의 영향 아래 있던 이방인들은 지혜로운 것을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무력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뜻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싸우거나 훈련이나 노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 믿음으로만 얻게 되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 복음과 구원은 유대인이라서 주어지고, 헬라인이라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전1:24말씀처럼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부르심은 성령의 임재와 일하심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수백 번 읽고, 기도를 10시간씩 하고, 새벽기도를 지극정성으로 드린다고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임재와 일하심을 통해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 그런 의미에서 성령강림후 셋째주일,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이 놀라우신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충만하심이 경험되어지고,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감격을 누리는 사람은 우리가 초대받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고 싶어집니다. 이 세상은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하나님의 평안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랑을 행함으로 많은 이들을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 옵시다. 이 잔치를 베푼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선교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선교주일 헌금과 우리의 헌신 결단을 통해 우리 교회와 노회, 총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요, 노회요, 총회로 세워지는 은혜가 임하길 축원합니다. 할렐루야!